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98)화 (198/266)

제198화. 죽은 자와 산 자 (5)

‘네가 날 돕겠다고?’

듣기 좋은 미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음, 알고 있어? 날 도우면 네가 내 운명을 대신 짊어지게 되는 거야. 그게 무서워서 다들 죄수랑은 말도 안 섞으려 하지. 자기 것도 아닌 운명을 대신 감당하게 되는 건데 누가 원하겠어?’

‘그래도 괜찮아?’

‘하하! 너 정말로 가장 순수한 선이구나? 장담하는데 네 선임은 어리석었어. 나였다면 널 절대로 이곳에 들이지 않았을 거야. 원래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은 선이 가장 무서운 법이거든.’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들어 본 적 없는 것 같으면서도 향수가 느껴지는 듯해 이불을 쥔 손이 움츠러들었다.

‘여전히 돕고 싶어?’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이번에 날 …면 …에 내가 널….’

뚝, 뚝. 말이 끊어지기 시작한다. 제대로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인상을 쓴 것이 무색하게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기만 했다. 종국엔 아예 사라져 버린 음성에 그것을 찾아 한참을 헤맸다. 몸이 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형님, 형님! 누군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사윤은 눈을 떴다.

“…아.”

번쩍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자 가장 먼저 인공적인 빛이 눈에 비쳤다. 눈살을 찌푸린 사윤이 기억을 더듬었다. 무언가를 꾼 것 같은데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다. 귓가에 간지러운 느낌만 남아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형?”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사윤은 눈동자를 굴려 사위를 살폈다. 익숙한 곳이다. 제 향이 나는 침대, 제 눈에 익숙한 인테리어.

밤쥐 건물.

그곳에서도 제 방이었다.

클리어해서 여기까지 이동한 건가?

상황을 파악한 사윤이 자신을 부른 이를 돌아보았다. 한건주를 중심으로 양쪽에서 종식과 경진이 눈을 치켜뜨며 제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저 뒤엔 의자에 앉아 있는 이재희도 보이는 게 누가 봐도 제 길드였다. 부지불식간 웃으니 자신이 무사하다는 걸 확신한 종식이 울음 같은 고함을 터트렸다.

“형니이임! 왜 이제 깨어나시는 겁니까! 이번에야말로 관 뚜껑 덮으실 줄 알았다고요!”

“…무겁다, 종식아.”

덩치 생각 안 하고 제 위로 달려들어 꺼이꺼이 울어 대는 다 큰 남성을 한심하게 바라본 사윤이 비키라며 손을 저었다. 고집을 부리길래 목덜미를 붙잡고 홱 들어 올리니 우스꽝스럽게 들린 종식이 눈을 깜빡였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 …멀쩡하시네요?”

“그럼 곧 죽을 것처럼 골골거려야 하냐?”

어이가 없어 묻자 종식이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윤은 손에 들린 충직한 부하를 대충 소파로 내던진 다음 몸을 일으켰다.

“괜찮네.”

뻐근한 곳도 없고 쓰라린 곳도 없이 정상적이다. 기절해 있던 동안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된 듯해 개운한 몸을 스트레칭하며 꿈을 더듬었다.

이상하게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영의 소리만 사용하면 이랬다. 분명 꿈을 꾸었는데도 그 속의 의식이 통째로 도려내진 것처럼 날아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느낌이 불쾌해 웬만한 일이 아니고선 사용하지 않는 스킬이었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스콜피언이 정말로 돌아온 게 맞는다면 어쩌다가, 무슨 경위로, 왜 돌아왔는지 알아야 했으므로.

어깨를 짚은 채 목을 양쪽으로 꺾어 뚝뚝 소리를 낸 사윤이 경진을 돌아보았다. 어린 양처럼 안쓰러운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한건주가 신경 쓰였지만 먼저 처리할 일이 있었다. 대신이라 하긴 뭐했지만. 그의 머리 위로 손을 얹어 부드러운 머릿결을 헝클인 사윤이 입을 열었다.

“스콜피언 맞더라, 걔네.”

“누구. 납치범들?”

“그래.”

“와. 그럴 것 같긴 했는데 진짜로 돌아왔어? 간도 크지.”

경진이 혀를 내둘렀다. 지옥에서도 올라올 놈들이라고 얘기한 그가 의자에 두 발을 얹어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기울이고 사윤을 보았다.

“그래서, 정보는요.”

맡겨 놓았다는 듯 캐묻는 건 익숙했다. 자신이 영의 소리를 사용해 은밀한 정보를 얻으면 경진이 그것을 필두로 가지를 뻗어 나가 새로운 것들을 물어 오곤 했으니까. 주둥이를 자유분방하게 놀리는 것만 아니면 참 쓸모 있는 길드원이었다.

“걔들이 사이비가 된 것 같던데.”

“사이비?”

“어. 맞다, 게이트에 있던 스콜피언 놈은 어떻게 됐냐? 죽은 놈들 말고 살려 둔 놈.”

전투하다 보니 그 존재를 잊고 있었다. 이름도 기억 안 나 창현? 조현? 하고 아무거나 막 던지고 있으니 제게 묻는다는 걸 알았는지 건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머리를 짚고 있던 사윤의 손목이 살짝 꺾였다.

“…게이트에서 죽었어요. 그땐 다들 그 사람을 지키고 싸울 틈이 안 나서.”

“그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다. 역시 아델리아의 무덤이 그 녀석의 묫자리가 맞았다고 중얼거린 사윤이 경진에게 스콜피언에 관한 정보를 늘어놓았다. 영의 소리로 파악한 정보까지 얘기하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인 건지 입술을 매만진 경진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다 와아악! 하고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짖어 댔다.

“왜 이래?”

“왜 이래? 왜 이래애? 미쳤어, 형님? 갑자기 아델리아의 무덤을 공략해 오겠다더니 형님이 아끼는 자식은 스콜피언한테 납치되질 않나, 형님은 기절해서 돌아오질 않나. 그래 놓곤 일거리를 산더미처럼 주는데 내가 아이고 새로운 일거리를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하고 받게 생겼냐고. 무슨 사건 사고가 이렇게 많아? 안 그래도 방금까지 협회 관련 정보 정리하고 왔는데….”

경진이 발작하듯 포효했다. 사윤은 자기가 아주 미치고 팔짝 뛰겠다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이를 보다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연봉 협상할 때가 되긴 했지.”

“아이고…, 슬슬 새 일거리가 필요한 참이었지요. 뭐부터 할까요, 형님?”

속물 같은 놈.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태세 전환이 거슬렸다. 박쥐가 따로 없다며 경진의 이마 앞에서 손가락을 튕긴 사윤이 딱밤을 맞고 굴러다니는 이를 무시한 채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을 닦았다.

“스콜피언 과거 자료부터 해서 싹 다 다시 정리해. 누가 살았는지, 누가 죽었는지 수소문해서 명부도 다시 작성하고.”

“…….”

“왜, 못 하겠어?”

사윤이 고개를 외로 꼬았다. 초점이 나간 눈빛을 받은 경진이 웃으며 목숨처럼 들고 다니는 태블릿을 품에 안았다.

“해야죠, 암요. 해야지.”

내가 이 빌어먹을 길드 언젠가는 퇴사해야지.

덧붙은 말이 조금 이상했으나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놔뒀다. 영혼이 탈탈 털리기라도 한 것처럼 힘없는 걸음으로 비칠비칠 이동한 경진이 소파에 널브러진 종식과 동병상련의 처지를 나눴다. 둘이서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아주 단란했다.

막상 시키면 제일 잘하는 주제에 게을러서 탈이지.

혀를 차며 경진에 대한 평가를 마친 사윤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장 급한 건을 처리했으니 이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들어 볼 차례였다.

“한건주.”

“그러게 제가 쉬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음?”

“왜 사람 말을 안 듣고 전투하다가 쓰러지고 그래요? 혹시 기절이 취미예요?”

제게 그와 대화할 여유가 생겼다는 걸 눈치챈 건지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인다. 요즘따라 앵앵거리기 시작하는 건주에 사윤은 눈썹을 들썩였다가 침묵을 고수했다. 거슬리는데 또 묘하게 듣기 재밌어 내버려 둘지 한번 잡을지 고민이 되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으니 이상함을 직감한 남자가 추궁했다.

“또 무슨 생각 해요?”

“너 건방지다는 생각.”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러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가 널 왜 가만히 내버려 둘까.”

스스로도 의문이라 중얼거리는데 뒤에서 경진이 욕설을 지껄이는 게 들렸다.

“이젠 내가 시발 회사에서 상사 연애질까지 다 보고 있네.”

“연애질?”

들린 말을 되받아치니 움찔거린 경진이 이만 가 보겠다며 종식을 끌고 일어났다. 일이 생기면 불러 달라 얘기한 뒤 사라지는 속도가 여태껏 본 속도 중 가장 빨랐다. 순식간에 문 너머로 사라진 이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사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 연애하나?

경진의 상사라고 해 봐야 같은 밤쥐 간부들과 자신이 전부였다.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어 옌을 떠올린 사윤은 남의 연애사를 파고들 생각이 없어 어깨만 으쓱였다.

“왜 쓰러진 거예요?”

경진의 난동으로 엇나간 주제는 한건주가 다시 찾아왔다. 타박하듯 몰아붙이는 건 포기한 건지, 아니면 조금 전의 제 말을 경고로 알아들은 건지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진 채였다. 사윤은 솔직하게 말해 줄까 하다가 저를 향한 불만으로 가득 찬 흑안을 발견하곤 마음을 바꿨다.

“그걸 네가 알 필요가 있니.”

“왜 없어요. 제 앞에서 쓰러진 건데. 저한테 잡으라고도 했잖아요.”

“잡으라고만 했지 이런 걸 따져 물으란 적은 없었는데.”

“그럼 애초에 물을 일이 없게…!”

억울하다는 듯 반박하는 목소리가 드물게도 언성이 높았다. 사윤이 즉시 표정을 구기며 탕, 하고 그가 앉아 있는 의자 다리를 발로 찼다. 미약한 힘이었기에 의자가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대방을 놀라게 할 정도는 됐나 보다. 둥글게 커진 눈동자가 사윤을 직시했다.

“한건주.”

“…….”

“건주야.”

“왜요.”

대답이 없어 다시 부르니 그제야 불퉁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사윤이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봐준다고 계속 기어오르면 안 되지.”

웃음기 짙은 표정과는 반대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싸늘했다. 뒤에서 이재희가 한숨을 내쉬어 그쪽으로 잠시 시선을 둔 사윤이 속으로 생각해 둔 말을 꺼냈다.

“네가 간섭할 처지가 돼?”

나한테?

덧붙인 말에 건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어서 헛웃음을 흘린 남자가 다리를 쭉 뻗어 의자를 뒤로 물리곤 사윤을 노려보았다.

“형은 멀쩡히 살던 사람 납치해서 인생에 간섭했으면서 나는 그러면 안 돼요?”

“한건주.”

“제가 말했죠. 형은 진짜, 사람 꼴 받게 만든다고.”

그리고 가끔은 날 비참하게 해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문을 쾅 닫고 방을 나간다. 직후 바람이 그랬다는 목소리가 따라왔기에 사윤은 닫힌 문을 바라보고 눈을 깜박였다.

“하아아.”

이재희의 짙은 한숨이 정적이 깔린 방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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