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특훈(2)
“…지금 누구 놀려요?”
“놀리는 거로 들렸니.”
정말로 의문이라 되묻자 건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돼 쩝, 입맛을 다신 사윤이 목덜미를 눌러 뭉친 근육을 풀었다. 뭉친 근육은 이런 식으로 힘으로 누르면 풀리는데 엉킨 관계는 어떻게 해야 풀리는 건지 모르겠다. 힘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더 꼬이니, 인간관계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건데.
사람과의 관계는 번거롭고 귀찮았다. 힘으로, 지위로, 권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니라면 적당한 선이 있어야 했는데 한건주와 자신의 관계에선 그 선이 희미했다.
없었다는 건 아니다. 자신은 늘 상대가 넘어선 안 되는 선을 긋고 살았으니까. 한건주에게도 그랬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늘. 다만 한건주가 그 모든 걸 무시하고 번번이 선을 넘고 있을 뿐이고 자신이 그런 그를 완전히 내치고 있지 않아 이상해졌을 뿐이다. 기껏 그어 놓은 선을 넘어도 별다른 현상이 없으니 이게 선이 희미한 거지 뭐겠나.
이상한 관계였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데… 생각해 보니 의아스러운 건 하나 더 있다.
제가 그어 놓은 선을 넘고 있는 건 한건주다.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은 선을 안 넘었나.
그 전에 한건주가 그어 놓은 선을 제대로 보긴 했던가. 애초에 한건주가 제게 선을 그은 적이 있었나?
모르겠다. 과거에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사람과의 관계보단 그 가치를 재는 데 급급했기에 한건주에 대해선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 그 탓에 떠오른 의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입가에 자조와 조소가 배었다.
“지금도 놀리고 계시네요.”
그 옅은 웃음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한건주가 잔뜩 심통 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놀리는 게 아니라 꼴 받는다고 하길래 그래, 너 꼴 받았구나 내가 꼴 받는 사람이구나 하고 인정해 준 것뿐이었던 사윤은 도리어 억울해졌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어느 육아 책에서 그랬다. 애새끼가 고집을 부리고 토라지면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주고 공감해 주며, 내세우는 의견의 일부를 인정해 주라고. 그래야 무시당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이 풀어진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책은 뭔가 잘못된 모양이다. 책에 나온 방침을 성실히 실천했는데도 한건주의 얼굴이 풀어지긴커녕 오히려 더 모욕적이라는 듯 변했으니까.
제목이 기억나면 태워 버리든가 해야지.
잘못의 책임을 애꿎은 저작물과 책의 저자에게로 넘긴 사윤이 쪼그려 앉아 있던 건주를 내려다보다 고민했다. 옆에 같이 앉아 주는 것과 천천히 손을 뻗어 일으켜 주는 것 중 뭐가 더 나은지 감이 안 왔다. 이재희가 이런 건 알려 주지 않았다. 그저 나가서 사과하라고만 했지.
그 사과를 막 할 수가 없어 일단 스몰토크라도 해 보고자 했다가 이 사달이 났다. 어째 자신이 입을 열기만 하면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랑은 안 이랬는데 한건주와 대화를 하면 늘 이렇게 된다. 그렇다는 건 한건주에게도 어느 정도의 문제가 있다는 거 아닐까.
나름 논리적인 판단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생 쪼그려 앉아 있을 것처럼 굴어 놓고 일어나는 건 또 금방이었다.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
“우리 얘기요.”
길드장님도 그 얘기 하려고 나오신 거잖아요.
일말의 의구심도 없는 투로 덧붙인 남자가 사윤을 붙잡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사윤은 시선을 내려 제 손을 잡아챈 하얀 손을 묵묵히 응시했다.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꺾고자 하면 쉬이 부러트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저항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건주에게 화를 낼 생각이 없었으므로.
괜히 힘을 썼다가 저 손가락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전적이 있었기에 순순히 따라가니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숙소 층수를 누른 남자가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대로 어딘지 조금은 숨 막히고 신경에 거슬리는 답답한 정적이 이어졌다. 숨소리가 들린다. 한건주의 입에서 한숨을 담은 숨결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목표했던 층에 도착하자 건주는 사윤을 끌고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얘기는 복도에서도 할 수 있는데 왜 여기까지 힘들게 이동한 건지,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눈을 마주치고 있자 목적지에 도착했으면서도 사윤의 손을 놓지 않고 있던 남자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왜 그 사람이랑 얘기해요?”
한참 만에 깨진 침묵이었다. 이야기의 서두를 열어 갈 말로는 적합하지 않아 사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무슨 말이야?”
“저랑 관련된 일을, 왜 그 사람이랑만 얘기하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이재희?”
“네. 전에도 지금도 저랑 일 생기면 저랑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랑 얘기하잖아요. 왜 그래요?”
진짜 사람 꼴 받게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뒤에 덧붙인 말은 비아냥 같았지만 자조처럼 들렸다. 사윤은 한건주가 이런 말을 꺼낸 저의가 뭔지 파고들기 위해 팔짱을 꼈다. 아니, 정확히는 끼려고 했다. 들어 올리려는 손을 손목을 붙잡고 있던 한건주가 막지만 않았으면. 꼭 하지 말라는 듯 꽉 붙잡고 있어 눈살을 구긴 사윤이 건주의 표정을 응시했다.
표정은 여전히 안 좋고, 시선은 불만스러운데 손길은 또 이유 모르게 절실해 보인다. 꼭 자기가 이 손을 놓으면 내가 어딘가로 가 버릴 것처럼 잡고 있지 않은가.
여러 점을 따지고 봤던 사윤이 설마 싶어 입을 달싹였다.
“한건주.”
“왜요.”
“너 서운해서 이러니.”
긴가민가해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를 것 같아 단도직입적으로 직구를 던지자 입술을 감쳐문 이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의 의도를 짐작한 사윤이 헛숨을 삼켰다.
뭐야.
진짜 서운해서 이래?
기가 찬 상황이었다. 그에 대한 특별 대우란 대우는 다 해 주고 있는데 서운해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이재희는 그냥 밤쥐 길드에 살고 있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토템 같은 거였다. 자기가 원해서 거기 있었고, 이해관계가 일치해 거기 두는, 종종 도움을 받고 그 대가로 자신은 그에게 제 정보를 제공하는 그런 관계였다.
그 관계를 보며 서운함을 느낄 게 정말로 뭐가 있단 말인가.
이재희가 천기를 읽는 자였기에 그에 맞는 대우를 하고 협력 관계였기에 그에 맞는 태도를 취한 것뿐이었다.
“야, 예쁜아. 네가 서운해할 게 뭐가 있냐?”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말투가 거칠어지자 한건주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없어요? 말했잖아요. 저랑 얘기해야 할 문제를 왜 그 사람이랑 대화해서 푸냐고요. 얼마나 그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즐거웠으면 밖에 저 있는 것도 못 느끼고 그렇게 얘기해요? 충분히 탐색하실 수 있었을 텐데.”
차갑게 이어진 뒷말에는 아차 싶었다. 가만히 듣고 있다 말고 손끝을 움찔거린 사윤이 눈을 게슴츠레 떠 건주와 시선을 교환했다.
“다 들었냐?”
“…….”
“다 들었냐고.”
“…….”
“하. 그래, 못 들었을 리가 없지.”
S급인데 못 들을 리가 있나.
제가 부주의했다. 그 사실을 인정한 사윤은 속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이재희 그 여우 같은 새끼.
그 새끼도 S급이니 밖에서 한건주가 듣고 있는 걸 알았을 거다. 제가 한건주와의 말다툼으로 방심해서 감이 옅어져 있을 때를 노리고 판을 짠 게 분명했다.
대체 그가 본 것이 뭐길래.
천기누설이고 나발이고 일단 멱살을 쥐어 잡아 흔들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손목을 죄는 힘이 강해졌다.
“지금 누구 생각해요?”
“…….”
이번엔 사윤이 침묵을 선택했다. 불편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손목을 빼내려 하니 한건주가 고집이라도 부리듯 손에 힘을 주었다. 사윤의 눈썹이 씰룩 올라갔다.
“손목 부러진다, 한건주.”
내 손목 말고 네 손목.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는데도 놓지 않는다. 그게 꼭 빼낼 거면 제 손목 부러트리고 가라는 식의 시위처럼 느껴졌다. 경고에도 움찔거리긴커녕 오히려 긴 손가락이 손목 부위를 덧그려 인상을 썼을 때 한건주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저보다 그 사람이 중요해요?”
뭐라는 거야?
아까부터 황당한 말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어이없는 말만 골라 내뱉는 것도 재주라 그를 빤히 보던 사윤이 기억을 더듬었다. 이런 걸 뭐라고 했더라.
“한건주.”
“말해요.”
“너 질투하냐?”
그래. 질투. 딱 그거였다.
어느덧 서운함에서 감정을 한 발 더 내디딘 이를 미심쩍게 쳐다보니 사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던 이가 별안간 하, 하고 감정 섞인 웃음을 흘렸다.
“제가 왜요.”
당황하거나 침묵하거나, 애새끼처럼 짜증을 낼 줄 알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을 모두 빗나간 냉소였다.
“길드장님 말마따나 제가 길드장님이랑 그 사람 사이에 간섭하거나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잖아요. 안 된다면서요. 간섭할 처지가. 그런데 제가 질투를 왜 해요.”
“시발, 그럼 간섭하지 말고 얘기하든가.”
왜 걔랑만 대화하냐느니, 누구 생각하고 있냐느니 간섭이란 간섭은 다 해 놓고서 할 말이 아니었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가 과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과격해지자 그가 사윤을 홱 끌어당겼다.
“간섭하지 말라고요? 전 또 그 말만 듣는 거예요? 이 얘기 하려고 나왔어요?”
“야.”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사윤의 인상이 험악해졌을 때 한건주가 입술을 짓씹으며 소리를 냈다.
“내가 먼저 알았잖아요.”
“…….”
“나한테, 부탁할 것도 있잖아요.”
“…한건주.”
사윤이 숨을 삼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근데 왜 간섭하면 안 돼요. 그 사람은 이미 다 간섭하고 있잖아요. 형도 저한테 다 간섭하고 있잖아요. 나한테 부탁할 것도 있으면서, 나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고 있잖아요. 그럼 이용당하는 처지로서 어느 정도 간섭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왜 자꾸, 나를 배제시켜요?
꾹 억눌린 의문에 사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비참함이 담긴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