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망령의 늪 (5)
“오는구먼.”
온몸의 솜털이 뾰족하게 일어날 정도로 질척하고 더러운 기운이 일대에 깔리자 호철이 경고했다. 멀리서 검은 연기가 마치 해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아델리아의 무덤은 아델리아의 무덤인가 봐.”
미정이 연기에 가려진 적이 내뿜는 기세를 느끼며 웃었다. 당장이라도 전면전이 벌어질 듯, 일촉즉발의 긴박한 상황이다. 그러나 노아의 헌터 중 그 누구도 침을 꼴깍 삼킨다든가, 주먹을 꽉 쥔다거나 하는 긴장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숨긴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없는 거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지.
헌터란 것들이 으레 이렇다. 강한 적을 보면 흥분하고, 자신의 무력을 증명하고 싶어 하며, 상대보다 강한 힘을 보여 줘 찍어 누르고 싶어 한다. 순 짐승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 판에서 11년째 헌터로 산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사윤은 가까워지는 놈의 정체를 확인하고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많이도 먹어 치웠나 보지?”
몸집이 태산만 한 게 보통 망령이 아니었다. 스콜피언의 정예로 보인 놈들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더니 과연 그럴 만한 기운이다.
몬스터가 가까워진다. 이제 녀석과 사윤 일행의 거리는 1킬로미터도 되지 않았다.
육안으로 서로를 확인하고도 남을 거리.
끄어어어.
늪을 뒤집어쓴 것 같은, 오물을 뚝뚝 흘리고 다니는 거대한 늪의 망령이 입을 열었다. 그 입 안에서 수백 개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는 게 보였다. 끔찍한 광경이지만 동시에 신묘한 광경이기도 했다.
관광지네, 관광지야.
세계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광경이다. 관광 사업을 하면 대박 나겠다고 우스갯소리로 얘기하니 호철이 껄껄 웃으며 동의했다.
그러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잠시다.
입을 쩍 벌렸던 놈이 탁한 숨을 뱉어 냈다.
<파수꾼의 스킬 ‘인페르노’가 지옥의 규율을 읊습니다.>
<망령의 늪이 주인의 기운에 반응합니다.>
<지대가 ‘지옥화’됩니다.>
<지옥의 규율, ‘네 가지 감각’이 침입자들에게 적용됩니다. 오감 중 하나가 차단됩니다.>
분주하게도 뜬 푸른 창에 헌터들이 흠칫거렸다. 몬스터가 스킬을 썼다고 시스템이 뜨는 일은 없었다. 녀석이 스킬을 사용해 시스템이 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건 마지막에 뜬 시스템창이다.
오감 중 하나가 차단됩니다.
그 말이 뜨고서 사윤은 먼발치의 소리까지 다 잡아내던 제 청각이 기능을 상실했음을 자각했다. 늪이 들끓는 소리도, 일행들의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제기랄. 이런 식이었던가.
왜 수많은 헌터들이 놈에게 속수무책으로 죽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사윤의 팔을 꽉 잡았다. 마치 넘어지지 않기 위해 지지대를 잡는 것처럼 위태로운 손길이다. 사윤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건주가 있었다.
눈의 초점이 사라진 한건주가.
시발.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입 밖으로 흐른 말에 상대가 움찔거리며 반응했다가 이내 안도했다. 앞에 자신이 있다는 걸 확신한 표정에서 사윤은 의문스러운 만족감을 느끼다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이한과 미정, 호철을 확인했다. 미정 역시 시력을 잃은 건지 눈을 감고 있었고 이한은 비교적으로 멀쩡해 보였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다가 손을 가져가 냄새를 맡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걸 보니 그가 잃어버린 감각은 후각인 듯했다. 그리고 호철은.
저 미친 새끼.
그는 진흙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늪을 손가락으로 콕 찍어 맛보고 있었다. 그러곤 껄껄 웃어 대는데 누가 봐도 정신을, 아니, 미각을 잃은 사람이었다.
치명적인 손실을 본 건 이쪽의 셋인가.
자신과 미정, 한건주가 제일 큰 피해를 보았다. 특히 시각을 잃은 건주와 미정의 피해가 컸기에 사윤이 제 팔을 꽉 잡는 건주를 보며 충고했다.
“보려고 하지 말고 그냥 감아. 원래 하나의 감각이 사라지면 다른 감각이 발달하는 법이니 눈 감고 있는 게 더 집중이 잘 될 거다. 소리랑 파장에 집중해.”
사실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파장을 느끼고 위치를 파악한다거나 하는 일은 오랜 헌터 생활을 통해 육감이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감각이 트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최상위권 헌터가 아니고서야 느끼기 힘들었지만 사윤은 한건주의 천재성을 믿었다.
제 배를 다 아프게 했던 능력이니 이만한 위기 상황이 닥치면 어지간히 발현될 것이다.
나름 성심과 성의를 다한 충고에 한건주가 뭐라 말했다. 입 모양을 읽기가 힘들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사윤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망령이 어느새 지척까지 와 있었다.
녀석이 눈꼬리를 축 늘어트린 채 흐느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입을 열며 몸을 들썩이는 그 몸짓에서 사윤은 놈이 울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이윽고 녀석이 몸을 뒤로 물렸다가 쭉 펴며 수백 마리의 영혼을 토해 냈다.
놈이 토한 망령이 늪에서 일어난다. 수백의 영혼이 삐걱거리며 다가왔다. 조무래기 같았지만, 그 수가 워낙에 압도적이라 기가 질렸다.
이어서 거대한 망령은 꿀렁거리며 검은 토를 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토에서 새로운 망령이 일어난다. 이번엔 다른 녀석들보다 기운이 강했다.
사윤은 새롭게 태어난 망령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들고 있는 살벌한 아이템과 몸에 붙은 실전 근육들, 그리고 얼굴에 있는 전갈 문신.
놈들은 한건주가 진언했던 망령에게 먹힌 스콜피언 정예 일당이었다.
“안 그래도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나타나 주면 고맙지.”
나직이 중얼거린 사윤이 건주를 놓았다. 상대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지만 긴박한 전투에서 서로의 팔 하나를 구속하고 있는 자세만큼 멍청한 건 없었다.
“움직임에 제한이 있는 게 더 위험해. 알아서 움직여.”
충고하니 그가 입을 달싹인다.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표정을 보아 하니 대충 자신을 핀잔하는 말인 것 같았다.
사윤은 인벤토리에서 방어 기능이 제일 뛰어난 망토를 꺼내 한건주에게 둘러 주곤 가까이 다가왔던 망령을 단칼에 베었다. 그러곤 새로운 검을 꺼내 공중으로 휘릭 던졌다 잡으며 입을 열었다.
“건주야, 영혼도 인외 존재일 것 같니.”
물론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자신은 이제 한건주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마치 대답을 들은 것처럼 씨익 웃어 보인 사윤이 땅을 박차고 망령에게 달려들었다.
“뭐, 싸워 보면 알겠지.”
재빠르게 움직인 사윤이 망령들과 격돌했다.
섬전처럼 움직인 사윤의 검이 노린 첫 상대는 선두에 서 있던 망령이었다. 사윤은 놈의 목에 단도를 박아 넣고 자신을 잡기 위해 손을 뻗는 수십의 망령들을 보며 발을 굴렀다. 쿵! 소리가 나며 서리 지대의 한기가 망령들을 열 걸음 뒤로 단번에 밀어 내었다.
제게 붙들린 망령의 발버둥이 심해진다. 사윤은 깊숙이 쑤셔 넣은 단도를 손목을 틀어 빼냈다. 늪의 색을 갖춘 망령은 힘없이 아래로 고꾸라졌다.
망령은 영혼이다.
신성력 관련 스킬이 없는 이상 녀석들을 영구적으로 처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리적인 죽음은 일시적인 죽음일 뿐이라 곧 망령이 다시 일어날 거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털었다.
“사람 손에 잡히면 좀비지, 영혼이냐?”
밀려난 망령들을 보며 그렇게 비웃어 주니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수많은 망령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공격하려 드는 망령이 반, 무언가를 읊는 망령이 반이다. 후자 쪽은 환각을 보여 주려 하는 것 같았지만 소용없었다.
수가 많을 뿐 조무래기들이다. 녀석들의 환각 솜씨가 세이렌의 이어링만큼 뛰어나진 않을 거였다.
사윤은 주둥이를 놀리는 망령들은 무시하고 공격성을 띠는 망령들 사이를 누비며 봄의 여명을 휘둘렀다. 영혼은 인외 존재로 쳐지는 게 맞는 건지, 단도로 처치하는 것보다 봄의 여명을 사용하는 게 손맛이 더 좋았다.
그런 사윤을 필두로 나머지 일행도 전투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미정이 부채를 들어 펼치자 여인의 등 뒤에서 사나운 기운이 피어오르며 부채가 향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기운이 망령을 억누른다. 기운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사람의 손 형태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정이 스킬을 위해 섬기고 있는 신이었다.
헌터계의 무당이라 불리며 각종 점을 쳐 주는 것으로 막대한 부까지 벌어들인, 상인의 정점에 선 그가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자 검은 바람이 휘몰아치며 망령들이 쓸려 간다. 활로가 확보되자 트인 길을 따라 이한이 움직였다.
그가 반쪽짜리 신념을 꺼내 드는 걸 본 사윤은 자신과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하고 있는 건주를 향해 얘기했다.
“왼쪽 사선의 기운이 이한이다. 제대로 느껴 봐라, 예쁜아.”
저게 네가 가야 할 길이거든.
작게 덧붙이자 건주가 눈을 감은 채로 이한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이한이 검으로 제 그림자를 찍었다.
일렁거린 그림자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요동치며 이한의 검에 입혀졌다. 이한은 그 상태로 적을 가격했다.
망령이 일격에 반으로 갈라지고 절단면에서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이한의 성격을 닮아 차분한 그림자는 천천히 망령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한의 주력 스킬인 그림자 다루기다.
저것 말고도 이한은 자신의 그림자에 은신한다거나, 타인의 그림자를 공격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힌다거나 하는 짓을 할 수 있었다. 한건주의 능력이 이한의 그림자 다루기보다 한 단계 높아 보이는 그림자 지배였으니 이한의 전투를 참고한다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윤은 전투도 잊고 이한의 기운을 탐색하는 데 여념이 없는 건주를 살피다 그를 노리고 달려드는 몬스터를 처리했다. 팔자에도 없는 경호를 하고 있었다.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며 속으로 지껄이는데 누군가 빠른 속도로 사윤의 곁을 지나갔다.
신형이 땅을 차고 날아올라 망령들의 진영 한복판에 겁도 없이 뛰어든다. 야생마 같은 움직임에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린 사윤이 망령들의 본진에서 날뛰고 있는 호철을 보았다.
“무식하기는.”
무식한 만큼 용감하고 또 그만큼의 실력이 받쳐 주기에 할 수 있는 호철의 전투였다. 사윤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호철이 호탕하게 웃고 있다는 걸 느끼며 다시 검을 움직였다.
망령들의 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부활과 죽음을 반복하는 수백의 조무래기를 처치하고 나니 드디어 수십의 스콜피언 망령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살다 보니까 이놈들이랑 다시 싸울 때도 오고. 세상이 참 재밌어. 안 그래?”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며 살벌하게 웃은 사윤은 스콜피언의 길드원 중 한 명과 검을 부딪쳤다. 그때다.
발밑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됐다.
늪이 끓고 있는 정도가 심해진 건지, 얼음 지대가 진동함과 동시에 검을 맞대고 있던 스콜피언 망령의 기세가 급격히 오르는 게 느껴졌다.
흐름이 바뀌었다.
압도적으로 이어지고 있던 이 전투에 누군가 개입했음을 깨달은 사윤은 망령을 뱉어 냈던 녹색의 망령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사윤의 서리 지대를 입으로 물어뜯으며 새로운 망령을 토해 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망령들은 일어나자마자 자살해 검은 기운으로 변태했고, 마치 명령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흘러가 스콜피언의 망령에게로 스며들었다.
망령 강화라니.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기가 막힐 무렵 기어이 사윤과 일행들이 딛고 있던 서리 지대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 번 큰 균열이 가자 들끓는 늪에 얼음이 삼켜지기 시작한 건 순식간이었다.
카드드득!
얼음 바닥이 단번에 수십 조각으로 깨지며 늪으로 사라졌다. 디딜 곳이 사라진 헌터들이 다급히 비행 스킬을 사용했을 때, 사윤은 비행 스킬이 없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한건주!”
다급히 몸을 돌린 사윤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얼음 파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남자를 포착했다. 그가 딛고 있는 발판에 서서히 균열이 일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허공을 박차고 건주를 향해 날아갔다. 소리를 들은 건지, 파장을 느낀 건지 한건주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사윤은 하얀 손을 붙잡아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남자가 사윤의 손을 잡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쩌저저적!
직후 그가 딛고 있던 발판이 갈라지며 늪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