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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89)화 (189/266)

제189화. 망령의 늪 (6)

“…….”

마지막 남았던 얼음 파편마저 끓는 늪 속으로 사라지자 푸른 창이 시야를 채웠다. 서리 지대가 무효화됨에 따라 영역의 주인이 확고해져 추가적인 영역 선포가 불가능하다는 알림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개판으로 돌아가지.

상황이 좋지 않다. 적은 늪을 통해 더욱 강해졌는데 이쪽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말았다. 사람 수가 다섯인데 공중전이 특기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사윤은 건주를 들어 올려 안정적으로 허리를 받친 뒤 마나 포션을 꺼냈다. 힘으로라도 찍어 눌러 서리 지대를 형성하기 위함이었다.

단숨에 포션 한 병을 비우고 기세를 일으키자, 하루 사이에만 급격한 마나 회복이 몇 번이고 일어나 노후된 심장이 버거움을 토해 냈다. 그러나 능력의 사용은 그것과 별개일 텐데 서리의 기운은 호기롭게 뻗어 나가기만 할 뿐 전처럼 늪을 얼리지 못했다. 사윤의 표정이 구겨졌다.

공작이 있다.

누군가 자신이 다시금 서리 지대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나보다 우위라는 건가?

서리 기운이 늪으로 침투할 미세한 틈마저 주지 않는 걸 보아 하니 컨트롤 실력만큼은 상대가 우위였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과연 악명값을 한다는 건가.

어쩐지 쉽게 간다 싶었는데 이제부터가 이 게이트의 진면모인 듯했다.

그렇다면 나도 태세를 바꿔야지.

휘익!

아래에서 창 하나가 사윤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고개를 젖혀 그걸 피한 사윤은 내려오라며 저를 도발하고 있는 스콜피언의 영혼들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죽은 것들이 죽겠다고 발악해 대기는.”

안 그래도 곧 처치할 생각이었다.

우선 저놈부터 치우고 말이다.

푸른빛 시선이 늪의 괴물에게 닿는다. 이번 사태로 확실히 깨달았다. 하찮은 놈들을 하나씩 상대해 가며 체력을 소모할 시간에 저 새끼부터 처치하는 게 현명했다. 놈의 숨이 오래 붙어 있으면 오래 붙어 있을수록 전투도 길어질 테니까.

사윤은 2차전을 앞두고 제 품에 들린 건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곁에 있으면 제대로 전투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를 보호하기도 해야 했고 싸우기도 해야 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필드 때와 난이도가 달랐기에 입술이 벌어졌다.

“바닥 무너졌는데 너 어떡할래.”

되도록 그를 안전한 곳에 쑤셔 넣고 싶었다. 아무도 볼 수 없고 침입할 수 없는 곳에 말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못 되었고, 한건주가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었기에 묻자 그가 무어라 대답했다. 아까부터 제 귀가 들리지 않은 탓에 일방적인 소통의 연속이었지만 이번에도 사윤은 그의 말을 알아들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이에게로 이동했다.

가까이 날아가자 미정이 입을 열었다. 사윤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 결국 인상을 쓰며 이실직고했다.

“귀 안 들려.”

그러자 제 손에 들려 있던 한건주와 부채를 쥐고 있던 미정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눈 잃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잠시 고민하는 듯했던 미정이 부채를 휘둘렀다. 검은 손이 나타나 손을 이리저리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수화도 모르니까 생고생하지 말지?”

검은 손이 이내 시무룩해졌다. 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통을 반쯤 포기한 사윤은 들고 있던 건주를 미정에게 넘겨주었다.

“이거나 받아.”

가볍게 신호를 주니 능숙하게 건주의 파장을 감지한 여인이 검은 손을 움직여 떨어지는 건주를 받아 들었다. 제 예쁜이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무어라 말하는 게 보였으나 역시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습관적으로 귓구멍을 쑤시는 시늉을 한 사윤이 망령의 늪을 클리어하기 위해 온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서리 지대를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공중전으로 승부 본다. 아까 말했다시피 내 귀가 맛이 좀 가서 불러도 안 들리거든?”

왈패처럼 거칠게 말한 사윤이 무기를 장검으로 교체한 뒤 서리의 기운을 담아 휘둘렀다. 눈보라가 사납게 불며 일행들을 공중에서 이 보 이상 물러나게 했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거기 좀 빠져 있어 봐. 걸리적거리니까.”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의 자신과 협력해 전면전을 벌이는 건 저들 보고 자살하라는 신호와 다름없었다. 기민한 감으로 소리가 안 들리는 걸 얼추 커버하고 있다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오감이 멀쩡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반응 차이가 현저했다.

실수로라도 그들을 공격할 수 있기에 네 사람을 밀어 내자 이한이 인상을 찌푸렸고 미정이 표정을 읽기 힘든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사윤은 미정의 검은 손에 고이 모셔져 있는 건주를 보며 말을 이었다.

“누나는 걔 좀 지켜 주고 이한 너는 거기서 호위나 해라. 댁은 뭐….”

일행 중에서 그나마 가장 체력이 멀쩡해 보이는 호철을 위아래로 훑은 사윤이 고갯짓했다.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오든가.”

객관적인 실력만 두고 보았을 때 이 전투에서 그나마 쓸 만한 인간은 호철이었다. 이한의 실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경험의 차이가 크다. 무엇보다 호철은 이미 대여섯 번 자신과 합을 맞춰 싸워 본 적이 있었기에 손발을 맞추기 편했다.

무력을 앞세워 내린 독재적인 명령에 이한의 표정이 더욱 볼 만해졌다.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걸 보아 하니 또 무어라 애늙은이 같은 말이나 해 대고 있는 것 같았는데 사윤은 안 들린다는 핑계로 그들을 안전한 곳까지 밀어 내고 오더를 내렸다.

계획은 간단하다.

“늪 괴물부터 죽이고 올 테니 그 전까지 망령들 상대하면서 시간 좀 끌어.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늙은이 서포트하든가, 말든가.”

망령을 토해 내는 늪의 괴물은 자신이, 저를 방해하려 드는 망령은 호철이 상대한다. 간단명료한 명령을 내린 사윤이 즉시 허공을 차고 수직 낙하했다.

연이은 서리 지대 활성화로 몸이 상한 상태다. 세이렌의 이어링으로 갉아먹힌 정신 역시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전투를 오래 끌고 가면 불리하다.

게다가 이 전투가 늪 괴물을 처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경이로운 실력으로 이 구역을 통제하며 모습을 숨기고 있는 늪의 주인.

놈이 아직 숨을 죽이고 있었기에 늪의 괴물을 처치하는 데 쓸데없이 많은 체력을 허비해선 안 됐다.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이게. 속전속결로 결판낸다.

그래서 사윤은 허공답보를 해제하고 늪으로 추락했다. 뒤에서 놀란 호철이 사윤을 불렀고 그 외침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당황한 미정과 건주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사윤은 눈치채지 못한 반응이었다.

가까워지는 진흙땅을 보며 사윤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늪에 빠지는 건 호철 같은 멍청한 단세포나 겪는 일이다.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 위를 딛으면 된다.

남들이라면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폄하할 방법이었지만 사윤은 가능했다.

설명이 간략한 만큼 응용법이 무궁무진해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서리 스킬.

그것이 가능하게 했다.

직선으로 추락한 사윤은 늪에 빠지기 직전 몸을 일으켜 땅을 내디뎠다. 발아래로 서리 기운이 몰아치며 작은 눈보라를 생성시킨다. 사윤은 그 바람을 딛고 섰다.

오래 버티는 건 무리다. 작은 바람이 흩어지지 않고 제 체중을 받쳐 주는 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발을 내디뎠다.

걸음 하나하나를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눈보라가 몰아쳤다. 신발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사윤의 모습을 지켜본 이한이 혀를 내둘렀다. 능력의 세심한 컨트롤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중얼거린 그가 왜 하필이면 사윤에게 저런 재능이 내려졌는지 한탄하는 사이,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데 익숙해진 사윤은 금세 노련해진 실력으로 괴물을 향해 쇄도했다.

망령들이 달려든다. 주인을 지키려 목숨을 던지는 놈들은 사윤이 손쓸 수준도 되지 않았다.

사윤과 망령들이 충돌하기 직전에 기파가 날아왔다. 사윤은 간지럽다는 듯 그 공격을 받고도 버텼으나 망령들은 그렇지 못했다. 눈동자를 힐끔 굴리자 망령을 저격하는 데 성공한 호철이 고개를 젖히며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귀 따가울 일이 없으니 이럴 땐 청력을 잃어서 다행이었다.

잠시 맡길 수준은 되는군.

그간 놀고먹기만 한 것은 아닌지 호철의 무위는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올라 있었다. 적어도 늪의 괴물과 싸우다 호철이 놓친 망령에 의해 발목 잡힐 걱정은 던 것 같아 마음을 편히 먹은 사윤이 속도를 올렸다. 괴물이 다가오는 적의 기세를 알아차리고 몸을 돌린다. 녀석은 또 서글픈 듯 울어 댔으나 사윤은 놈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누가 또 당할 줄 알고.”

녀석의 입에서 망령이 흘러나온다는 건 조금 전의 몸으로 겪어 가며 파악했다. 자신이 같은 공격에 두 번 당해 줄 인사는 아니었기에 비릿하게 웃은 사윤이 녀석의 입 안으로 무기를 던졌다. 던져진 무기는 봄의 여명이었다.

인외 존재를 상대할 때 제 위력을 발휘하는 여명이 괴물의 공동 안에서 밝은 빛을 내뿜어 어둠을 밝혔다.

쏟아져 나오려 했던 망령들이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그 타이밍에 맞춰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선 사윤이 비행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적이 방심한 틈을 타 순식간에 몸을 띄운 사윤이 괴물의 머리 위를 선점했다. 추락 지점으로 늪의 괴물을 삼은 사윤이 낮게 웃으며 무기를 바꾸었다.

“제대로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 영광으로 알아라.”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끝이 뭉툭한 검이 사윤의 손아귀에서 흉흉한 기세를 뿜어냈다.

어둠 속성 상대 시 공격력이 100퍼센트 상승하는 검.

오랜 시간 탐내고 또 탐냈던 반쪽짜리 신념이 주인의 손에서 강한 파동을 일으켰다.

무기 전용 스킬, 메르한의 기합이다.

앞으로 10분.

10분간 모든 상태 이상에 저항할 수 있게 된 사윤이 추락하는 힘을 이용해 검을 내리찍으며 입을 열었다.

“제대로 봐 둬라, 꼬맹아!”

반쪽짜리 신념은 이렇게 사용하는 거다.

사윤은 망령의 늪에 맞춤 제작 하기라도 한 것처럼 효과적인 무기를 들고도 제 마음에 들 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한 이한을 나무라듯 소리치며 검에 서리의 기운을 몰아넣고 폭발시켰다.

거대했던 괴물의 몸에서 오물이 튀며 놈의 덩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윤은 제 얼굴에 오물이 튀자 다급히 손을 뻗어 망령 하나를 방패로 삼아 막았다. 저 오물이 무슨 효과를 갖고 있는지 몰랐으니 웬만해선 안 맞는 게 좋았다.

스킬, 동족 방패가 사용되었다는 알림창을 치우며 비처럼 쏟아지는 오물을 피해 이동한 사윤이 호흡을 한 번 골랐다. 늪의 괴물이 성이 난 듯 몸을 들썩거린다. 잔뜩 약이 오른 것 같은 그 상대를 무심하게 응시하던 사윤은 문득 고개를 외로 꼬았다.

“끝?”

“…….”

“에계?”

사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비소했다. 그 유치한 도발에 망령의 늪 전체에 잠시간 정적이 깔렸다.

내가 못 살아 정말. 미정의 성음이 늪에 가라앉을 때쯤 도발에 반응한 괴물이 몸을 좌우로 틀고 울부짖으며 시커먼 유령들을 소환했다. 스콜피언 망령들보다 한 계급 더 높아 보이는 망령들. 검은 갑옷을 두른 놈들의 정체를 눈치챈 사윤이 수십 마리의 데스 나이트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놈들이 동시에 진흙 바닥을 박차고 사윤을 덮치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서 사윤은 반쪽짜리 신념을 돌리며 제 남은 체력을 파악했다.

평소보다 반절 이하로 떨어진 체력이지만 할 만하다.

반쪽짜리 신념의 능력은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적을 처치할 때마다 체력 5퍼센트 회복.

그 사기적인 능력을 보유한 검을 쥔 자신의 앞에 수십의 적이 몰려오고 있었다. 마치 해일처럼.

사윤은 만족스러움에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피가 튀기고 동시에 지켜야 할 대상에서부터 자유로워져 억누르고 있던 흥분이 치솟는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

피버 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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