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꼬리잡기 (4)
“…내가 왜 널 잡고 있냐?”
“그걸 나한테 물으면 뭘 어쩌라고―.”
황당해하던 건주가 말을 멈추곤 급하게 사윤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조금 전의 충격으로 금이 갔던 얼음 바닥이 빠르게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발 디딜 틈도 남지 않게 될 거다.
“물어볼 게 많은데 여유가 안 될 것 같네요. 일단 지금은 방금 말한 대로 수습부터 해요. 자세한 얘기는 여기서 나가야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도울 일 없어요?”
랩을 하듯 속사포로 이어진 말은 불친절했다. 딱히 그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은 사윤은 당장에 신경 쓰이는 것부터 확인했다. 그러니까, 한건주와 몸이 맞닿은 부위 말이다.
제 손이 그의 팔목을 붙잡고 있었고 그가 자신의 반대 팔을 붙잡아 끌어당기며 자연스럽게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희한한 자세인가.
아니, 그것보다 내가 왜 얘 팔을 잡고 있지. 정신이 나가 커플 댄스라도 출 생각이었나.
의문은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처음으로 돌아왔다. 기억이 흐릿하다. 세이렌에 홀리면 늘 이런 식이었다.
필름이 끊기기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에 이성이 끊겨 환각을 보고 헛것을 듣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성이 혼탁했을 때의 기억을 대부분 잊어버린다. 생각나는 거라곤 무언가 꺼림칙한 것을 보았다는 희미한 잔향 같은 기억과 한건주의 외침뿐이었다.
왜 이 지경으로 홀린 거지?
세이렌의 이어링은 자신과 벌써 5년째 함께하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어디 가도 빠지지 않을 숙련도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역으로 삼켜지다니.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 이성이 먹히기 직전의 기억을 더듬어 가 보니 결론은 또 한건주였다.
그가 제 약점이란 걸 깨달아 동요했기 때문에 버티고 있던 정신 방벽이 무너져 내린 거지 않은가.
“결국 네가 문제였네.”
“…뭐라고요?”
“억울해하기는.”
진짜 억울한 사람이 누구인데.
그간 문제없이 정해진 루틴 안에서 나름대로 안정적이게 견디고 있었는데 한건주 하나가 삶에 침투하면서 다 망가졌다. 그를 손수 납치해 곁에 둔 게 자신이란 건 잊은 사윤은 건주에게 붙들린 손을 빼내며 그를 밀어 내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서리 지대의 끝자락을 향해 걸어가는 걸음 하나하나에 생각 하나와 추측 하나가 깃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확실한 것부터 정리해 보자.
일단, 한건주는 자신의 약점이다. 인정하기 싫든 뭐든 간에 자신은 그의 부재를 견디기 버거워했다.
그래, 여기까진 뭐 괜찮았다. 전엔 안 괜찮았는데 이젠 또 괜찮다. 생각해 보니 나름 타협이 된 것이다.
살다 보면 가끔 개 하나 잃는 게 죽음보다 더 버거운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 대충 그거랑 비슷한 감정이라고 쳐 보자. 자신이 그를 오죽 정성 들여 키웠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다음부터였다.
그가 제 약점이라는 걸 저 혼자 알고 있으면 모르겠는데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티 나게 행동해 버려 동네방네 소문이 퍼지게 생겼다. 스콜피언 놈들은 물론이고 평소에 자신에게 악감정이 있던 헌터들한테까지 말이다.
이 상황에서 한건주가 살기 위해선 뭘 해야 하는가?
답은 뻔하다.
강해져야지 뭘 어쩌겠나.
자신만큼만 강해지면 손 탈 일도 적고 제 속이 탈 일도 적을 거였다. 지금은 그가 너무 툭 치면 부러질 정도로 약해 빠져 안심할 수가 없었다.
단순하지만 어려운 해결책이 하나 나왔다. 덕분에 스콜피언에 한건주가 다시 납치당할 걱정이나 다른 악의적인 헌터들에게 살해당할 걱정은 조금 줄었다. 그가 강해지기 전까지 자신이 그의 곁에 거머리처럼 붙어 다녀 경호도 하고 수업도 해 주면 된다.
구창인이었나. 용호에서 주워 왔던 그 각성자가 한건주랑 비벼 볼 만했는데 어떻게 성장했는지 모르겠다. 던전에서 나가면, 밤쥐로 돌아가서 창인의 성장을 확인해 보고 꽤 쓸 만하다 싶으면 한건주의 파트너로 붙여서 대련시켜도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휘릭, 사윤의 단도가 손아귀 안에서 경쾌하게 돌아갔다.
그대로 인벤토리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바닥난 마나를 강제로 부풀리고 스킬을 사용했다.
발을 뻗자 사그라들었던 서리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올라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한건주를 찾았기에 무리하게 영역을 넓힐 필요가 없었다. 100미터 내외로 좁히는 대신 단단하게, 자신이 아무리 박차고 뛰어도 깨지지 않도록 두껍게. 양보다 질에 더 집중하며 기운을 펼치니 몸 주변으로 눈보라가 일었다. 미정이 감탄을 흘렸다.
“능력으로 현대 예술을 다 해.”
그 칭찬을 들으며 사윤은 스치듯 건주를 보았다가 다시 생각에 집중했다. 스콜피언과 다른 헌터들의 간섭은 한건주 자체가 강해지는 거로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시스템은 어떡할까.
그건 사윤이 막을 수도, 한건주가 견딜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성이 경고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마지노선이라고. 이 이상 그와 유대 관계를 쌓으면 시스템이 그를 처치하란 명령을 내릴 거라고. 그 누구와도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지 말고, 마음을 주지도 말라고.
적색 경보를 울리며 경고하는 게 아주 필사적이었다.
“왜 웃어요?”
지금 상황이 재밌나.
섬뜩하리만치 입꼬리를 올리니 투덜거리는 말이 들렸다. 사윤은 괘씸하기 짝이 없는 건주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걸 참고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나.
이렇게까지 우스운 일도 잘 없는데.
처음 한건주를 데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그를 죽일 자신이 있었다. 시스템이 놈을 처치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걸 예상하고 데려온 거였고 죽으면 장례 정도는 치러 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던 자신이 이렇게 망설이게 되다니.
시스템에게 굴복하듯 살고 나서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였던 적이 있던가.
그 노아를 죽이는 것마저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이 소년에게는 구원이었으니까. 타인은 타인이었기에 괜찮았고, 밤쥐 길드원들은 며칠 공허할 각오를 하고 보내 주었다.
그런데 한건주는 감이 안 왔다. 그를 죽이고 나면 얼마나 후회할 것이고 또 얼마나 가라앉을지 모르겠다.
그가 떠난 직후의 삶이 떠오른다. 죽은 것도 아니고 도망간 것만으로 몇 달을 재기 불능 상태로 있었는데 아예 죽어 버리면 견딜 수 있기나 할까. 아마 발에 추를 매달고 호수 같은 데 들어가 평생 익사와 부활을 반복하며 살지도 몰랐다.
어느새 그가, 그 정도로 커진 거다.
뭐가 그리 특별하기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냐고 하면 글쎄….
사윤은 종식이 할 법한 물음을 미리 던져 보고 고민했다. 한건주가 자신에게 특별한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가 자신의 동아줄이라서?
뭐 그것도 있긴 할 테고.
얼굴이 잘나서?
솔직히 죽이기엔 아까운 얼굴이고.
성격이 좋아서?
미쳤나. 그 이유였다면 차라리 이재희를 옆에 끼고 다녔을 것이다.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
이건 조금 솔깃한다. 한건주는 빈말로도 성격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앙칼지고 괘씸한 새끼였으나 그 성격이 별로인 건 아니었다. 성질머리야 가끔 물에 담그면 얌전해지니 논외로 두고 짜증이 날 때 미간부터 홱 찌푸린다든가, 즉흥적이지 않은 신중한 성격이라거나, 후회하지 않으려고 하는 강단 있는 점이나 다 괜찮았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실력도 좋지.
가끔. 아니, 자주 배가 아파서 구를 것 같긴 하지만 한건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이었고 거의 자란 지금은 누가 봐도 탐낼 만한 인재가 되었다. 죽이기 아까운 실력으로만 꼽자면 그가 탑티어였다.
그러나 그 많은 이유를 능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그냥.
그냥 그가 아까웠고, 아쉬웠고, 특별했다.
왜 그냥이냐면….
―크아아아아아!
생각을 파고들고 있으니 제게서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몬스터의 포효가 들렸다. 다른 헌터들도 그 울음을 인지한 건지 사윤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것을 멈추고 무기를 치켜들었다. 쿵쿵! 멀리서부터 누군가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존재감이 심상치 않다. 필시 스콜피언의 다른 각성자를 삼켰다는 그 괴물일 거라 오라는 듯 입꼬리를 올린 사윤이 한건주를 돌아보았다.
얼음 지대가 울릴 정도의 진동이 일고 있는데도 줄곧 주인 따르는 개새끼처럼 저만 보고 있던 건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문득 그냥이라는 말 아래에 파묻힌 기억들이 활자를 가르고 솟아 범람했다.
줄곧 시스템에게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희망을 발견해 기뻤다. 그게 활력이 되어 몸을 움직이도록 했고 멈췄던 행복 회로를 조금이라도 돌아가게 만들어 주었다. 게이트를 돌아다닌다고 바빠 필요 없는 살상을 하는 일도 줄어들었고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충언을 하는 이들은 다 죽은 줄 알았는데 한 명이 생겨 죽이지 말라고 의문을 제시하고 지적을 뱉어 도덕의 선을 다시 가늠하게 했다. 비밀을 들킬까 긴장했고 상대의 생각을 모르겠어 짜증이 났다. 그러다 하는 행동이 우스워 별생각 없이 웃을 때도 있었다.
전부 한건주를 만나고 겪은 일이었다.
거기에 한건주와 노아. 그 두 사람과 함께한 기억은 지난 10년의 기억을 다 뒤집어 봐도 없을 만한 추억이었다. 솔직해지자. 그땐 조금 평화롭고 재밌었던 것 같다. 마음이 편했던 순간이다.
사윤은 이 모든 걸 뭐라고 부르는지 알았다.
삶이다.
자신이 잃어버렸던.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고, 사고하며 살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날 위해… 우는 사람도 생기는.
평범하진 않더라도 절망적이진 않았던 삶이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왜 자신이 그를 곁에 두는 데 사력을 다하는지, 왜 그가 특별했는지. 감정이 마모되고 나서 보이지 않았던 제 속이 처음으로 명료하게 보였다.
한건주를 만나고서 빼앗겼던 삶을 되찾았으니 그걸 놓치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도망가고 그렇게 낙심했나 보다. 잃었다가 되찾은 것이 다시 손에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기분이란 처참했으니까.
…내 삶을 사는 데는 실패했으니 내 또 다른 삶이 됐던 너라도 살려야지.
너라도 살아야지.
그래서, 너라도 내가 살았다는 그 흔적을 이어 가 봐야지.
그런 생각들이 이어져 못 죽이는 거였다.
그것들 때문에 자신이, 그에게만 유독 약한 것이다.
아, 머릿속이 명쾌해진다. 다시 세이렌의 이어링을 낀다 해도 걱정할 게 없을 만큼 속이 시원해졌기에 사윤은 제 기운을 깨닫고 늪의 저편에서 살기를 퍼부어 대는 게이트 안의 존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떴다. 놈이 뿜어내는 기파가 바람이 되어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한다. 사윤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날리는 그 상태로 푸른빛을 머금은 흑안 가득 건주를 고여 내며 웃었다.
“재밌네.”
“……?”
“나가면 데이트라도 할까, 건주야.”
“…게이트요?”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시답지 않은 말장난을 하고 또 말장난을 받아 준 사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망령의 늪에서 나가면 우선 한건주의 실력부터 최대한 끌어올려야겠다. 그가 시스템이 아닌 존재에겐 두 번 다신 위협을 받지 않도록 말이다.
“아….”
늘 공허하게 텅 비어 있던 속이 충만할 정도로 잔뜩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찰나간 목을 옥죄어 오는 시스템도, 정신을 압박해 오는 죄책감도 잊은 사윤이 환히 웃었다.
잠시일 뿐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사윤은 정말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만큼은 너무나도 만족스러웠기에 이만 죽고 싶었다.
모든 걸 이기적이게 놓아두고 외면한 채로.
입에서 단맛이 나 정신을 되찾은 사윤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한낮의 꿈처럼 단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