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망령의 늪 (9)
“권사윤한테 검술이라도 배웠나?”
건주의 검이 호철이 잡아 둔 망령을 스무 번째로 소멸시켰을 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검을 휘두르는 자세를 보고 있던 호철이 물었다. 별다른 의도 없는 순수한 물음이었다.
휘익!
머리를 노리는 공격을 피해 오른쪽으로 몸을 튼 건주가 팔꿈치로 딱딱거리는 망령의 턱을 가격했다. 손바닥으로 들추듯 위로 치고 물러나자 망령이 위로 치솟는다. 뻐근한 손목을 털었다.
“그건 왜 물어봐요?”
“거참, 물어볼 수도 있지. 젊은이가 팍팍하게. 쓸데없이 경계심이 많구먼.”
“살면서 납치당해 본 적 있어요?”
“……?”
“세 번쯤 당해 보시면 경계심이 많다곤 못 하실 텐데.”
돌아보는 호철을 향해 눈웃음을 슬 지어 보인 건주가 달려드는 망령의 복부를 걷어찼다. 상대가 방심한 줄 알고 틈을 노렸던 망령이 끝도 없이 밀려나 늪 속으로 처박혔다. 호철이 감탄했다. 가공할 만한 체술을 보이면서도 늪에 빠지지 않도록 망령의 사체만 밟아 움직이는 모습이 몸을 다루는 데 아주 능숙해 보였다. 꼭 오랜 시간 이런 식의 거친 싸움을 반복하며 몸을 단련해 온 사람처럼.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닌데 신기하지.’
속으로 중얼거린 호철이 건주의 액면가를 짐작했다. 생김새만 봐선 갓 성인으로만 보였는데 옛말에 구미호같이 음침하고 상스럽게 생긴 것들은 보이는 것보다 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 있다. 사윤이 그랬으니 눈앞의 어린 청년 역시 그다지 다르진 않을 거였다. 어떻게 이렇게 비슷한 인상을 주워 왔는지. 분위기도, 싸우는 태도도, 슬쩍 웃어 보이는 저 미소도 은근히 판박이였다.
형제라도 되는 건가?
의문을 삼키는 사이 또 다른 망령 하나가 날아간다. 보이는 것과 달리 힘이 장사였다.
“아깐 눈이 안 보인다는 핑계로 안겨 있더니 잘만 싸우는군.”
날아간 망령과 아슬아슬하게 망령의 사체를 밟고 서 있는 건주를 번갈아 보며 지껄이자 눈을 감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단지 눈이 보이지 않아 감고 있을 뿐인데, 눈꺼풀을 꽉 닫고 있는 모습이 전투할 때의 움직임과 겹쳐지며 괜히 신묘하게 느껴졌다. 괴물이 괴물을 데려왔다고 중얼거리고 있자 건주가 집중하라며 호철의 어깨를 검 손잡이 부분으로 살며시 타격했다.
“그쪽이 망령들 상대로 애먹고 있어서 지원 온 거니 놀지 마시고 나머지도 잡으세요. 그리고, 눈이 안 보인다는 핑계로 안겨 있던 게 아니라 제가 항의해도 형이 안 놓아준 거였거든요.”
건주는 사윤이 그를 붙잡아 안았을 때부터 서리 발판이 없어도 알아서 뜰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다만 귀가 안 들린 남자가 제 의사를 무시한 채 행동했을 뿐이지. 그가 자신을 미정의 검은 손에게 날렸을 땐 정말로 입에 거품을 물 뻔했기에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인상을 찌푸린 건주가 어느덧 일행들에게서 멀어져 괴물을 늪의 끝까지 몰아붙여 대고 있는 사윤을 응시했다. 존재감이 강한 파장이 몇 번이고 공간을 울리며 제게로 전해졌다. 심장이 그에 맞춰 공명하기라도 하듯 요동쳤다.
하여간 제멋대로인 사람이지.
안하무인에 오만하고, 배려도 없으며 독보적이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주인을 잘못 찾아온 성향이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건주가 보기엔 사윤이야말로 하늘 아래에서 가장 독단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인성 면으로나, 실력 면으로나 그랬다. 특히 전자가 특출났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젠 그의 막무가내인 태도가 예전만큼 나쁘지 않다. 꽤 견딜 만했고 봐 줄 만했기에 시선을 거두고 검을 휘두르니 건주의 앞으로 다 잡아 놓은 망령들을 정화하라고 밀어 넣던 호철이 그새를 못 참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검은 누구한테 배웠나?”
“독학했어요.”
“…독학?”
의심이 담긴 반문이다. 건주는 기억을 곱씹었다.
“뭐라고 했더라. ‘인생만 운빨인 줄 알아? 싸움도 운빨이고 흐름빨이야!’”
“뭣?”
“그리고 ‘피하고 기습하라고, 기습.’, ‘다음엔 뭘 할지 생각해.’, ‘급할 땐 생각하지 마. 감 오는 대로 휘둘러.’ 뭐 이런 조언을 했던 것 같은데…, 이것도 배운 거라고 하면 스승이 있긴 하죠.”
기억을 반추하며 누군가 했던 말을 생각나는 대로 읊은 건주가 픽 웃었다. 벌써 1년도 더 된 기억인데 사윤의 조언 아닌 조언을 들을 당시 황당했던 심정은 아직도 인이 박인 듯 남아 있었다. 생각을 하라고 했다가 하지 말라고 했다가 공격을 흘리라고 했다가 최고의 방어는 반격이라며 기습하라고 했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전혀 다른 A와 B 선택지를 동시에 하라고 하는데 그 누가 해내겠는가.
그런데 남자는 해냈다.
말도 안 되는 조언이라고 했던 그걸 사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걸 보며 건주는 그에 대한 평판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더러 엿 먹으라고 그런 제안을 한 게 아니라, 정말로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기술이었기에 그리 조언했던 거였다.
그걸 깨달은 날 어찌나 속이 비틀렸던지. 자존심이 상해 종일을 굶고 검만 휘둘렀다. 그날부터 싸울 일이 있으면 사윤의 움직임을 그렸고 가상 속 그의 움직임을 쫓아갔다. 분석했고 파고들었다. 어떤 자세가 가장 효율적일지 어떤 동선이 가장 닮았는지 그려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윤이 원했던 움직임을 소화시킬 수 있는 수준이 되었건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카드드득!
“머리는 훼이크다, 새끼야!”
가벼운 어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마찰음이 연이어 들렸다. 전투하는 사윤의 목소리와 검과 검이 부딪쳐 나는 쇳소리, 타격음만 듣고도 그가 어떤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 감이 온 건주가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가 중단되자 호철이 고개를 갸웃거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껄껄 웃었다.
“누구한테 배운 건지는 몰라도 자네는 검을 잘 배웠어! 그 나이에 만검을 익히는 건 쉽지 않지. 아마 청출어람일 거다.”
호언장담을 하며 제 등을 팍팍 치는 손길에, 등이 따가워 인상을 구겼던 건주가 잠시간의 휴식을 마치고 다시 사체를 박차 망령을 처치하러 가며 대답했다.
“청출어람은 무슨. 영원히 더 푸르지 못하게 생겼는데요.”
“음?”
“그런데 그게, 꼭 나쁘진 않죠.”
뒷말은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한 번이라도 사윤을 이겨 볼 생각을 하며 검을 쌓아 왔으나 막상 S급이 되고 나니 그와의 격차가 더 현저히 와 닿았다. 등급 차이로 뭉그러트릴 수 있던 세세한 부분마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탓이었다. S급이라고 다 사윤처럼 빠르지 않았다. 그만큼 간결한 동작으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지 않았고, 검무를 추듯 현혹적인 움직임으로 등골이 섬찟할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이젠 이기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건 비단 사윤과의 격차를 실감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건주가 사윤을 향한 투쟁심의 절반을 저버린 건 그로부터 그의 과거를 전해 들은 이유도 컸다.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을, 그렇게 견뎌 온 사람을 어떻게 추월하겠는가.
위태롭게 살아온 사람을 앞지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족감이 들기도 전에 자괴감부터 닥치리라.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건주는 사윤의 이야기를 듣고 줄곧 고민했다.
의도했던 건 다 이뤘다. 사윤이 어떤 사정을 안고 있는지, 왜 저를 필요로 했는지, 진실을 숨긴 이유가 뭔지. 궁금했던 건 모두 알아냈으며 더 밝혀내고 싶은 건 없었다. 아니, 그 무엇도 더는 들춰내고 싶지 않다는 쪽이 더 옳았다.
들추면 들출수록 사윤이 약해지는 게 보였기에.
자신이 동경하던 남자는 그리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증오했던 남자는 그렇게 위태롭지 않았고 경외했던 남자는 그렇게 소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들추면 들출수록 사윤은 약해졌고 위태로워졌으며 소심해졌다. 거북이가 몸을 보호하기 위해 껍질에 몸을 숨기듯이. 광기로 포장하나 한번 눈에 들어온 걸 놓치는 자신이 아니다. 이미 포착한 취약점은 무엇으로 가리든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결정적으로 마음을 먹게 한 건 이어링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질 뻔했던 사윤의 모습이었다.
건주는 사윤이 그렇게 떠는 모습도, 혼란스러워하는 모습도 처음 봤다. 제게 비밀을 말해 줄 때조차 누구보다 담담하게 얘기했으면서 절벽에서 추락하듯이 동요할 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한건주는 더는 사윤의 그 무엇도 들춰 볼 생각이 없었다.
그건, 그를 향한 제 동경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고 또 그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피해받지 않을 타협책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얼 해야 하는가.
더 캐내지도 않을 거고,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도 없다면.
무얼 보고 나아가야 하는 걸까.
줄곧 보고 달렸던 목표가 한순간에 이루어지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사윤의 곁에 남기로 한 건 그래서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또 무언가를 발견하고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무료했던 삶에 자극을 준 게 그였으니 1년이 넘도록 좇았던 목표를 이뤄 다시 공허해진 자신에게 두 번째 자극을 줄 이도 그일 거라는 편협한 사고로 빚어진 행동이었다.
사윤에게 미공략 게이트를 같이 공략하자는 헛소리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제가 잘못 선택했나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아님을 깨달았다.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며 건주는 눈앞의 적을 차례로 베어 냈다. 머릿속이 차분해지고 결론이 가까워질수록 적들의 수가 줄어든다. 마침내 호철과 합을 맞춰 마지막 망령을 베어 냈을 때 건주가 고개를 돌렸다. 눈을 떴다. 초점을 잃었던 눈동자가 기이하게도 정확히 사윤을 바라보았다.
이젠 당신을 해치고 싶지 않다.
이용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지긋지긋한 마음은 있으나 그렇다고 곁에서 떨어지고 싶진 않았다.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만큼, 당신 역시 나를 기억했으면 했다.
그건 일종의 표식을 향한 집착 같은 거였다. 자신의 삶에 자극을 남긴 게 그였으니 저 역시 그의 삶에 자극적인 무언가쯤은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삶이 무료하다고 생각해 죽으려 들지 않을 테니까.
내가 노력하면 당신도, …살고자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까.
담백하게 과거를 이야기하던 사윤의 모습을 기억한다. 울 줄을 몰라 웃기만 했던 모습도 기억한다. 미정의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았다.
‘세상 모두가 그 애를 탓하길래 나라도 믿어 주기로 했지.’
그는 그런 선택을 내렸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얼 해야 하는가?
그때 사윤과 늪 괴물의 마지막 격돌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두 존재는 격렬하게 부딪쳤다가 공간을 뒤흔드는 파공음과 함께 서로 멀어졌다. 늪 괴물이 늪의 저편으로 밀려 나갔고 사윤이 그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늪 괴물의 반대. 그러니까, 일행들이 있던 곳으로 말이다.
건주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충격에 밀려난 사윤의 몸을 붙들었다.
“으윽!”
두 사람이 함께 데스 나이트와 망령의 사체 위를 굴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생각할 틈도 없이 몸부터 움직인 건주는 머릿속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다.
당신이 언제 쓰러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운 사람이라 내 시선을 자꾸만 채 간다면.
저항하지 않고 당신을 지켜보며 그 등을 받쳐 주리라.
그러다 당신이 무너지는 순간이 올 때 잡을 것이다.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잡아 일으킬 것이다.
그리하여 한건주는.
사윤을 살게 하고 싶었다.
건주가 신음을 삼키며 사윤을 붙잡고 일어났다. 그 순간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의 눈앞에 푸른 상태창이 떠올랐다.
<‘---’의 활성화를 위한 걸음 퀘스트 클리어 조건 달성!>
<조건 조기 달성으로 성향 활성화를 위한 단계 중 일부를 건너뜁니다.>
<시스템이 보상을 조율합니다.>
<보상 조율. 성향 미리 받기 완료.>
<새로운 성향이 활성화됩니다.>
<당신의 두 번째 성향은 ‘조력자’입니다.>
<동시 진행자와 추가 퀘스트를 진행해 행성 9180호 ‘지구’를 멸망에서 구원하세요! (º □ º 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