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죽은 자와 산 자 (2)
한건주의 인벤토리에 있는 포션은 수십 병이 넘는다. 그걸 전부 복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야말로 무한 동력이나 다름없어 폭주하던 사윤은 조금씩 리치를 압도하며 밀어붙이다가 불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한데?”
묘하게 마나양이 풍족해진 느낌이다. 포션을 복용해서가 아니라, 마나 총량 자체가.
서리 기운을 한계치까지 발휘하고 있는 것치고 몸 상태도 꽤 멀쩡했다.
흐음?
단순히 이어링 효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해 그렇게 인식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호흡이나 신경이 툭툭 끊어지는 것 같은 무리했을 때의 느낌이 없었다. 의문을 품은 사윤이 생각에 집중한다고 미간을 좁히자 자연스럽게 건주를 안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추락의 위기에 놓인 이가 화들짝 놀라 사윤의 어깨를 붙든다. 그 접촉을 인지한 사윤이 눈을 크게 떴다.
“아.”
잊고 있었다.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의 등급 성장.
‘페어링을 나눠 낀 상대와 마나 및 체력의 총량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단 접촉 시에만 공유 가능합니다.’
페어링이 A+ 등급으로 오르면서 추가로 개방된 효과다. 강제 집행 퀘스트창이 뜬 줄 알고 혼란에 빠졌던 기억을 더듬어 그 문구를 곱씹은 사윤이 눈을 길게 찢었다.
너랑 있는 것만으로도 그런 효과를 받을 수 있단 얘기지.
뱀 같은 시선이 건주를 훑었다.
한건주랑 있을 때의 자신은 얼마나 올라갈 수 있는가?
일단 그와 일정 거리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면 전투 능력이 30퍼센트 상승된다. 그 거리가 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여야 하는 게 유감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히 체감되었다. 늪 괴물과 혼자 싸울 때와 지금의 능력치가 완전히 다르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누가 보면 랭크를 한 등급 뛰어오른 줄 알 거였다.
그건 이쪽을 보고 있는 세 각성자들의 표정이 증명했다. 어느덧 빈사 상태에서 회복해 비틀거리고 있는 호철과 그를 지키고 있는 이한, 의아한 표정을 지은 미정이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치의 힘에 반응한 망령 수백이 늪에서 기어 올라왔기에 그 시선들은 강제로 거둬지게 됐지만 알 수 있었다.
전투 중인 그들이 시시각각 이쪽을 힐끔거리며 경악하고 있다는 걸.
궁금할 거다.
대체 못 본 사이에 뭘 했길래 이만큼의 성장을 보이는지. 머리를 열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노아 멤버들의 생각을 읽은 사윤이 입술을 찢었다.
우스운 일이다. 특별히 뭘 한 것도 아니고, 애 하나 키운 것뿐인데 말이다.
이래서 잘 키운 애새끼 열 아들 안 부럽다고 하는 모양인가 보다.
비록 키울 때 속 좀 썩이긴 했지만. 원래 자식은 다 이렇게 키우는 거지 않나.
안은 손에 힘을 주어 허리를 한 번 토닥여 주자 한건주가 움찔거렸다. 사윤은 흡족한 눈웃음을 지었다.
거기에 전투 능력만 향상되는 게 아니지.
페어링 효과로 민첩함과 마나 회복 속도도 10퍼센트 올라간다. 물론 이건 함께 있다고 적용되는 효과가 아니었지만 한건주가 가져다준 효과이긴 했다. 그날 보상 상자를 열어 페어링을 얻어 낸 건 한건주였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기특한데 페어링까지 성장시켜 이젠 붙어 있을 때 마나와 체력 총량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완전히 걸어 다니는 제 전용 버프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최고급 수준의.
그 어떤 아이템과 스킬이 전투 능력을 30퍼센트나 끌어올려 주고 체력과 마나 총량도 두 배 가깝게 늘려 주겠는가.
새삼스럽게 건주와 함께 있을 때의 효과를 인지한 사윤의 웃음이 짙어졌다. 제 얼굴에 닿는 집요한 시선을 눈치챈 건지 한건주가 고개를 들었다. 감긴 눈꺼풀을 더듬듯 응시한 사윤이 픽 웃었다.
“너 어떡할래.”
이건 곧 죽어도 곁에 둬야 한다.
걸어 다니는 회복 포션, 버프 아이템을 놓칠 이유가 없어 넌 평생 내 곁에 있게 생겼다고 중얼거리자 포션을 먹이던 손이 멈췄다. 싫어하는 건가? 그래도 알 바 아니다. 언제부터 그에게 선택권이 있었다고.
아니, 싫어하는 게 맞나?
궁금증이 생겨 표정을 확인했다. 조금 전 자기를 곁에 두라고 말했던 한건주의 생각이 궁금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건지, 왜 그런 표정을 지은 건지.
물어볼 게 많았기에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나서 심문하기로 한 사윤이 검을 휘둘렀다. 한건주가 재차 포션을 먹이기 시작했다.
사실 안 먹여도 되긴 하지만.
자신에게 먹이는 게 아닌, 그가 직접 포션을 복용해 회복된 마나를 공유해 주는 것이 더 편했다. 그러나 전투 중 흔들리는 움직임을 견뎌 내며 열심히 팔을 뻗는 모습이 꽤 볼 만했기에 제가 깨달은 것을 언질하지 않은 사윤이 입으로 넘어오는 포션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고 흑안이 완전한 푸른빛으로 변한다.
서리의 기운을 이렇게 장시간, 최대 출력으로 사용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앓는 소리를 내는 게 다 들린다. 무시하고 검을 휘두른 사윤은 마침내 제 푸른 기운이 검은 기운을 둘러싸 압축하고 집어삼켜 소멸시키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리치가 당황한다. 적의 당황은 기회였기에 사윤은 틈을 놓치지 않고 힘껏 칼을 휘둘렀다.
사특한 기운을 꿰뚫은 섬광이 늪에 닿아 번쩍인다. 눈이 아릴 정도의 푸른빛이 번져 나갔다가 땅이 얼기 시작했다.
“하!”
사윤은 경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크게 터트리며 아래의 풍경을 응시했다. 늪이 다시 얼기 시작한다. 서리 지대가 형성되며 다시 영역 선포가 가능해졌다는 알림창이 떴다.
이긴 것이다.
이 늪의 주인에게서, 공간의 지배권을 앗아 왔다.
지배자에게 그것만 한 굴욕이 없었기에 만족한 사윤이 공중에서, 검은 손 위에서, 사체 위에서 용을 써 가며 전투하고 있는 헌터들을 불렀다.
“위로 올라와!”
다신 부서지지 않을 만큼 두껍고 단단하게 형성된 서리 지대로 고갯짓하자 반색한 이들이 얼음 바닥을 디뎠다. 사윤은 영역 싸움에서 밀려난 개를 바라보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해골이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피어난 검은 불길이 강해진다. 문득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어둡고 습했던 늪이 한층 더 칠흑에 가깝게 변화한다. 습도가 높아지며 피부에 닿는 공기가 불쾌할 지경이라 인상을 찌푸린 사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번쩍!
검은 벼락이 내리쳤다.
“시발.”
하필이면 제가 하늘을 올려다본 타이밍과 동시였기에 부지불식간 건주를 감싸 안은 사윤이 자리에서 몸을 내뺐다. 단숨에 1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해 뒤로 빠지자 벼락이 얼음 바닥을 찍었다.
웅웅.
무언가로부터 심장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진동하듯 뛰는 맥박을 느낀 사윤이 고개를 돌려 리치의 자수정 지팡이를 보았다. 자수정이 검게 물들었다. 그 위로 해골 문양이 떠오르자 판도가 뒤바뀌었다.
“……!”
아래가 소란스러워진 게 느껴졌다. 시선을 내린 곳에는 늪 괴물이 불러냈던 데스 나이트보다 더 강한 놈들. 목이 잘린 기사, 듀라한이 즐비했다. 미정과 이한, 호철이 드물게 등을 맞대며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적들을 경계했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애피타이저라도 되나 보다.
이제야 본식사라는 듯 리치가 웃어 보였다. 처음 본 모습보다 두 배 정도 사악해 보이는 웃음에 사윤이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사악하게 웃는 건 이쪽도 자신 있었기에.
쓸모없는 대결을 하고 있자 한건주가 꿈틀거렸다. 사윤은 잠시 제 인간 버프템을 아래로 내려 둘지, 계속 안고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를 안고 있으면 전투 능력이 오르긴 한다. 하지만 그게 다른 놈도 아닌 리치와의 본격적인 전투에서 한 팔을 쓰지 못하는 리스크를 상쇄할 만큼의 이점인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거기에 만약 전투 중 한건주가 다칠 경우 자신이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지도 생각해야 했다.
은근히 양날의 검이다.
차라리 늪 괴물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한건주를 놓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가 없이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상대였으니까. 그러나 눈앞의 리치는 달랐기에 목을 울리며 고민하자 어깨에서 찝찝한 감각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제 목을 문 한건주가 보였다.
“물었냐?”
이 새끼가?
누구는 지를 어떻게 보호할지 고민한다고 대가리를 굴리고 있는데 이를 드러내?
황당함을 표하니 한건주의 시선이 흘러갔다. 할 말이 있어 보여 따라 눈동자를 굴린 사윤은 건주의 손을 확인했다. 가늘고 하얀 손이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불렀는데 답이 없어서 물었냐?”
이유를 알고 나니 더 기가 찼다. 고작 그런 이유로 개새끼처럼 물어 대나 싶어 할 말을 잃자 한건주가 눈을 똑바로 뜨고 입을 열었다.
곁에 둬요.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이었다.
“…….”
네 음절밖에 안 됐고 천천히 말해 줬기에 분명히 알아들은 사윤이 눈을 깜빡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같은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 깃털로 심장을 공격하는 듯했다.
초점이 묘하게 엇나간 눈을 마주 보며 고민하던 사윤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그래.
적이 어떤 놈인데 쓸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해 봐야지.
게다가 한건주는 지금 살아 있는 마나 자동 회복기였다. 그와 있으면 마나양 배분으로 머리 쓰며 전투하지 않아도 됐기에 결정한 사윤이 그를 꽉 안고 봄의 여명을 던져 허공에 띄웠다.
한 손을 못 쓰게 됐으니 검이라도 더 늘려야지.
전투태세로 돌입한 사윤이 리치와 눈을 마주쳤다. 대치 상태가 길어진다. 움직이기 전의 수 싸움이 버거울 정도로 이어져 미간을 좁힌 사윤이 곧 일이 터질 거란 걸 직감하고 경고했다.
“잘 붙어 있어라, 예쁜아. 너 떨어져도 다시 주우러 갈 시간 없어. 못 할 것 같으면 지금 말해.”
리치를 응시하면서 그를 툭 치자 항의하듯 어깨를 때리는 손길이 돌아왔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와 사윤은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대로 해라.”
리치를 상대로 하는 전투에서 저토록 강경하게 곁에 있겠다 하는 게 어리석다.
그가 자신처럼 부활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누굴 닮은 건지 무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 사윤은 마침내 손을 움직이는 리치에 반응하며 허공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