제201화. 특훈(3)
“날 귀하게 여긴다고요.”
정적을 깬 목소리는 공교롭게도 그 정적을 만들었던 이였다. 잠깐의 침묵 속에서 또 어떤 감정을 새롭게 품은 건지, 건주의 음정이 살짝 떨렸다. 딱 신경이 쓰일 정도로, 답답할 정도로, 불편할 정도로 떨리는 게 의도적으로 억양과 떨림을 조절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귀한 내가, 형한테 관심을 가지면 불편해요?”
한건주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트린 채 들지 않았다. 차라리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이면 덜 답답할 텐데 목소리만으로 판단하려니 그가 정확히 어떤 감정으로 이 말을 내뱉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섣불리 입을 열 수도 없다.
또 실수할까 싶어서.
고개를 숙인 채 어깨까지 좁히며 겁먹은 애새끼처럼 몸을 수그리고 있는 한건주는 제가 실수 하나만 더 저지르면 무너질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가 실제로 무너지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건주라는 사람이 이미 사윤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점이 중요했다.
호소하는 듯한 저 태도가 동정심을 유발한다.
시발 진짜.
음절 하나 내뱉기 어려워진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형은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어요. 미친 사람 같다가 정상인 같다가, 처연했다가 불쌍했다가. 무서웠다가 …짜증 났다가.”
“…시비 거냐?”
웬만하면 조용히 있으려 했는데 저게 자꾸 사람 신경을 건든다. 사윤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건주는 터진 둑처럼 제 생각과 감정을 쏟아 내었다. 얕은 파도가 계속해서 몸을 철썩이며 몰아붙이는 기분이 든다. 손이 붙잡힌 탓에 뒤로 물러날 곳도 없는데 계속해서 철퍽거린다.
“진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인 거 알아요?”
그게 니가 할 말이냐?
사윤은 당장이라도 그의 멱살을 붙잡고 일어나 여태껏 그가 자신에게 보여 줬던 행동들을 나열하고 싶었다. 도망갔다가 돌아온 애새끼가 할 말은 아니다. 뭐라도 잘못 먹은 건지 근래 들어 저를 향해 이상한 집착과 집념을 보이고 있는 놈이 할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알기 어렵기론 사윤이 27년을 살면서 만난 사람 중 제일인데 누가 누구더러 까다롭다 하고 종잡을 수 없다고 하는 건지.
누워서 침 뱉는 격이다.
“그런데도 형이 보이는 일관적인 태도가 하나 있다는 게 …너무 짜증 나요.”
잠깐 말을 멈췄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이어 간 남자가 마침내 사윤을 쥔 손에 힘을 뺐다.
이제 사윤은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자신을 붙든 손에서 빠져나와 몰아치는 파도를 피해서 뒤로.
그런데도 땅을 딛고 있는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간악했다가 다정했다가, 의미심장했다가 솔직했다가, 단순했다가 까다로웠다가 하는데 그 한 태도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이라는 게 날, 혼란스럽게 해요.”
떨림이 잦아든 목소리가 단조로워졌다. 의식적으로 어떠한 감정도 담아내지 않으려는 듯. 그렇기에 희미하게 배어 나오는 감정이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사윤의 시선이 동그란 머리통에 닿는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형한테 나를 곁에 두는 효용 가치는 내가 형을 죽일 수 있다는 것밖에 없어요?”
“…….”
이거 진짜 다 들었네.
쓸데없이 기억력도 좋아서 골치다. 조금 전, 말에 뜸을 들였던 게 이제 보니 고민 따위가 아니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곱씹고 정리하는 시간이었나 보다.
무슨 말을 해도 그가 원하는 답이 아닐 걸 알아 침묵했다. 사윤의 시선이 관성적으로 문을 향해 돌아갔다. 대화를 끝내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절반, 제대로 대해 보라는 이재희의 말이 거슬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절반 정도 마음을 채웠다.
그걸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한건주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대화를 중단할 태도를 보이면 그는 황망해하며 저를 잡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미약하게 걸쳐 있던 손가락마저 사윤의 손목에서 완전히 미끄러졌다.
“내가 형에 대해 알아보겠답시고 그 탑에 갇혀 있다 나왔는데도,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야, 네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데….”
“무슨 오해요.”
고개를 들었는데도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아래였다.
“제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데요. 말해 봐요.”
쏘아붙이는 듯 말하는 목소리가 꼭 뭔가에 지친 사람 같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태도가 끈질기다. 사윤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턱을 잡아 시선을 맞추고 종용하고 싶었으나 눈앞의 남자가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게 느껴져 그러질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의 한건주는 제가 윽박지르고 과격하게 협박하지 않는 이상 억지로 턱을 잡아 들어도 끝까지 눈을 내리깔고 있을 게 분명했으므로.
그의 반응을 살피느라 정작 그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니 한건주가 ‘거봐, 말 못 하네.’ 따위의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짜 짜증 나.
불퉁한 목소리가 환청인지 실제 목소리인지 모르게 머릿속을 울렸다.
“애초에 시키지도 않았는데 타인 하나 알아보겠다고 탑에 갇혔다가 나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어리고 이기적인 거예요? 형은 처음부터 자길 죽일 사람이 필요해서 날 데려왔는데 내가 그걸 못 해 주겠다고 하면 나쁜 거고요?”
물음조를 달았으나 물음과는 다른 부류의 목소리가 끝없이 날아든다. 묘하게 방 안 공기가 습윤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
규칙적인 물소리가 방에 깔린 정적을 메꾸었다.
“한건주.”
사윤은 버석한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참 만에 건주를 불렀다. 감정이 갈무리된 건지 아니면 할 말을 모두 쏟아 내 더는 고집부릴 생각이 없는 건지 그가 내리깔았던 눈동자를 천천히 올려 사윤을 직시했다.
덤덤한 목소리와 달리 동요의 잔재가 남은 흑안을 보고 나니 목구멍 안쪽이 꽉 조였다.
민낯이다.
무엇도 꾸며 내지 않고 무엇으로도 포장하지 않은 민낯이 거기 있었다.
“나도 하나 묻자. 네가 뭔데 이렇게까지 해.”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목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놀라 동공을 확장시키고 있으니 상대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도 다 주제넘었던 거예요?”
이상하네. 난 형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에 대해 물어본 것밖에 없는데.
받아치는 목소리가 조금은 날이 서 있었다. 무기력하고 단조로웠던 목소리보단 차라리 이게 낫다 싶어 사윤은 손을 뒤로 뻗어 의자를 가져왔다. 철제 의자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곤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물음 다 차치하고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무슨 말이에요?”
“너 지금 이렇게 시위하듯 구는 거, 짜증 내는 거, 비참해하는 거 내가 너한테….”
말을 하다가 한 번 끊은 사윤이 다리를 외로 꼬곤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짜증이 나는데 뭐 때문인지를 모르니 폭력성만 자꾸 훅훅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죽여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라서, 그게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 아니니.”
직설적으로 따져 묻자 한건주가 입을 앙다물었다. 아까는 그렇게 말을 잘하더니 이젠 또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지가 인어공주야, 뭐야? 사윤은 눈썹을 몇 번 까딱거렸다가 숨을 내뱉으며 철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미운 정이라도 들었어? 아니면 뭐, 너도 내가 귀해지기라도 했니.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자신이야 한건주가 제가 살아온 하나의 또 다른 삶으로 여겨졌으니 곁에 두려 하는 거지만 한건주는 이렇게까지 제게 맹목적으로 굴 이유가 없었다. 그의 심정이 이해 가지 않아 물으니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건지 또 침묵한다. 그 점을 사윤은 따지고 들지 않았다.
조금 전의 자신도 실컷 모든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했으므로.
이거야 원. 이래선 이게 대화인지 그냥 서로 벽에다 대고 일방적인 토로를 하는 건지 구별이 안 갔다.
그럼,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해야겠지.
폐부까지 눅눅한 공기를 쭉 들이켜 삼킨 사윤이 천천히 그것들을 내쉬며 꼬인 다리를 풀었다. 상체가 한건주 쪽으로 미약하게 기울어진다.
“그럼 넌 어쩌고 싶은데.”
제가 그를 죽여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곁에 두는 게 싫다면, 그가 제 곁을 떠나거나 하면 되었다. 단순한 도망과 달리 이번에는 서로 협의하에 보내 주는 거니 괜찮았다.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그런데 곁에 두고 있으면 계속 이런 식으로 부딪치고 계속 자기가 버림받아 소나기라도 처맞은 강아지라도 된 양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텐데 그걸 곁에서 보는 건 또 그것대로 기분이 나빴다.
제 심리가 이렇게 오락가락한 적은 저도 처음이었다.
아수라 백작 체험을 다 하고 있어 헛웃음이 흘러나오려고 할 때 사윤의 눈을 똑바로 마주친 남자가 오랜 침묵 끝에 첫마디를 내뱉었다.
“전 형을 살리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윤의 호흡이 멎었다.
발밑에 크레바스가 생기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