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죽은 자와 산 자 (4)
힘없이 늘어진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다. 여기저기 관통당하는 바람에 옷차림이 말이 아니었던 건지, 한건주가 직접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몸에 덮어 주었다. 사윤이 웃었다. 외투를 어깨 위까지 올려 주는 손길이 꼭 죽은 사람 위에 흰 천을 덮는 의식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나 죽을 때도 꼭 이렇게 해 주라.
농담조로 내뱉으려던 말은 직전의 이야기를 상기해 쏙 들어갔다. 그 바람에 말에 공백이 생겨 자조로 채우니 실없는 웃음에 남자가 이쪽을 돌아본다.
“…….”
조금 전 들린 목소리가 영 울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주한 한건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정도로.
네가 왜 그런 표정이야.
죽었다 살아난 건 자신인데 표정만 보면 그가 구사일생을 겪은 사람이었다. 검은 눈동자 가득 자리한 비애가 사람의 마음을 꽉 쥐었다 놓는다. 사윤이 휘청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덜 됐어요. 일어나지 마세요.”
“S급이 물 몸으로 보여? 이 정도면 다 회복된 거야.”
“그럼 그냥 일어나지 마세요.”
“이것 좀 보게?”
막무가내로 구는 이에 기막혀하고 있으니 사윤의 감정보다 더 큰 황당을 품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리꽂혔다.
“허이고야. 놀고 자빠졌네. 꼬맹이들! 일 끝났으면 좀 돕지?”
사윤과 건주를 대신해 남은 망령들을 처리하고 있던 미정이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이 입꼬리를 당겼다. 오래 누워 있긴 했다 싶어 일어나려고 하는데 손 하나가 움직임을 저지했다.
“제가 갈게요.”
“너 하나 가는 게 빠르겠니, 내가 돕는 게 빠르겠니.”
“삼천 마리만 더 잡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그냥 누워 있어요.”
“됐어.”
“좀!”
어깨를 꽉 붙든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가 큰 소리 내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사윤의 눈동자가 커졌다.
방금 쟤가 뭐라고 한 거야?
사실 제가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건주가 성을 낼 일이 있나. 그것도 이런 식으로.
겁대가리를 상실한 게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이 새끼가 손목 부러진 기억은 늪 바닥에 처박고 왔나.
상대가 한건주라면 건방지게 구는 걸 어느 정도 용인은 해도 대놓고 기어오르려는 걸 참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협박성을 담아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건주의 입술 사이로 불안정한 숨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사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건주가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미약하게 귓가에서 흩어진다.
“좀 누워 있으라면 누워 있어요. 방금 살아난 거잖아요. 난 당신이 쉬었으면 좋겠어요.”
“웃기는 소리를 하네? 게이트에서 쉬는 게 가당키나 하니.”
“지금은 그쪽이 무리할 필요 없는데 왜 가당치 않아요? 길드장님이 힘 안 써도 클리어할 수 있어요. 쉰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고요. 리치를 죽인 게 그쪽인데 누가 뭐라 해요.”
“…….”
“가장 큰 몫을 쟁취했으면, 권리 좀 누리면 안 돼요? 왜 또 저기로 달려들려 해요?”
말에 물꼬가 트인 건지 문장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사윤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건주야,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원래 이럴 땐 제일 센 놈이 선두에 서서….”
“아니잖아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목소리가 이야기를 자른다. 사윤의 눈이 가늘어졌음에도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건주가 입을 열었다.
“아니잖아. 그런 이유로 가려는 거.”
“반말하니?”
“지금 그게 중요해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왜 그렇게 무리해요?”
그다지 무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말문이 막혀 당황한 사윤이 목을 매만졌다. 목소리라도 잃은 건가 싶을 때 눈앞의 남자가 제 어깨를 꽉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요.”
그러곤 폭발해서 화를 낼까 말까 하는 미정의 곁으로 가 고개를 한 번 까딱 숙이고 전투에 합류했다. 얼결에 얼음 바닥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게 된 사윤은 건주와 나눴던 대화를 차분히 복기했다.
왜 그렇게까지 한건주가 성을 낸 건지 감이 안 온다.
놀라서 그런 건가?
제가 그의 앞에서 죽을 뻔한 적이 이번이 처음이었나?
불리한 전투에선 늘 이런 식으로 싸웠기에 한건주를 딱히 고려하지 않았다. 기억을 곱씹어 가며 고민해 보던 사윤은 제 어깨에 걸쳐진 외투를 보다가 머리를 털었다.
한건주는 예민하고 까다롭다. 물에 던져 놓으면 가끔 단순해지긴 하는데 전체적인 성향 자체가 그랬다. 그래서 다루기 더 까다로운 놈이다. 그가 대체 왜 이러는지는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을 듯해 가부좌 자세로 앉아 한쪽 무릎 위로 팔꿈치를 내린 채 턱을 괸 사윤이 전투를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돌아온 뒤로 제대로 그의 전투를 살펴본 적이 없었다.
뭐, 잠깐 봐 주는 건 상관없겠지.
지켜보다가 몸이 근질거릴 때쯤에 가세하면 될 거였다. 사윤의 눈동자가 신속하게 움직이는 건주를 따라 굴러갔다.
연습을 꽤 한 건지 필드에서 내내 지적했던 잔동작이 사라졌다. 1번 동작과 2번 동작을 이을 때 보이던 망설임도, 생각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전투 동작이 습관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기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배웠네.
내심 이런저런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기우였나 보다.
저 정도면 썩 나쁘지 않아 속으로 칭찬하던 사윤은 한건주의 검이 몬스터의 급소에서 미끄러지는 걸 보고 벌떡 일어났다. 참을 수 없었다. 누구든 저 광경을 보면, 설령 시체라 하더라도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다.
“아이고, 예쁜아! 그걸 놓치면 어떡하냐!”
늘었다는 거 취소다. 아주 그냥 기본이 안 돼 있다.
“하체에 힘이 빠지니까 중간중간 동작이 미끄러지는 거 아니야! 너 밥 잘 먹은 거 어디다 썼냐? 똑바로 버텨!”
“얼씨구? 그렇게 천천히 가면 몬스터들이 잘도 목을 내주겠다. 억지로 베어 내면 스탯 차이로 밀어붙이는 거밖에 더 되니. 둔해질 때 더 빨리 움직여야 해, 인마!”
“방금 그건 팔꿈치로 찍었어야지! 굳이 칼로 공격하려 해서 박자를 손해 봐?”
“미친 혈압아. 아주 그냥 나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라.”
한번 훈수를 두고 나니 참았던 것이 전부 터져 나왔다. 소리치다 보니 재밌는 것 같기도 해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열심히 핀잔하고 있던 사윤의 눈에 어이없어하는 이한이 들어왔다. 사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꼬맹아! 넌 뭐 잘한다고 거기서 그러고 있냐? 그림자 스킬을 가졌으면 활용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활용을! 나였으면 방금 그림자로….”
불이 옮겨붙기라도 하는 것처럼 훈수가 옮겨붙자 기함한 이한이 듣기 싫다는 듯 몸을 움직여 전투를 속행했다. 내친김에 미정과 호철의 전투까지 봐 주던 사윤은 게이트 안에서 이러고 있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처치해야 할 망령 카운트가 천에 가까워졌을 때 전투에 합류했다. 사윤이 합류하고 나서 게이트가 클리어되기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몸을 움직여 줘야 한단 말이지.”
혼자서 남은 천 명 중 오백을 잡은 사윤이 어깨를 돌리며 말하자 이한이 혀를 찼다. 건방진 태도에 네가 더 많이 잡았는지 내가 더 많이 잡았는지 내기하자는 말을 하려던 사윤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입을 벌렸다.
“…스콜피언.”
“네?”
“스콜피언 망령들. 그놈들 잡아 놔야 하는….”
정산이 끝나지 않은 건지 아직 보상의 방으론 이동하지 않았다. 방으로 이동하며 게이트 리셋이 시작되기 전에 처리할 게 있어 홀린 듯 중얼거린 사윤이 몸을 돌렸다. 당장 스콜피언 망령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불쑥, 무언가가 눈앞에 내밀어졌다.
“여기요.”
한건주였다. 그가 스콜피언 망령들을 내놓아 눈을 크게 뜨고 있으니 담담한 목소리가 아까 붙잡아 놓으라 하지 않았냐고 되물었다. 죽기 직전 그런 말을 했던 사윤은 기특함에 한건주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곤 스콜피언 망령 중 가장 고위직으로 생긴 놈의 멱살을 붙잡았다. 소멸시키지 않은 한건주의 판단이 영특했다.
“눈 가려, 다들.”
망령과 눈을 마주치며 흘린 목소리가 싸늘했다. 귀환을 준비하던 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사윤의 험악한 눈빛을 받고 나서야 구시렁거리며 눈을 가렸다. 그 와중에 한건주만큼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기에 시선을 흘기자 잠시 사윤의 표정을 살피던 남자가 천 하나를 꺼내 눈을 가렸다. 모두의 시야가 차단된 걸 확인한 사윤은 숨을 들이켰다.
“됐다고 얘기하기 전까지 한 놈이라도 눈 떴다간 같이 죽는 거야.”
대놓고 협박하자 여기저기서 혀를 차는 소리가 돌아왔다. 못마땅해하는 것 같긴 해도 반항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 태도들에 경계를 거둔 사윤이 기절한 망령의 눈꺼풀을 다른 손으로 들어 올렸다. 강제로 눈이 마주친다. 그대로 숨을 참은 사윤이 스킬을 사용했다.
<전용 스킬, 영靈의 소리가 발동됩니다.>
알림창과 함께 망령의 몸에서 짙푸른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더니 이윽고 사윤을 감쌌다. 연기에 둘러싸인 사윤이 코로 연기를 흡입하고 눈을 감았다. 세이렌의 이어링을 해제하자 낯선 소리들이 귀에 잡히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서 재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그야 권사윤이….’
‘권사윤이 범죄 길드를 먹었으니까?’
‘…그래. 너도 잘 알고 있네. 놈이 권력을 다 잡은 마당에 고작 이 인원으로 뭘 하겠다고?’
‘어리석은 카일. 그러니까 네가 실패하는 거야.’
‘뭐 이 새끼야?’
‘이번에는 달라. 신께서 우릴 도와주실 테니까.’
끌끌거리는 불길한 웃음과 함께 푸른 연기에서 빛이 번쩍였다. 기운을 감지하며 눈을 뜬 사윤은 한 장면을 보았다. 얼굴에 스콜피언 문양을 가진 남자가 검붉은 색의 돌을 들어 보이며 악랄하게 웃고 있는 장면을.
차르르륵.
푸른 연기가 그 장면을 덮쳤다가 느릿하게 흩어졌다.
“음.”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을 삼킨 사윤이 입을 열었다.
“눈 떠.”
짧은 명령에 눈을 가렸던 이들이 천을 거둔다. 사윤은 그대로 가장 가까운 이에게로 다가갔다.
“한건주, 나 잡아.”
아니, 그건 기절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린 사윤이 건주의 쪽으로 쓰러졌다.
“형!”
놀란 남자가 저를 끌어안는 걸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