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망령의 늪 (10)
푸른 창에 박힌 글씨는 이윽고 음성으로 변환되어 건주의 청력을 시험했다.
뭐가 활성화돼?
놀란 남자가 시력을 잃었다는 것도 잊고 눈을 끔뻑인다. 사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의 품에서 끙, 하는 신음과 함께 머리를 들었다.
“시발 더럽게도 멀리 날아왔네. 공격이 좀 셌나?”
장장 100미터가 넘는 거리를 고속으로 날아왔으면서 태평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고개를 쭉 뻗어 괴물의 상태부터 파악한 사윤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된 늪 괴물을 확인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처치 완료다. 길었던 전투가 일단락 났기에 승자의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목 뒤로 숨결이 느껴졌다.
“……!”
그제야 자신이 남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달은 사윤이 고개를 돌렸다.
“…한건주?”
얘가 왜 여기 있어?
익숙한 상황이었다. 하루 사이 두 번이나 비슷한 말을 들은 건주는 아직도 귀에 울려 퍼지고 있는 시스템 알림음과 사윤의 목소리를 분리해 들으려 애를 쓰며 미간을 좁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 있다.
새롭게 활성화됐다는 ‘조력자’ 성향.
그건 사윤과 관련이 있을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뜬금없는 타이밍에 새로운 성향이 뜰 리가 없었으니.
물론 우연일 수도 있었다.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고, 세상의 많은 것은 생각보다 우연적으로 돌아가니까.
하지만 내가 당신을 생각한 타이밍에 하필이면 이런 성향이 뜬 걸 단순한 우연이라 치부하는 게 가능할까.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필연이고 인연이라 생각하는 게 더 와 닿았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떨림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 건주가 사윤을 꽉 붙들었다. 힘을 빼면 품 안의 존재가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압력의 차이를 느낀 사윤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한건주. 네가 왜 여기 있냐니까?”
제가 미정에게 던져 주었던 이가 왜 또 사체 위를 나뒹굴고 있나 싶어 추궁한 사윤이 몬스터 사체를 딛고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일어나려고 했다.
바닥에서 상체만 일으켜 세운 누군가가 제 몸을 꽉 붙들고 있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일어나려고 했던 몸이 한 번 앞으로 휘청거렸다.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데 넘어지지 말라고 고집 피우듯 저를 끌어안는 팔의 힘이 강해졌다.
“어쭈?”
함께 뒹굴었던 이가 여전히 제 허리를 놓지 않고 있었기에 푸른빛이 죽지 않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안 놓고 뭐 하니.”
“…….”
“한건주?”
“…….”
“…건주야?”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백치처럼 멍한 건주의 표정을 눈에 담은 사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곤 미심쩍은 손길로 한쪽 남은 이어링을 매만졌다. 세이렌의 이어링을 끼고 있는 건 자신인데 왜 한건주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저런 건 세이렌에게 홀린 사람들이나 짓는 표정이거늘.
설마 무언가로부터 정신 공격이라도 당한 건가?
자신이 늪 괴물과 전투하는 사이 일이 생겼나 해 미정을 바라봤다. 나름의 보호자라고 여기고 애를 맡겼는데 돌아온 결과가 이따위인 게 어이없어 사나운 시선을 던지자 기가 찬다는 듯 부채를 흔든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한건주가 이상해진 데에 자기 책임은 없다는 뜻이었다.
미정이 아니라면 이한 짓인가.
고개가 돌아갔다. 이한은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결백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꽈악.
“…….”
사윤은 호철 쪽으로 돌아가던 시선을 멈추었다. 허리를 붙잡는 힘이 전보다 더 강해졌다. 이쯤 되면 한건주의 목적이 자신을 질식시키려는 건가 의심해 봐야 하는 수준이었다.
진짜 왜 이래?
마치 부모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용을 쓰는 새끼 동물 같은 모습이다. 붙잡으라 붙잡으라 말해도 꺼림칙하단 얼굴로 느슨하게 자신을 껴안던 필드에서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스킨십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한건주와 시간을 보내면서 겪어 본 접촉이라곤 품에 안고 다니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것도 주로 자신이 이동을 위해서 그를 안는 것으로 말이다. 그랬던 이가 갑자기 나무늘보 빙의한 듯 달라붙어 오는 게 이상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그의 뺨을 붙잡아 습관적으로 시선을 맞춘 사윤은 눈을 감고 있는 이에 그가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혀를 찼다.
“너 무슨 일 있었어.”
경위를 따져 물으니 남자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 되었으면서 구태여 눈을 뜨는 그 심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었냐니까.”
다시 한번 캐묻자 드디어 붉은 입술이 열린다. 사윤은 처음으로 한건주의 입 모양에 집중했다. 들리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
그러나 입 모양을 읽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뭐 이리 빨라?
한건주가 저를 배려해 천천히 발음할 위인이 아니었기에, 정상 속도의 발음을 알아들으려니 힘들었다.
“뭐라는 거야. 알아듣게 얘기해.”
눈살을 구기고 그의 양 볼을 압박하자 이윽고 남자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허리를 더 강하게 안고 가슴팍에 머리를 툭 가져다 댔다.
“이 자식이 미쳤나.”
아무래도 약 같은 걸 잘못 먹은 게 분명했다.
사윤은 고개를 홱홱 돌려 사위를 살폈다. 무엇이 한건주를 이상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내야 했다.
망령들의 사체 때문인가? 아니면, 눈이 오랜 시간 안 보여 정신 이상이라도 왔나? 시발. 이 새끼는 유리 멘탈이라 그럴 만도 한데. 아니, 그러게 왜 지키라고 했던 애를 아래로 떨어트려서.
미정 누나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매정했다.
애꿎은 미정의 평가가 사윤의 안에서 잔뜩 절하되었다. 여태껏 수많은 게이트를 클리어했고 수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게이트 안에서 이런 꼴로 있어 본 적은 또 처음이었다. 미정과 호철, 이한이 대놓고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신기해하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홱 돌려 뭘 보냐는 듯 눈을 부라려 준 사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11년씩이나 헌터 생활을 해 왔는데 또 새로운 게 있다니. 상황이 뭣 같지만 않았어도 조금은 더 신기해했으리라.
“한건주.”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몰라 고민하던 사윤은 결국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거머리 한 놈이 붙어 있었기에 평소보다 다리에 힘을 두 배로 줘야 했다.
사윤이 일어나는 대로 쭈욱 딸려 온 한건주는 이제 선 채로 사윤에게 붙어 있었다. 자기 덩치 생각 안 하고 매달려 있는 게 기가 막혔다.
“너 나가서 보자.”
뭐 때문에 제 애새끼가 진짜 애새끼로 변했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어 살벌하게 경고하니 가슴팍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우냐?”
괜히 신경 쓰여 얼굴을 확인한 사윤은 남자의 표정을 마주하고 말없이 굳었다. 한건주는 웃고 있었다. 기뻐서 웃는 건지, 그저 그런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 아리송한 얼굴로. 이윽고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이번에는 느릿했고, 분명한 발음이었다.
‘날 곁에 둬요.’
한 글자씩 천천히 발음하는 남자의 입 모양을 따라 해 본 사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불안하기라도 했나.
눈이 안 보이는 그를 두고 장기간 자리를 비워서 이러나 싶었다. 한건주의 멘탈이라면 충분히 그 정도 시간으로도 불안해할 만했기에 나름대로 상황 파악을 마친 사윤이 혀를 차며 남자를 붙잡아 제대로 안았다.
“내가 이 나이에 포대기 싸 들고 다녀야겠니, 예쁜아.”
지가 무슨 영유아 애새끼도 아니고. 조금 떨어트려 놨다고 어리광을 부린다.
무슨 심경상의 변화라도 있었나.
제가 아는 한건주의 성격이라면 혼자 불안해했으면 불안해했지 그걸 이렇게 대놓고 티 내며 아양을 부릴 이는 아니었다. 문득 1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설마 이번에도 수작질로 떠보는 건가 싶어 그의 얼굴을 살피는데 한건주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무언가를 또 막 말하고 있었다. 열변하고 있는 모양새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건 여전하다.
저렇게 화내는 걸 보니 헛수작은 아니군.
수작질을 부릴 때의 한건주는 미묘한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 비겁하게 웃어 댔다. 용모 과시라도 하듯 눈꼬리를 살살 늘어트리며 사기꾼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데 그것이 수작질의 신호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흘린다. 이건 청력을 잃은 상황 때문에 당장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날것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는다.
웃음도 척이고 분노도 척만 했다. 지금처럼 툴툴거리며 애새끼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건 수작질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마음속 체크 리스트를 하나씩 따지고 본 사윤이 이내 안심한 채 건주를 들쳐 메고 망령 사체들을 벗어났다. 호철이 다가오며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웃으며 쏟아 냈다. 음소거 상태인데 호철 특유의 껄껄거리는 웃음은 자꾸만 법칙을 관통하고 지원되는 듯해 인상을 찌푸린 사윤이 입을 열었다.
“그만 웃고 전투에 집중하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그 말을 전하려고 했던 사윤은 호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멈췄다. 호철의 어깨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없던 구멍이었다.
이어서 검은 광선이 날아와 호철의 목에 구멍을 뚫었다. 놀란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컥컥거리다가 늪으로 떨어졌다. 경직된 시선으로 호철을 바라봤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 사윤 일행은 검은 광선이 날아온 방향을 응시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해골. 자수정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있는 해골이 1킬로미터나 떨어진 상공에 뜬 채로 사윤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의 로브가 펄럭거리며 그 안의 얼굴이 드러난다.
새하얀 뼈. 그리고 안구의 검은 공동을 채운 자색의 불길한 빛까지.
이 게이트가 망령의 늪이라고 불리는 이유.
망자를 소환하고 다루는 생명의 흐름을 거스른 망자.
리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