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죽은 자와 산 자 (1)
“…나올 때가 됐긴 했지.”
게이트에 발을 들인 순간 떴던 클리어 조건 창.
‘1만 마리의 망령 처치’
‘망령의 늪의 지배자 처치’
그 두 가지를 머릿속에 아로새기고 있어 당황하지 않은 사윤이 리치를 보며 감탄했다.
“설마 게이트 보스가 리치일 줄 누가 알았겠어.”
리치.
10년 전 한 게이트에서 처음 출몰했으며 수백의 헌터가 목숨을 잃었다. 그때 당시 리치의 이름은 미숙한 리치였다. 그런 놈이 나왔던 던전도 A급 최상위 평가를 받았는데 눈앞의 리치에게선 어리숙함도, 불완전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게 리치의 완성형이다.
본능적으로 직감한 사윤은 리치와 관련된 정보를 머릿속에서 취합했다. 과거의 헌터들이 지금처럼 수준 높지 않다는 걸 고려해도 몬스터 하나가 수백의 헌터를 죽이는 건 쉽지 않다. 그런 놈의 완성형이다. 눈앞의 리치는 어중이떠중이 수천을 살해할 수도 있을 거다.
의식하지 않아도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합의 축제에서 게이트가 열렸을 때 겪은 기분과 비슷했다.
다 죽은 이유가 있었네.
아델리아도, 다른 헌터들도.
수년간 클리어되지 않은 아델리아의 무덤의 진상이 이제야 드러났다.
토해 내려던 숨을 고스란히 삼킨 사윤이 입가에 여유로운 호선을 그렸다. 긴장이 몸을 집어삼키면 패착이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니 벌써 지레 경계할 필요는 없다.
아니, 기실 대볼 필요가 있긴 한가.
“내가 이길 텐데.”
리치는 불사자지만 이쪽은 불멸자였다. 시스템에게 선물도 받은 덕에 여차하면 딜레이 없이 자살 전투도 가능한 게 자신이다. 상대하던 적이 뭐 이런 괴물이 다 있냐며 도망쳐도 할 말이 없을 전투를 보여 줄 자신이 있었다.
괴물이 따로 있겠나. 이런 게 괴물이지.
자조적인 웃음 위에 조소를 띠어 숨긴 사윤이 눈꼬리를 휘었다.
“행차하신 기분이 어때?”
건주를 붙든 채로 이죽거리자 놈의 안광이 강해진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상대의 실력을 견주어 본 사윤이 불현듯 시야에 들어온 칙칙한 늪에 낮은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하얀 손이 인벤토리에서 포션 보따리를 꺼냈다. 그걸 이한에게 내던지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새로 등장한 적을 경계하고 있던 이한이 황당해하며 물건을 받았다.
“최상급 포션 열 개 들어 있다.”
“뭐?”
“치료해.”
사윤이 늪을 향해 눈짓했다.
S급 헌터는 목이 뚫려도 즉사하지 않는다. 골든 타임만 맞추면 심장이 꿰뚫려도 최상급 포션 몇 개로 회복할 수 있었기에 늪에 빠진 호철 쪽으로 눈길을 두자 상명하복의 관계가 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짓을 보낸 이한이 늪으로 내려갔다. 사윤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자신이 아니꼬워도 뭐 어쩌겠는가.
이한의 성격상 살 사람은 살려야 만족할 텐데.
망령들의 사체를 밟고 데스 나이트들의 갑옷을 밟으며 걸어가 늪으로 손을 쑥 집어넣은 이한이 호철을 붙잡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최상급 포션이 호철의 목을 깨끗하게 씻긴다. 환부에 용액이 흘러들어 가자 호철의 몸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씻기는 데 한 병, 살리는 데 두 병. 10초마다 100밀리리터는 흘리고 있고.
초 단위로 10억씩 사라지는 꼴을 지켜보던 사윤이 무심히 덧붙였다.
“포션 비용은 따로 청구할 거니까 준비해 둬라, 호철아.”
누구 좋으라고 저 비싼 포션을 무료로 제공하겠는가.
놀랍도록 덤덤하고 냉정한 말에 이한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품 안의 한건주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의 성격상 제 행동에 대고 무어라 비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령 ‘꼭 그렇게 말해야 해요?’, ‘그런 얘기를 지금 해야 해요?’ 같은 말을 하면서.
이 정도 핀잔쯤은 이제 귀가 안 들려도 예상이 가 큭큭거리자 한건주의 손이 제 어깨를 꾹 눌렀다. 웃지 말라는 뜻이다.
“놀릴 건 다 놀렸고.”
목을 한 번 돌린 사윤이 상처를 회복하고 있는 호철을 확인했다. 구멍 뚫린 부위에서 새로운 살이 돋아나 꿀렁꿀렁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살 사람도 살―.”
저 새끼가.
눈을 부릅뜬 사윤이 몸을 젖혀 날아온 광선을 피했다. 광선의 끝이 검은 머리카락을 갉아 먹고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쉴 시간은 없었다. 곧바로 허공답보에 축지법을 조합한 사윤이 미정에게 날아가 그의 팔을 옆으로 끌어당겼다. 앞이 안 보여 감각을 최대한 키우고 있던 여인이 화들짝 놀라는 사이 검은 광선이 허공을 갈랐다.
“이한!”
차례로 쏘아진 세 개의 광선의 마지막 목적지는 호철을 치료하고 있는 이한이었기에 외치자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 호철을 챙긴 이한이 늪으로 뛰어들었다. 광선이 늪 위를 베었다. 사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멍청이가 어떻게 돌아오려고.
늪에 빠질 경우 웬만하면 자력으로 돌아오기 힘들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섣부른 판단이었다며 혀를 차려는데 무언가 사윤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늪 위에 이한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설마.
시선을 떼지 않고 지켜보자 일렁거리던 그림자가 고무줄처럼 늘어나더니 늪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곧이어 검은 그림자에 의해 구해진 이한이 몸을 닦으며 포션으로 세수를 했다. 저게 얼마짜리인데 호철이 돈 낸다고 막 쓰고 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똑똑한 새끼.
충동적으로 뛰어든 줄 알았는데 일이 이리되리라는 걸 미리 계산해 두고 그림자를 조종해 둔 안배가 탁월했다. 하여간 이과라며 휘파람을 분 사윤이 이한을 향한 평가를 고치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휘파람 소리가 거슬렸던 건지 공중에 떠 있던 리치가 사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 놈의 위치를 확인한 사윤이 미정에게 언질했다. 여인이 부채를 휘둘러 검은 손을 만들어 낸다. 그쪽으로 미정을 옮긴 사윤이 제 실력을 가늠해 보듯 가만히 있는 놈을 보며 건주를 꽉 쥐었다.
“이야, 한건주. 쟤 보고 배워라.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기습하는 솜씨가 네 롤 모델이야, 아주.”
악당도 변신할 시간은 주는데 그런 시간도 기다리지 않고 달려들고 기습하는 꼴이 한건주나 리치나 판박이였다. 낄낄거리며 놀려 대자 품 안의 뒤척거림이 심해졌다.
“어허.”
그러다 떨어지면 즉사라고 얘기하니 움직임이 좀 얌전해진다.
아까는 죽어도 안 떨어질 것처럼 굴더니 몇 번 놀렸다고 떨어지려고 하고. 사내자식이 끈기가 없다.
혀를 쯧쯧 차고 있으니 리치의 기운이 강해졌다. 고개를 들자 녀석의 눈 안에서 피어오르는 자색의 불길이 검게 변하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까진 전력이 아니었다는 듯 기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오싹.
무척 오랜만에 느끼는 공포가 전율처럼 감각을 훑고 지나갔다.
사윤은 혹여라도 건주를 놓칠까 싶어 꽉 잡은 채 반쪽짜리 신념을 돌렸다.
몸이 저릿하다. 리치가 뿜어내는 지독한 살의가 예민한 피부를 찌르는 게 느껴졌다.
이 얼마나 순수한 악의인가.
더럽지도, 타락하지도, 죽음 외엔 그 무엇과도 연루되어 있지 않은 살의다. 순수하게 상대를 죽이고 싶어 하는 감정이다. 고밀도의 농도 짙은 살의에 사윤은 희열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안정적이다. 죽은 자라서 그런지 확실히 두려움이나 불안 따위의 인간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지금까지의 적과 리치의 차이를 알게 해 줘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너는 날 죽일 수 있을까.”
망령의 늪.
수많은 헌터들의 무덤과 영웅과 영원의 무덤.
수년간 수만의 사람을 집어삼킨 곳이다.
만약 제게 무덤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이곳이 딱일 거라 생각한 사윤은 검을 휘둘렀다. 대기 중으로 흩어져 있던 서리의 기운이 검날에 모여든다.
“한번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고.”
아까는 졌지만 지금은 또 모르지. 이번엔 두 배로 갈 거거든.
낮게 읊조린 사윤이 기운을 개방하자 시린 기운을 머금은 검날에 성에가 끼었다. 그대로 서리 지대를 재형성시키기 위해 늪 바닥에 대고 휘두르자 타이밍을 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리치의 지팡이가 공중에서 곡선을 그렸다. 직후 하강하는 서리 기운의 뒤를 사특한 기운이 바짝 쫓아갔다.
놈도 아는 거다. 서리 지대가 다시 깔리는 순간부터 판도가 기울 수 있다는 걸.
두 기운이 충돌한다. 검은 기운이 검날에 닿을 때마다 서리의 기운이 빠르게 흩어지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과연 지배자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힘이다. 허락하지 않은 것들을 모조리 분해하는 힘에 이를 드러낸 사윤이 한쪽 남은 이어링을 꽉 쥐었다. 반쪽이지만 세이렌의 이어링은 아직 제 효과를 미미하게 발휘하고 있다.
피해량 증가.
그리고 마나 회복 속도 상승.
지금 순간에서 가장 필요한 그 두 가지였기에 사윤은 이어링을 꽉 눌렀다. 이어링과 친화적인 상성을 자랑하는 서리 기운을 강제로 주입함으로써 반쪽만 남아 위력이 약해졌던 아티팩트의 효과를 끌어올렸다. 당연한 순리로 노랫소리가 강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건주. 내가 정신 놓으면 네가 한 대 때려라. 한 번쯤은 기회 줄 테니까.”
이번에는 안정제 하나가 제 품에 있었으니 말이다.
허리를 꽉 쥐면서 읊조린 말에 제게 한 말인 걸 알았는지 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만족한 사윤이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검은 기운에 먹혀 가던 푸른 기운이 강해진다. 더불어 컨트롤 역시 세심해졌다.
갑자기 상대의 기운이 강해지자 리치가 당황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수정 지팡이를 휘둘렀다. 사윤은 그에 맞춰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피해!”
아래쪽에 있는 호철과 이한, 미정을 두고 한 말이었다.
다시 한번 두 기운이 맹렬하게 격돌한다. 자수정이 자꾸만 보태는 검은 기운이 만만치 않았지만 화력은 이쪽도 자신 있었다.
“한건주. 있는 포션 다 꺼내서 주기적으로 몸에 부어.”
마시는 게 제일 효과가 좋겠지만 기운을 세밀하게 컨트롤하며 포션까지 따 마실 여유는 없었다.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한건주가 포션을 돌려 땄다.
그러곤.
쿡.
뭉툭한 무언가가 입술을 꾹 눌렀다. 눈동자만 살짝 굴리니 포션병이었다.
“얼씨구?”
몸에 붓는 건 낭비가 크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뭐 지가 먹여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나. 입을 벌리자, 마나 회복 포션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사윤은 바닥났던 마나가 다시 채워지는 걸 느끼며 눈을 희번덕댔다. 때마침 리치가 뭐 이런 놈이 있냐는 듯 저를 돌아봤기에 상쾌하게 웃어 주었다.
미친놈 상대하는 건 처음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