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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96)화 (196/266)

제196화. 죽은 자와 산 자 (3)

자수정 지팡이와 반쪽짜리 신념이 부딪치면서 튄 스파크가 어둠을 밝혔다. 수정구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몸을 구속한다. 떨치려면 떨칠 수 있는 힘이었지만 사윤은 그것에서 벗어나는 데 쓸데없는 시간과 힘을 낭비하는 대신 리치를 더욱 압박했다.

구속 따윈 없는 것처럼 더 강한 힘으로 검을 찍어 누르자 리치가 수정구를 흔든다. 수정구에서 강한 파장이 일었다.

“고개 숙여, 한건주!”

명령과 동시에 저 역시 몸을 수그리며 아슬아슬하게 광선을 피했다.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때를 노린 기운이 몸을 속박하기 시작했다. 광선에 반응하기라도 한 건지 이전보다 힘이 강해 막무가내로 무시할 수 없었다.

귀찮게 굴기는.

혀를 찬 사윤이 상체를 틀었다. 그대로 전신이 돌아간다. 발을 들어 올려 리치의 복부를 발로 찬 사윤은 반동을 이용해 멀어지며 리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서리 기운을 폭발시키며 만들어 낸 눈보라가 리치를 덮친다.

원거리 공격은 자기만 있는 줄 아나.

한 방 먹인 사윤이 웃음을 터트리며 추락하는 몸을 공중에서 한 바퀴 굴려 늪에 떨어지기 직전 다시 스킬을 가동했다. 품 안에서 한건주가 움찔거린다. 시선을 내리니 얼굴이 창백한 남자가 보였다.

“속 안 좋다고 토하지 마라, 예쁜아.”

구토라도 할 것 같은 희멀건 얼굴을 보고 재빨리 경고하자 한건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윤은 건방지다고 타박하는 대신 그를 꽉 껴안아 최대한 흔들림이 없도록 고정시키고 상승했다.

눈보라에서 벗어난 리치가 고개를 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귀가 안 들려 녀석이 악을 쓰고 있다는 것 정도만 짐작한 사윤이 몸을 굳혔다.

또 뭔가 온다.

일명 2페이즈라고 하던가.

분위기의 흐름이 바뀌면서 녀석의 패턴이 바뀌었음을 짐작한 사윤이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날아간 검기에 무언가 서걱, 잘려 나간다. 사윤이 그걸 눈치챘을 땐 리치의 지팡이에서 수십 개의 검은 줄기가 흘러나온 뒤였다.

꿈틀거린 그것이 적을 향해 달려든다. 검으로 막은 사윤이 숨을 참았다.

무슨 힘이.

무식할 정도로 압력이 강했다. 줄기 따위가 아닌 암석에 대고 검을 휘두른 느낌이었다. 징징, 손바닥 안이 울렸다. 힘으로 받아치는 게 좋은 선택지가 아니란 걸 깨달아 손목을 비틀어 검을 흘린 사윤은 방식을 바꾸었다.

정면으로 부딪치진 않는다.

어차피 사윤이 상대해야 할 건 척 보기에도 골치 아파 보이는 이 줄기가 아닌 리치 본체였다.

“야, 한건주.”

뒤로 물러난 사윤이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를 불렀다. 품에 안긴 이가 말하라는 듯 쳐다보길래 씨익 웃어 주었다.

“형 믿지?”

“…….”

정색하기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곤 이제 눈으로 경멸을 보내고 있다. 픽 웃으며 꽉 잡으라고 얘기했다. 한건주가 옷깃을 꽉 쥐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지금부턴 너 신경 안 쓰고 움직일 텐데 그걸로 되겠니. 목에 팔 둘러.”

난폭하게 움직일 계획이다. 가뜩이나 멀미를 느끼고 있는 한건주가 무사히 제 품에 있으려면 그가 알아서 거머리처럼 붙어 있어야 했다. 말귀를 알아들은 건지 주춤거리며 어깨를 웃돌던 손이 곧 목 뒤에 걸쳐졌다. 팔까지 완벽하게 제게 둘러졌음을 확인한 사윤은 망설이지 않고 발을 뻗었다.

수십 개의 줄기가 공격해 오는 것을 몸을 돌려 피한 사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줄기 사이사이의 틈. 그 경로가 시야에 들어온다. 어떻게 이동할지 계산을 끝낸 사윤이 공격해 오는 줄기 위를 딛고 순간 가속을 하듯 빠르게 내달렸다.

민첩하게 움직인 몸은 줄기 위를 그대로 내달리다가, 앞에서 달려들듯 이어지는 공격을 피해 위로 점프했다. 그다음 머리 위에 있는 줄기에 검을 있는 힘껏 박아 미끄러트리며 케이블카처럼 이용하자 흐름을 빼앗긴 걸 눈치챈 리치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검은 줄기에서 일순 뾰족한 게 치솟았다. 푸욱! 제 몸을 꿰뚫는 가시에 피를 토한 사윤이 검을 놓고 이번엔 가시를 밟고 뛰어올랐다. 몸을 수그렸다가 쭉 펴며 튕기듯 날아오른 도약에 리치와의 거리가 단숨에 가까워진다. 사윤은 분명 해골이라 표정이 없을 텐데도 경악한 것 같은 불길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왜? 내가 주춤거릴 거라 생각했나 봐?”

이래서 무리해서라도 세이렌의 이어링을 해제하지 않은 거다.

사윤의 몸은 고통에 무감한 편이었지만, 고통을 약하게 느끼는 것과 아예 무통으로 받아들이는 건 궤가 달랐다. 근육이 움찔거리는 그 찰나의 순간도, 망설임도, 고통에서 비롯되는 두려움도 느낄 수 없었기에 거침없이 전투할 수 있다.

광전사가 괜히 무섭겠나.

아무리 다쳐도 지치지 않고 변함없이 달려드는 그 질긴 투쟁심이 바로 광전사의 무서운 점이었고 사윤은 광전사 스킬이 없어도 그 움직임을 따라 할 수 있었다. 이어링의 보조만 있으면 말이다.

그리고 광전사 비슷한 스킬은 이미 하나 갖고 있었다.

<일정량 이상의 피를 흘렸습니다. 광분화가 활성화됩니다.>

방어력을 극도로 낮추고 민첩함과 공격력을 최대치로 올려 주는 스킬이다.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알림창을 확인한 사윤이 광기에 가까운 웃음을 그리며 가시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사윤의 몸이 리치의 머리 위를 차지했다. 그림자가 짙게 지기 시작하자 리치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거리가 짧다.

피할 수 없을 만큼 짧은 거리에 급한 대로 건주를 잡아 일행 쪽으로 내던진 사윤이 비어 버린 손까지 합세해 양손으로 검을 쥐고 리치를 향해 하강했다. 그와 동시에 자수정에서 쏘아진 섬광이 사윤의 복부를 꿰뚫었다. 검은 광선이 몸을 관통했으나 머리가 잘려도 몇 초간은 신경이 살아 있는 게 생물이다. 몸이 관통당했다고 행동이 멈추지 않은 사윤은 경악한 듯한 리치의 머리 위로 그대로 반쪽짜리 신념을 박아 넣었다.

콰지직.

해골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분명히 귀가 들리지 않는데도, 손맛으로 전해진 그 감각이 청각으로 이어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웃은 사윤이 머리에 띄우고 있던 봄의 여명을 쥐었다. 그러곤 이미 박아 넣은 단검 위로 봄의 여명을 내리꽂았다.

빠가가각!

전보다 더 거친 손맛이 느껴졌다. 반쪽짜리 신념이 손잡이까지 들어간 걸 확인한 사윤은 불길이 깜빡깜빡거리는 리치의 눈을 마주 보고 웃었다.

“안 끝났어, 새끼야.”

확인 사살은 필수다.

제 애새끼에게 가르쳤던 그걸 손수 시범 보이기 위해 인벤토리를 연 사윤이 헤리스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뺏은 물건이 쓰기도 좋다고 역시 마지막은 이걸로 해 줘야 기분이 산다. 마지막 발악으로 리치가 휘두르는 수정구를 기꺼이 맞아 준 사윤이 단도를 치켜들었다.

콰지직!

반쪽짜리 신념 옆에 깊이 박아 넣고.

“헤리스의 참회.”

신성한 기도문도 한 번 읊어 준다. 이윽고 참회를 향한 신의 자비가 내려지듯 성스러운 빛이 퍼졌다.

눈앞이 번쩍이며 폭발이 일었다. 그 여파로 날아간 사윤은 피를 토했다. 리치가 마지막으로 휘두른 자수정이 뿜은 광선이 정확히 심장 부근을 관통한 탓이었다.

서로 사이좋게 한 방씩 주고받았다.

“그래도.”

하늘을 본 채 떨어지던 사윤이 리치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는 꼴을 응시했다. 헤리스의 단도가 뿜어낸 빛에 먼지 같은 뼛가루가 비쳐 보이는 광경은 꽤 절경이었다.

“내가 이겼지.”

픽 웃으며 그리 중얼거린 사윤이 아래로 추락했다. 흐려지는 시야에 리치를 처치했다는 알림창이 떴다. 함께 뜬 클리어 조건 창을 확인해 보니 이제 망령 삼천 마리쯤 더 잡으면 게이트는 클리어되었다.

삼천 마리면 금방 끝나겠네.

늪 괴물도 죽었고 리치도 죽었다. 곧 사라졌던 감각이 되돌아올 거였으니 노아 멤버들의 능력이라면 클리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저 역시 금방 되살아날 거기도 했고.

아델리아의 무덤.

그 악명 높은 미지 게이트 중 하나가 클리어되는 순간이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삼킨 사윤은 중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떨어지다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기 직전 단단한 팔이 저를 안는 게 느껴졌다.

“…형!”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든 사윤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야, 그 새끼…. 스콜피언 영혼 새끼들은 어떻게든 잡아 놔라. 나 게이트 리셋되기 전에 일어날 거니까….”

시스템이 준 특전 덕분에 죽으면 금방 부활할 수 있어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신신당부한 사윤이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한건주는 영리한 놈이었으니 제 말을 알아들었을 거라고. 그리 생각하며 닥쳐오는 안식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차가운 것이 얼굴에 닿았다. 안식이 멀어진다.

음?

스멀스멀 다가오던 죽음의 기운이 마치 꽁무니를 빼듯 멀어졌기에 이상함을 깨달은 사윤이 인상을 찌푸렸다가 눈을 떴다. 김이 서린 듯 흐린 시야에 입술을 꽉 짓뭉갠 남자가 자신의 얼굴과 심장에 대고 포션을 마구 부어 대고 있는 게 보였다. 얼핏 보니 최고급 포션이다.

야, 그게 얼마인데.

사윤은 죽었다 살아나면 돈 안 쓰고 회복될 걸, 전투 중도 아닌데 값비싼 포션을 써 대고 회복시키고 있는 이에 기겁했다. 입을 달싹이며 한마디 해 주려고 할 때였다.

“내 포션이에요.”

리치와 늪 괴물이 죽어, 사라진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한 건지 오랜만에 사람 목소리가 청각에 잡혔다. 제가 듣고 있다는 걸 아는 건지 남자가 말을 이었다.

“길드장님 포션이 아니라 제 거요.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어떻게 쓰든지 제 마음이에요.”

어딘지 화가 난 목소리였다.

화났나?

왜?

그러고 보니 나름 같이 싸운 거긴 했는데 그의 몫을 너무 안 남긴 건가 싶었다. 리치를 직접 처치하게 해 최고 기여도를 넘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성급했다고 판단한 사윤이 입을 열었다. 아직 상태 회복이 덜 된 건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길드장님.”

“…….”

“형.”

들리긴 들리는데 대답을 할 수 없어 답답하다. 몸이 꿈틀거리며 관통된 부위를 재생시키는 걸 느낀 사윤은 눈만 간신히 떠 한건주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까보단 시야가 명료했다.

눈짓만으로 표현이 될까 싶었을 때 홱, 고개를 돌린 이가 제 쪽은 보지도 않고 새로운 포션을 땄다.

콸콸.

포션 한 병을 복부에 쏟아부은 한건주가 중얼거렸다.

“내 앞에서 죽지 마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사윤은 목소리가 나올 만큼 몸이 회복되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해 줄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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