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망령의 늪 (7)
사윤은 솟구치는 검은 피를 비처럼 맞으며 데스 나이트 사이를 누볐다. 일격에 적을 양단해 절단 부위를 밟고 뛰어오른다. 허공답보도, 축지법도 필요 없었다. 사방이 돌다리. 아니, 데스 나이트 다리였는데 비행 스킬과 이동 스킬이 왜 필요할까.
자신은 그저 차려진 회복 포션들을 복용해 가며 늪의 괴물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면 되었다.
비릿하게 웃으니 머리 위로 시커먼 검기가 날아왔다. 처음에는 머리를 노렸고 다음에는 복부다. 그 탓에 기껏 다리를 건너온 것이 무색하게 뒤로 재주를 넘어 물러난 사윤은 마치 수백의 궁수가 자신을 표적으로 삼고 활을 쏘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에서 달려드는 검기를 보며 무릎을 굽혔다.
허벅지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가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다. 단숨에 데스 나이트 한 놈, 두 놈, 세 놈을 뛰어넘은 사윤이 곧바로 몸을 틀어 검을 휘둘렀다.
아홉 개의 검기가 세 놈을 노리고 쏘아졌다. 데스 나이트들이 각자 검을 치켜세워 공격을 막았으나.
카가가각!
사윤의 공격은 적중했다.
한 놈당 막아 내야 했던 검기는 총 세 개.
그중 허상이 두 개다. 즉 요령껏 검기 두 개를 동시에 쳐 낸다 해도 진짜를 가려내지 못하면 헛수고였다.
스킬, ‘교란’이 발동되었다는 알림창을 보며 사윤은 보유하고 있던 단검을 모두 꺼내 날렸다. 놈들은 꼴에 기사라고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쳐 냈지만 단검 투척은 일회성 공격이 아니었다.
물러났던 검이 굶주린 짐승처럼 재차 달려든다. 형체 없는 단검 스킬의 효과였다.
데스 나이트들이 버거운 신음을 흘린다. 여섯 개의 단검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등 뒤의 적을 상대한 사윤이 반쪽짜리 신념을 고쳐 쥐고 정면에 남은 몬스터 수를 확인했다.
앞으로 열다섯인가.
회복한 체력은 7할 정도다.
“포식하겠네.”
배부르게 체력을 채우고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 듯해 만족스러워하자 입꼬리에 걸린 웃음을 조롱의 의미로 알아들은 건지 적들이 광분했다. 눈앞에서 칼날이 휘몰아친다.
포션들이 좀 난폭하네.
포션으로 태어났으면 얌전히 먹힐 것이지 쓸데없이 저항하고 있다.
저항하는 자.
문득 그 성향이 떠올라 입 밖으로 허밍이 샜다. 너희를 모두 죽이고 나면, 내게도 그 성향이 뜰까. 사윤은 누구도 답해 주지 못할 물음을 안으며 머리를 잃은 데스 나이트의 목을 박차고 올라 몸을 기울였다.
칼을 쥔 손을 왼쪽 어깨 위까지 들어 올려 사선으로 베어 낸다. 칼날이 데스 나이트를 반으로 가르며 새로운 다리를 만들었다.
몸통을 밟고 머리로 이동하니 부글부글. 발아래에서 늪이 끓으며 데스 나이트의 시신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늦기 전에 새로 디딜 발판을 찾아야 했기에 곧바로 다음 공격을 이어 갔다.
검을 휘두르고 다음 일격을 가하는 타이밍에서 쉬는 동작이 없다. 팔이 움직였으면 직후에는 다리다. 검이 적을 베고 나면 뒤를 기습하려는 놈은 발차기에 날아가 진흙 위를 뒹굴었다.
어떤 놈은 팔꿈치에 가격당했고 어떤 놈은 형체 없는 단검 스킬로 검을 불러들인 사윤이 그것을 발로 차며 가속을 더한 일격에 맞아 목이 꿰뚫렸다. 수적으로 열세인데도 도저히 열세로 느껴지지 않는다. 압도당하긴커녕 전투의 흐름을 손에 쥐고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모습은 폭군이 따로 없었다.
악마를 불러와도 이만한 전투를 보이지 못할 것이다. 그런 감상이 들 만큼, 검은 피를 뒤집어써 눈꺼풀을 한 번 떨었다가 푸르게 변한 벽안을 드러내는 사윤의 모습은 잔인했고 홀릴 듯 영롱했다.
마지막 세 놈.
잠깐 사이 수십을 처치하고 포션 세 개를 남겨 둔 사윤이 손목으로 얼굴을 가볍게 닦았다. 손도 피투성이였기 때문에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피비린내가 코끝에서 진동한다. 폐부를 찍은 향기에 자꾸만 손끝이 움찔움찔 떨렸다.
적이 강하니 그만큼 상대하는 재미가 있다. 비록 일격에 당한 놈들이 수두룩했지만 강한 놈과 약한 놈은 베어 낼 때의 손맛부터가 달랐다. 죽는 그 순간까지 반격하기 위해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얼마나 황홀하던가.
경탄한 사윤이 남은 적들을 보았다. 시선이 흘러가 데스 나이트를 지나쳐 늪의 괴물을 향한다. 서리를 머금은 듯 시린 시선을 받은 괴물이 경계심 가득한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자 데스 나이트들의 안광에서 광명狂明이 비치며 기세가 오른 놈들이 합공했다.
적의 수준을 알아차린 놈들은 더는 각개 격파로 승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철저히 강자의 숨을 압박하는 전술을 펼치며 합을 맞추는 이에 사윤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에 심장이 가장 크게 격동한다. 수년간의 빌런 생활을 하며 오만 무기를 다 써 본 사윤이 검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 탓이었다. 칼날이 살을 베어 내는 것이 손바닥을 통해 직접 전해지는 감각을 잊을 수 없었기에, 살아 있는 것들의 피를 뒤집어쓰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강한 생명력을 느끼는 때였기에.
비록 지금 상대하는 적들은 망자였지만 망자에게도 망자 나름의 혼이 있고 핵이 있었다. 부족한 생명의 맥동은 핵에서 전해지는 파장이 대체한다. 그런데 어떻게 웃음을 참을까.
전생의 자신은 전쟁터 속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했다.
천성이라고 생각하며 목을 노리고 매섭게 파고드는 검을 막았다. 흘려보내고 때론 튕겨 낸다. 가끔은 정면으로 부딪쳐 힘 싸움을 하기도 했다.
들리는 소리는 없었지만, 날붙이가 마주치며 튀는 스파크는 사윤의 눈을 멀게 할 만큼 선연했다. 틀어 올린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날 때였다.
챙!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빠진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손 떨림이 심해졌던 건지 여태 잘 쥐고 있던 검이 뒤로 날아갔다. 그것이 허공에서 두어 바퀴 도는 순간이 아름답다. 검광을 좇아 눈길을 흘리던 사윤은 어깨를 푹! 하고 꿰뚫는 공격에 고개를 돌렸다.
“…….”
드디어 제게 검을 꽂아 넣는 데 성공한 데스 나이트가 웃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텨 홀로 남아 반격하는 데 성공한 녀석을 본 사윤은 제 어깨를 곁눈질했다. 검은 피 사이에서 처음으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가 손목을 비틀어 더 깊이 검을 꽂아 넣었다. 전쟁은 패배했을지라도, 개인의 전투에서는 승리한 놈이 만족에 찬 표정을 지었을 때 사윤이 손을 들었다.
“네가 이긴 것 같니.”
어깨가 찔린 건 개의치 않는다는 듯 태연히 내뱉은 물음에 데스 나이트가 고개를 기울인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하라는 말이.
나직하게 덧붙인 사윤이 두 손을 들어 데스 나이트의 얼굴을 둥글게 감싸듯 붙잡아 쥐고 한 바퀴, 강하게 돌렸다. 데스 나이트의 고개가 90도 이상 홱 꺾여 축 늘어진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손바닥을 통해 뼈가 어긋나는 감각이 전해졌다.
이어서 사윤이 어깨에 꽂힌 검을 신음 한 번 없이 빼내 데스 나이트에게 돌려주었다. 핵을 노리고 쑤셔 박힌 검에 고개를 숙인 적이 절명한다. 녀석의 승리를 장식할 뻔했던 검은 유품이 되어 놈에게 돌아갔다.
깎였던 체력이 다시 일정치 회복돼 9할.
흐르던 피가 멎는다. 사윤은 데스 나이트의 무덤을 딛고 호흡을 갈무리하며 형체 없는 단검 스킬을 해제했다. 소모용으로 썼던 단검을 모두 인벤토리로 집어넣은 사윤이 늪의 괴물을 돌아보았다.
“둘만 남았네?”
부드럽게 건넨 말에 괴물이 입을 열었다. 데스 나이트의 갑옷이 박살 날 정도로 거칠게 발을 구른 사윤이 놈에게 달려든 건 그와 동시였다.
“저 솜씨는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구먼, 여전해. 아니, 예전보다 더 난폭해졌나?”
혼자서 수십의 데스 나이트를 처치하며 기어이 늪 괴물에게 도달한 사윤의 전투를 지켜보던 호철이 피 묻은 주먹을 망령의 얼굴에 꽂아 넣으며 중얼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미정이 그 소리를 듣곤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누구한테 난폭하다고 하는 건지.”
핀잔하듯 중얼거린 여인이 위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걸 느껴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고 있는 앳된 남자가 검은 손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얌전히 있어.”
쓰읍, 하고 경고를 준 미정이 부채를 접자 검은 손이 전보다 강하게 건주를 속박했다.
“네 형이 널 맡기고 갔는데 내가 뭘 어쩌겠니. 사고 안 치게 잘 지켜 줘야지.”
“…쯧.”
건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미정은 특유의 예민한 눈치로 달라진 반응을 알아차리곤 즐거운 듯 웃어 보였다.
“돕고 싶니?”
“보호받으려고 온 거 아니에요.”
“그렇겠지. 근데 어쩌니. 네 수준이 보호받을 수준밖에 안 될 텐데.”
“…아직 제대로―.”
콰아아앙!
굉음이 건주의 말을 잘랐다. 두 사람에게 강한 파장이 충격파처럼 전해졌다. 부채를 휘둘러 파장으로부터 몸을 보호한 미정이 멀리서 날뛰고 있는 사윤의 기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제대로 싸울 기회를 주면 저만큼 할 자신이 있니?”
“…….”
저를 저격하고 물은 것이 분명한 미정의 질문에도 한건주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잠시 돌아올 답을 기다리고 있던 미정이 검은 손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아가야.”
“…….”
“세상이 저 애한테 참 악의적이지 않니.”
뜬금없는 말이다. 느닷없이 주제가 튀었기에 건주가 눈썹을 추켜올렸으나 미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저 애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저렇게까지 망가져 있지 않았는데 어째 애가 갈수록 영 미쳐 가는 거야. 무슨 일인지 궁금해도 말을 안 해 주고, 그럴 애가 아닌데 갑자기 빌런의 수장이라면서 이름을 날리고, 파헤쳐 봐야겠다 싶어 정보원을 붙여도 알 수 있는 게 없고. 참나. 속 썩이기 대가였다니까?”
익살스럽게 얘기를 시작하는 여인에 줄곧 몸부림치던 건주의 움직임이 얌전해졌다. 미정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무슨 사정이 있는데 말을 안 해 주니 별수 있니. 세상 모두가 그 애를 탓하길래 나라도 믿어 주기로 했지. 그러기로 약속했거든. 네가 날 구해 주면 한 번쯤은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그런데 소원을 안 빌길래 내 멋대로 사용했지, 뭐.”
사윤의 귀가 안 들리는 틈을 타 혼자서만 쌓아 두고 있던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털어놓은 미정이 몸을 틀어 건주를 바라보았다. 눈꺼풀 아래로 숨겨진 시선이 보이지 않음에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본다.
“아가야.”
미정이 다시 한번 건주를 불렀다.
“저 애 곁에 있으려면 그 실력으로는 안 돼. 네가 방패가 되어야지, 지금은 약점밖에 안 되는데 내가 뭘 믿고 널 보내니?”
“…….”
“기왕 저 애가 널 곁에 두기로 했다면 난 네가 사윤이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으면 해.”
떨어트려 놓을 수 없는 운명이라면 서로를 강하게 지켜 내기라도 해야지.
덧붙인 말은 흘리듯 중얼거린 여인이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 건주에게로 던져 주었다. 통, 하고 머리를 가격한 아이템을 인상을 쓰며 포착한 건주가 검은 손 위를 더듬다가 손에 쥐었다.
“이제부터 네가 가지렴. 저 애가 저렇게 몸을 혹사시키는데 너라도 도시락 싸 들고 쫓아다니면서 말려야 하지 않겠니?”
미정이 장난스럽게 얘기하자 눈이 안 보이는 탓에 제가 얻은 아이템의 정체를 모르는 건주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이어서 그의 입이 열렸다.
“몸을 혹사시키는 걸 알면 좀 막지 그랬어요. 보아하니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것 같은데… 그쪽이 제대로 막아 줬으면 저 사람도 저렇게 습관 들이지 않았겠죠. 아닌가요?”
“…음?”
“책임의 방향이 분명한데 누가 누구더러 허락한다 만다야. 부채감이 있다면 스스로 덜어 내요. 남한테 맡기지 말고. 어른이면 알지 않나.”
“…….”
부드러우면서도 묘하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가차 없이 이어지는 말에 미정이 뒤통수를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황당함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 광경을 호위 명목으로 곁에 붙어 지켜보고 있던 이한이 경악했다.
고마워하긴커녕 지적을 해?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으로 미정의 눈치를 살피던 이한은 이내 광소를 BGM처럼 흘려 대며 늪의 괴물을 몰아붙이는 사윤을 보았다가 납득했다.
웬일로 권사윤이 사람을 곁에 두나 싶었더니.
끼리끼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