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특훈(1)
“야, 이게 내가 잘못한 거냐?”
건주가 나간 뒤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방에서 사윤이 물었다. 억울하다는 심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숨을 길게 끈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탁, 소리 나게 읽고 있던 책을 덮은 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다음 몸을 틀었다.
“그렇게 면박을 주는데 안 나가고 배기겠어요?”
“내가 면박을 줬냐? 그냥 왜 간섭하냐고 물은 거지?”
“보통의 사람들은 그걸 질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죠. 사윤 씨도 순수한 의문으로 질의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내가 잘못한 거라고?”
“이번에는요.”
걱정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조곤조곤하게 대답한 이재희가 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격정적인 이쪽과 달리 저쪽은 시종일관 평화로운 분위기였기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사윤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등에서 머리까지 한 번에 탕, 하고 떨어지자 반동에 의해 매트리스가 두어 번 튀어 오른다. 놀란 뱀들이 침대 아래에서 우르르 튀어나왔다.
“이것들은 왜 내 방에 있어?”
간식 방에 자기들 공간이 떡하니 있는데 주인집 주거 침입을 하고 있다. 기어오른 뱀들을 만져 주고 있으니 이재희가 이실직고했다.
“자꾸 근처에서 기웃거리길래 그냥 들여보냈어요. 사윤 씨가 없어서 외로워하는 것 같더라고요.”
“얘들이?”
웃기는 소리 하고 있다. 외로워하는 게 아니라 꼬박꼬박 밥 갖다 바치는 인간이 없어서 시위를 부린 거겠지.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뱀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지 않고 있자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재희가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쉬었다.
“건주 씨를 대할 때도 그렇게 대하면 될 텐데. 어렵습니까?”
조언인지 꾸지람인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눈매를 가늘게 접은 사윤이 손을 내밀었다. 달라는 듯 손목을 까딱까딱 흔들자 뒤늦게 행위의 의도를 눈치챈 남자가 환수를 소환했다.
컹!
하얀 펜리르가 사윤에게 달려왔다. 팔을 벌려 기꺼이 라이를 안아 준 사윤이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걜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 넌 짐작도 안 갈걸.”
입 밖으로 내뱉은 속마음에 이재희가 헛웃음을 흘렸다.
“귀하게 여기는데 그런 말을 하며 쫓아내요?”
“야. 내가 쫓아냈냐? 지가 나간 거지?”
“원인 제공은 사윤 씨가 하셨죠.”
“엄밀히 따지면 걔가 자꾸 꼬치꼬치 캐물은 게 원인이지. 그러게 뭘 자꾸 묻고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 그래? 사람 불편하게.”
“그 질문이 불편했습니까?”
“그럼 안 불편하냐?”
“왜요?”
“…….”
특별할 게 없는 말이다. 고저도 없는 그저 반문에 불과한 말인데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자기 앞에서 죽지 말라는 한건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엉망으로 일그러졌던 표정이 생각나니 마음이 산란해졌다.
“아씨.”
또다. 또 이런 식으로 외면하고 있는 건지, 무시하고 있는 건지 모를 제 감정을 이재희로 인해서 마주 보게 된 사윤이 애꿎은 라이의 털만 꽉 쥐었다. 캥! 봉변을 당한 펜리르가 놔 달라는 듯 켁켁 댔다. 털만 잡았는데 엄살떨고 난리도 아니었다.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 있었죠?”
“그래, 너 점집 차리고 다 해라.”
족집게처럼 짚어 내는 남자에 감탄 같은 비아냥을 흘리자 이재희가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근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정말 건주 씨가 귀하다면, 사윤 씨는 그 태도부터 바꿔야 해요.”
“나가서 한건주한테도 강의하고 와라. 자꾸 기어오르니까 내가 화내는 거라고.”
“사윤 씨.”
고작해야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속이 뜨끔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던데 이재희는 물속이고 나발이고 천기를 읽는 이였기에 제 마음이 죄 읽히는 듯했다. 끙, 하고 불편한 침음을 흘린 사윤이 눈치를 보다 몸을 일으켰다. 폼생폼사로 사는 밤쥐 수장 다 죽었다. 사람 눈치도 보고 말이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손에 넣은 천기를 읽는 자 좀 이용해 먹자.
어차피 제 길드원이고 제 사람이 된 이재희인데 꺼릴 게 뭐 있나 싶어 자세를 바로 한 사윤이 무릎 위에 라이를 올려 둔 다음 게이트 안에서 있던 일을 간단히 요약해 들려주었다. 중간에 말을 가로채는 일 없이 얌전히 듣고 있던 이재희가 결론을 내렸다.
“미안해서 그러는 거네요.”
너무나도 간단한 결론에 사윤이 웃었다.
“미안해? 내가? 걔한테?”
말도 안 된다는 듯 표정을 구기자 재희의 시선이 사윤에게 닿았다. 동요 없이 차분한 눈동자가 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어이가 없다며 허허, 웃고 있던 사윤이 서서히 표정을 지웠다.
“사윤 씨. 제가 전에 물어봤던 거 기억합니까?”
“네가 하도 많은 걸 물었어야지. 뭔데?”
“죽고 싶은 건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건지 생각해 보라고 했던 거요.”
“아, 그거.”
사윤이 짧은 탄식을 흘렀다. 당시엔 뭐라고 대답했더라. 죽어야 한다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던 사윤이 입을 열었다.
“죽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빼고 생각했을 때도, 전자긴 하더라.”
게이트에서 한건주에 대한 고찰을 끝냈을 때 사윤의 기분은 시스템을 받은 이래 가장 최고점이었다. 그 순간 든 생각이 죽고 싶다, 였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덤덤하게 말하자 잠시간 뜸을 두던 이재희가 말을 이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 보죠. 사윤 씨는 지금 자의든 아니든 불사의 몸입니다. 그런 사윤 씨를 누가 죽일 수 있을까요.”
“지금은 없겠지.”
“그럼 사윤 씨가 목표로 하는 성향이 활성화된 후에는요?”
“…….”
“만약 정말로 새로운 성향이 활성화됐을 때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사윤 씨는 자살을 선택하겠죠.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윤 씨가 스스로 죽을 수 없다면, 혹은 아무한테나 죽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시발, 너 어디까지 읽었어.”
사윤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로 노려보는데도 이재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사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재희의 패턴은 어느 정도 파악했다. 저러다가 천기누설까지 사용하고 각혈해 댈 게 뻔해 경계 태세를 올리고 있을 때 모든 무장을 무력하게 하는 질문이 들렸다.
“건주 씨가 사윤 씨를 죽일 수 있을 거라 보는 겁니까?”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숨겨 두었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라이를 쓰다듬던 손이 멈추었다. 호흡도 잠시 멈춘다. 시선만 고정시켜 둔 채로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있으니 이재희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선혈이 천에 묻어 나왔다.
“너….”
사윤이 천을 응시하다 말을 흘리자 이재희가 살짝 웃었다.
“무얼 누설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소량의 각혈이니 중대한 비밀을 누설한 것 같진 않고. 그렇다는 건 한두 마디 정도 했다는 건데 제가 여태 얘기한 말은 많으니 무엇이 개인적인 추측이고 무엇이 천기누설인지 짐작하시느라 바쁘시겠죠. 그런데, 기왕이면 알아내려 하지 마시고 그냥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천기는 하늘의 비밀이기에 알아봐야 좋을 게 없습니다.”
무겁기만 할 뿐이죠.
지친 목소리로 덧붙인 남자가 입가를 닦은 손수건을 고이 접어 소파 팔걸이 위에 올린 다음 사윤을 바라보았다. 자기는 할 말이 끝났으니 대답하라는 시선이었다. 얼핏 강압스럽기까지 한 눈길에 몇 번 허, 허. 하고 기막힌 숨을 토한 사윤이 몸에 힘을 풀었다.
저게 진짜 미친놈이라니까.
단순히 하는 행동이 이상해서, 사고방식이 독특해서 따위가 아니라 그냥 돌아 있었다. 저더러 미친 새끼라고 하는 자식들은 모두 이재희를 한 번씩 겪어 봐야 한다고 속으로 항의하자 이재희가 한 번 더 저를 불렀다. 좀 기다릴 것이지 어지간히도 재촉했다.
“그냥 가서 점집 차려라. 이재희의 상담소도 열고. 어?”
진저리 난다는 듯 얘기하자 이재희가 웃었다. 제가 그의 물음에 긍정했다는 걸 알아차린 표정이었다. 에라이 시팔. 이상한 놈들만 주워 와서는.
그 이상한 놈들 중 최고봉인 사윤이 투덜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거랑 내가 미안해한다는 건 또 무슨 상관인데.”
“사윤 씨는 건주 씨한테 죽여 달라고 얘기할 계획이니 미안한 거죠.”
“…….”
“자기 앞에서 죽지 말라고 부탁한 상대한테 죽여 달라고 말할 생각인데 마음이 편하겠어요? 그 불편한 감정을 건주 씨가 자꾸 파고들려고 하니 방어하기 위해 사윤 씨도 모르게 날을 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건주 씨 탓이 아니죠. 사윤 씨와 사윤 씨가 가진 방어 기제의 문제지.”
이래도 조금 전 다툼의 책임이 사윤 씨한테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덧붙이는 말은 이제 완전한 질책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주 다 이겨 먹지.
사람 속도 읽고, 계획도 읽고, 천기도 읽고. 읽는 거 많아서 차아암 좋겠다.
눈길로 불편과 불만을 표한 사윤이 반박 없이 손목을 털었다. 구구절절 사실만 말해 무어라 반박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길길이 성을 내자니 그거야말로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꼴 아니겠는가.
쯧, 혀를 차며 몸을 돌린 사윤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가면 사과부터 하세요. 어린 사람이잖아요.”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오늘부터 월세 십만 원 씩 내라고 받아치자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놀려 먹는 재미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한 사윤은 문을 열고 나갔다가 흠칫 놀랐다.
“뭐야?”
이 새끼는 또 왜 여기 있어?
자기 발로 문 박차고 나갔으면서 제 방문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건주를 보고 황당해한 사윤이 발로 그의 신발을 건드렸다. 팔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이가 시선을 들어 올린다.
‘연하 애인이 어리광 부리면 받아 줘요.’
언젠가 이재희가 얘기했던 그 말이 왜 하필 지금 생각나는 건지 모르겠다.
눈앞의 애새끼는 애인도 뭣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꼴받는 형아 왔다.”
혀를 차며 그리 말하니 건주의 얼굴이 구겨진다. 짜증과 서러움이 가득한 표정에 사윤이 눈을 깜빡였다.
뭐야.
이거 아니야?
어리광을 받아 준 사윤은 두 배로 황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