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망령의 늪 (8)
“…내가 방금, 뭘 잘못 들었나?”
미정이 스스로의 청력을 의심했다. 늪 괴물에게 빼앗긴 감각이 시각이 아닌 청각이었는지 곱씹어 보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주가 검은 손의 속박을 쳐 냈다. 무력하게 잡혀 있던 시간이 거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 하나 들이지 않은 폼이었다. 그를 알아차린 미정이 미간을 좁혔다.
“뭐야?”
“뭐가요.”
“어떻게 풀었지?”
이게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게 아닌데? 떨떠름하게 덧붙인 여인이 부채를 접었다 펴며 고개를 기울였다. 믿기지 않는다는 어투에 건주가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중간에 힘 푸셨잖아요. 제가 그것도 못 풀 것 같았어요?”
“아무래도 그렇지?”
“…대체 절 뭐로 보고 있는 거예요?”
“뭐로 보고 있기는. 짐으로 보고 있지.”
“…….”
“웬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가 노아에 들어온다 싶더니 첫 임무부터 납치당해, 앞이 안 보이는 채로 싸울 줄 몰라서 보호나 받아, 하필이면 우리 애가 신경 쓰는 놈이라서 다치면 안 돼. 이게 짐이 아니면 뭐니?”
구구절절 이어지는 말은 하나같이 냉정할 정도로 진실을 저격한 말이었다. 그 탓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건주가 한숨을 삼키며 미정이 준 무기를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아이템의 정체는 나가서 확인하기로 마음먹은 그의 손아귀에 새로운 무기가 들렸다.
S급 장검, 별을 헤아리는 검.
1인 길드를 하면서 여러 게이트를 홀로 클리어한 끝에 획득한 무구다. 마침 정화 스킬도 딸려 있었기에 이번 던전에서 딱 쓰기 좋은 검이었다. 그것을 살짝 휘둘러 본 건주가 손목을 돌렸다.
“적어도 앞이 안 보이는 채로 싸울 줄 모른다는 말은 정정해 주세요.”
마치 당장이라도 지원을 나갈 것 같은 말이다. 미정이 조소했다.
“설마 도우러 가려고? 이제 와서?”
“지금도 뭐, 딱히 늦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리 말한 건주의 고개가 호철 쪽으로 돌아갔다. 사윤이 늪의 괴물을 상대하는 동안 늪에선 새로운 망령이 더 태어나 이제 백 마리를 훌쩍 넘겼다. 그 모든 망령을 아슬아슬하게 상대하고 있던 호철은 이제 꽤 버거워 보였다. 망령들이 죽지 않는 존재였기에 더 그럴 거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결국엔 되살아나 다시 공격해 오니까.
넌더리 날 만큼 지겨운 쳇바퀴이리라.
적의 머릿수를 확실히 줄이려면 어설프게 숨을 끊어 놓는 게 아닌 영원한 소멸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정화 스킬이 필요했기에 검을 고쳐 쥔 건주가 미정을 돌아보았다. 이제 행동에 어색함은 없다. 눈이 안 보이는데도 보이는 사람처럼 모든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오랜만이라서 기억이 잘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감을 찾기까지 오래 걸렸는데 이제 됐어요.”
“……?”
당최 뜻 모를 말에 미정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한이 경계 어린 태도로 건주를 지켜봤다. 수상쩍은 행동을 하거나 불필요한 단독 행위를 해 전투에 차질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조치하겠다는 듯이. 그 맹렬한 시선을 받으며 건주가 웃었다. 비스듬한 둥근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가 누군가를 퍽 닮아 있었다.
“내가 앞이 안 보이는 채 전투를 하는 게 처음일 것 같아요?”
말한 그대로, 감을 잡기라도 한 것처럼 여유로운 음성이다. 살짝 들떠 보이기까지 한 작태에 이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분위기가 판이하다. 조금 전 미정과 대화를 나눌 때와도, 사윤과 대화를 나눌 때와도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 눈앞의 남자에겐 어딘지 음산하고 괜히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그건 비단 이한만 느낀 게 아닌 건지, 미정이 눈살을 구기며 부채를 펼쳐 얼굴의 절반을 가렸다.
“…어우. 뭘 겪고 자랐으면 음기가 이렇게 강해? 너는 양기를 가진 사람 좀 만나야겠다. 햇볕도 자주 보고 말이야.”
넉살을 떨면서 말하긴 했으나 천연덕스러운 말 아래에는 은은한 경계심이 깔려 있었다. 그를 포착한 건주가 낮게 웃으며 조금 전 미정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허밍이 목을 울렸다.
방패가 되어야지, 지금은 약점밖에 안 된다고 했나.
옳은 소리다.
적어도 사윤을 두고 생각했을 땐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아니라면?
건주는 눈꺼풀 아래에서 시선을 굴려 노아 멤버의 기척과 격을 파악했다. 약한 이들은 아니었지만 사윤만큼 강렬한 파장을 지닌 이가 없었다. 예정된 탑 80층에 나오는 몬스터보다 위험한 기운을 지닌 자도 없었다.
비록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편법을 썼다 하더라도 한건주는 예정된 탑을 클리어했다. 과거에는 그 수십 층의 탑을 하나씩 클리어하기도 했었다. 체득한 능력은 시간이 되돌아가며 사라졌으나 기억과 경험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 자신이 약한가?
스스로한테 물어본 건주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채 싸울 줄 모른다고.
실명한 채 열흘 밤낮을 싸우고 층을 클리어해 간신히 시력을 회복한 적도 있었다. 그때의 기억 위로 사윤의 조언이 겹쳐진다.
눈은 그저 보이는 걸 도와줄 뿐이다.
딱히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느낄 수만 있다면 전투도, 생활하는 데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 무엇이 어디에 있고, 어디서 뭐가 날아오는지 느낄 수만 있다면 말이다.
탑에서 어렴풋하게 깨우쳤던 그 감각이 도발 아닌 도발을 당하고, 무력감에 잡아먹힐 뻔했던 지금에서야 탁 트이기 시작한다.
감각이 선명해졌다. 기가 예민해진다. 파장을 감지하는 느낌이 거세졌다.
콰아아앙!
굉음이 들린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건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위로 푸른 형상이 그려지는 걸 느끼며 웃었다.
보인다.
<스킬, ‘여섯 번째 감각’이 생성되었습니다!>
<초월자의 감각을 획득하셨습니다. 특전이 지급됩니다.>
[특전: 보고 들리고 느껴지고(S)]
-모든 감각이 기민해집니다. 전체 스탯 5% 상승
스킬창이 떴다는 게 느껴졌고 그다음에는 시스템 음성이 귓가에 내리꽂혔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건주가 사윤의 움직임을 쫓다가 방향을 돌려 호철의 위치와 그를 둘러싼 망령의 수를 파악하고 반장갑을 꺼내 꼈다. 별을 헤아리는 검은 난폭한 검이다. 휘두를 때 손바닥이 찢어지는 걸 방지하려면 귀찮더라도 보호 장비 하나는 필수였다.
“내기 하나 할까요.”
잠시간 깔렸던 정적을 삭막하게 가른 건주가 미정의 스킬이 만들어 낸 검은 손바닥 위에서 몸을 풀었다. 구두코로 바닥을 콕콕 두어 번 찍은 그가 미정을 보았다.
“형 곁에 있어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우리 둘 중 누구인지.”
“뭐?”
“선공은 제가 하죠. 시간은 이 게이트를 클리어할 때까지로 해요.”
도발했으면 그만한 책임은 지실 거죠?
싸늘한 웃음 섞인 어조로 얘기한 건주가 검은 손바닥 아래로 뛰어내렸다.
“잠시…!”
이한이 그 광경을 보고 손을 뻗었으나 늦었다. 뛰어내린 건주는 이미 검은 손의 손목을 타고 수직으로 내려가 호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저 미친 자식이!”
이한은 피아 식별하지 않고 공격을 가하는 건주에 고함을 내질렀다. 수습을 위해 뒤늦게라도 따라 뛰려던 순간이었다.
콰가가각!
별을 품기라도 한 것처럼 묘한 빛을 뿜어내는 검에서 퍼져 나온 검기가 호철에게 닿기 직전 두 갈래로 흩어져 성인 남성 한 명만을 교묘하게 제치고 남은 망령들을 공격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묘기 같은 컨트롤이었다.
“으음?”
싸우고 있던 호철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건주를 바라보았다.
“지원 왔어요.”
버거워 보이길래.
얼핏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호철은 예의와 배려를 신경 쓰는 인간이 아니었다. 마음에 든다며 낄낄 웃은 그가 기꺼이 건주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자리를 내주었고 그걸 사양하지 않은 건주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저쪽도 나름의 끼리끼리였다.
그렇게 다시 한번 일격이 가해지고 망령들이 갈라진다. 별을 헤아리는 검에 목숨을 잃은 망령들은 예측했던 대로 다시 되살아나지 않고 그대로 흩어졌다.
줄어도 주는 게 아니었던 적의 숫자가 빠르게 두 자릿수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망령들에게 집어삼켜질 정도로 포위당해 있던 호철이 여유를 되찾고 날뛰었다. 그런 날뛰는 행위가 익숙하다는 듯, 건주는 차분하게 제 몫만 다하며 호철을 서포트했다. 전투의 흐름이 가속된다. 사윤 쪽만이 압도하던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느껴지는 파장을 통해 아래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모조리 파악한 미정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야, 권사윤….”
약하다며?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 건지 황당함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를 상황이다. 대체 저 나이에 저런 기세를 뿜어내는 괴물이 어디가 약하단 말인가.
이 중 그 누구도. 심지어 그 사윤조차도 저 나이대에 저만한 기량과 대범함을 보이지 못했다. 제가 보기엔 틀림없는 이무기인데 그런 놈을 사윤은 무슨 병아리 취급을 하며 싸고돌고 있었으니 기가 막히지 않는다면 이상할 상황이었다.
이한마저 할 말을 잃고 건주의 전투를 바라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무겁게 휘두르는 중검, 민첩한 몸놀림을 검에 실어 허상 검기를 만들어 내는 환검,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는 쾌검에 궤도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변검까지.
신검합일 경지다.
저 나이에 만검을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리고 묘하게….
“닮았단 말이지.”
공격을 피해 뒤로 재주를 넘으며 착지하는 묘기 같은 움직임도 그렇고 경쾌한 몸놀림도 그렇고 전투를 끌고 가는 방식이 누군가를 꼭 닮아 있었다. 이윽고 이한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밤쥐가 잠잠해졌던 지도 어느덧 1년이 훌쩍 넘어 2년을 바라보고 있다. 처음에는 악행을 관둔 건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다른 목적이 있었다.
잠룡을 키우고 있던 건가.
뒤통수가 아릿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