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86)화 (186/266)

제186화. 꼬리잡기 (3)

<조건을 충족해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의 등급이 성장합니다!>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성장형 A+)]

연구를 통해 팔실로쿠스를 만들어 냈던 팔실로의 결혼반지. (유일) (귀속형)

-페어링을 나눠 낀 상대와 함께 있을 경우 전투 능력 30% 상승

-마나 회복 속도 10% 상승

-민첩함 10% 상승

-페어링을 나눠 낀 상대의 피가 30% 이하로 떨어질 경우 페어에게 알림이 갑니다.

-페어링을 나눠 낀 상대와 마나 및 체력의 총량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단 접촉 시에만 공유 가능합니다.

-미개방(S랭크에 개방)

“…….”

페어링을 낀 사람이 둘이었기 때문에 푸른 시스템창은 건주와 사윤 둘 모두에게 떴다. 경직된 시선으로 시스템창을 확인한 사윤은 느지막이 고개를 돌려 건주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도 자신과 같이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 승급에 대한 알림을 살피고 있었다. 그것이 이 상황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했다. 자신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만든 쓸모없는 상상 따위가 아니라 현재임을.

휘청,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시발.

심장이 떨어지다 못해 처참히 난도질당했다가 이어 붙여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린 사윤이 이마를 붙잡고 건주를 흘겨보았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틀림없이 강제 집행이 뜰 거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으니까.

그건 10년 동안 몸에 아로새겨진 경험으로부터 학습된 추측이었고, 어찌 보면 예정된 결말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죽었지 않은가.

지금은 운이 좋아 한 번 피해 간 거란 생각이 드니 몸을 바로 세우기가 힘들었다. 건주가 휘청거리는 사윤을 붙잡기 위해 팔을 뻗은 순간이었다.

“……!”

눈을 부릅뜬 사윤이 뻗어지는 남자의 손을 쳐 냈다. 체온을 품고 있던 손이 차갑게 내쳐져 허공에 떨어졌다.

놀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사윤은 그 시선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다.

만약 이번에 뜬 시스템창이 페어링 승급 따위가 아니라 한건주를 살해하라는 퀘스트였어 봐라. 지금처럼 자신과 그가 마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순간이 과연 올 수 있을까?

다문 입술 속에서 치아가 서로 부딪혀 몇 번 딱딱거렸다. 정신이 혼곤했다.

사윤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쳐 건주에게서 멀어졌다. 당황한 눈동자는 여전히 제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불편했다. 아니, 정확히는 두렵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언제부터지?

언제부터, 네가 내 약점이었지.

언제부터 네가 시스템에 노출된 거지.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한건주의 앞에 수상한 시스템 알림창이 나타났다는 그때부터.

왜 더 파고들지 않았을까. 왜 더 의심하지 않았을까. 평범한 시스템창이 자신에 대해 알아보라고 부추길 리가 없는데.

뒤늦게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자각하고 나선 이미 끝이다. 시스템은 판을 깔아 두었고 그 위엔 두 개의 말이 올라가 있었다. 하나는 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건주일 터였다.

낭패다.

실수를 인지한 사윤이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건주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마음이 울렁거리고 참담했는데 어떤 감정인지 제대로 직시할 수 없었다. 희미하게 후회와 공포가 가장 크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죽였어야 했다. 아니면 그를 끌고 오지 말았어야 했다. 둘 중 하나라도 했으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잊고 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 발목을 잡고 숨통을 조일 일도, 이렇게 무너질 일도 없을 텐데.

너무 안일했다. 시스템이 최근에 강제 집행 퀘스트를 부여하지 않아서, 놈이 원하는 만큼의 악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너무 해이해지고 말았다.

“길드장님.”

충격에서 벗어난 건지, 정신을 차린 건주가 질리지도 않고 다시 사윤에게로 다가왔다. 물러선 만큼 도로 거리를 좁히려 하는 태도에 사윤은 다시 걸음을 물렸다.

“왜 자꾸 도망가요?”

건주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게 뭐가 겁나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사윤의 태세 변환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사윤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치미는 감정을 삼켰다.

내가 겁을 안 내게 생겼니.

말은 치솟기만 할 뿐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쿵쿵. 눈가에서 심장이 뛰는 듯했다. 머리가 울리자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위험하다. 이 이상 노래에 중독되면 혼절을 하든, 광폭화를 하든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손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한건주를 보고 안정됐던 조금 전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증거인 것만 같아 사윤은 웃고 싶어졌다.

이렇게까지 꼴사나울 수가 있나.

오랜만에 맛본 선명한 절망과 곧 닥칠 절망에 대한 공포가 썼다.

사윤의 몸이 추위를 타듯 파들거리니, 뭐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를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헌터들이 당황했다.

“뭐야? 얘 왜 이러지?”

미정이 처음 보는 사윤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고 이한과 호철 역시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평소라면 그 광경이 모두 시야에 들어왔을 테지만, 지금 사윤의 시야는 좁았다.

보이는 거라곤 한건주밖에 없었다.

아니, 정정한다. 누가 망령의 늪 아니랄까 봐 한건주의 뒤로 망령들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혼 같은 게 말이다.

‘사윤아.’

누가 제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꽤 오래된 기억인데.

부모님이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제 부모님은 10년도 더 전에 몬스터에게 뜯겨 죽었다.

‘권사윤.’

이번엔 또 누구 목소리지.

사윤은 헤매듯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희미한 혼들을 살폈다. 수가 무척 많았다. 몇 명쯤 되려나.

아아아―.

이어링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선명해진다. 이젠 세이렌의 노랫말이 무얼 흥얼거리는지도 다 들리기 시작했다. 청아한 음색은 절망을 읊고 자책을 종용했으며 충동을 부추겼다. 안개라도 낀 것처럼 사위가 뿌옇게 변했다.

“아….”

사윤은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맞춰 입을 달싹여 탄식했다. 한건주의 뒤에 있던 망령들이 제게로 걸어온다. 그 모습이 꼭 해일 같았다.

…몇 명이었을까.

여태껏 자신에게 휘말려 삶을 잃은 사람이 몇 명쯤 될까.

만 명이 넘어가면서부턴 하나씩 세지 못했다. 그러나 사윤은, 자신의 곁을 지키다 죽은 사람의 숫자만큼은 분명하게 셀 수 있었다. 부모님과 아저씨, 친구들과 제 비밀을 듣고 배신했던 그 모든 길드원까지.

거기까지 떠올리자 순식간에 코앞까지 들이닥친 파도가 온몸을 축축하게 적셨다. 뚝뚝, 머리부터 몸이 흠뻑 젖어 있으니 이번엔 수십 개의 무덤이 눈앞에서 생성되었다. 묘비에 적힌 이름들이 익숙하다. 부모님의 이름도 있었고 친구들의 이름도 있었다. 그때 이름이 적히지 않은 빈 묘비가 하나 보였다. 그곳에 한건주의 이름 석 자가 실시간으로 적히는 걸 목격한 사윤이 헉, 숨을 들이켰다.

겁에 질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자 몸의 중심이 휘청거렸다. 딱딱했던 얼음 발판이 사라져 있었다.

잠시 환각에서 벗어난 사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을 때 누군가 다급히 손을 뻗어 사윤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거기서부턴 얼음 없어요. 다 녹아서.”

속삭이는 듯한 음성은 미묘한 간절함을 품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눈치챈 사윤이 미친 듯이 저항했다. 초점이 엇나간 눈으로 발버둥 치는 사윤을 미정과 이한, 호철이 합세해 붙잡았다. 네 명의 S급이 달려들었지만 이성이 흐려진 사윤을 붙들기엔 무리였다.

드드드―.

사윤이 깔아 둔 서리 지대의 얼음 바닥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격동하며 얼음 파편을 만들어 냈다. 그것들이 마치 비수처럼 날렵하게 날아가 일행들을 공격했다. 호철과 이한이 급하게 방어 태세를 갖췄지만 느리다. 얼음 파편은 발포된 탄환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 일행들의 팔, 허벅지, 등에 꽂혔다.

“으윽!”

신음을 내지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얼음 파편의 공격 대상에는 한건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외 없이 스치는 파편을 맞고 피를 흘리게 된 건주가 사윤을 붙잡아 끌어당긴 다음 귀에 꽂힌 이어링을 매만졌다.

강제로 잡아 뜯으면 피가 날 거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억지로 뜯어내려고 하니 이어링이 빠지지 않았다. 조금 전 시도해 봤을 때보다 훨씬 과격한 힘인데도 그랬다.

아무래도 착용자만 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성과는 없고 사윤의 귀에서 피만 흐르게 만든 건주가 제 품에 들어온 몸을 껴안고 그를 불렀다. 길드장님이라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형이라고도 불러 봤지만 여전히 초점이 돌아오질 않는다.

“미치겠네.”

작게 중얼거린 그가 사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권사윤!”

윽박이 꽂혔다. 양 팔뚝이 거칠게 붙잡혔고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눈은 뜨고 있되 현실이 아닌 그 너머의 것을 보듯 흐릿한 초점을 유지하고 있던 사윤은 벼락같은 목소리가 꽂히고 나서야 눈꺼풀을 슴벅거려 시야를 명료하게 만들었다. 다급한 표정의 남자가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다.

“정신 좀 차려 봐요, 제발.”

이러다 다 죽게 생겼다고요.

서리 지대는 이미 반 이상 무너져 내렸다. 사윤과 일행들이 딛고 있는 땅도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어 호소하듯 말한 건주가 사윤의 표정을 살폈다.

“저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 거라면 우선 제가….”

제가 빠질게요.

얼굴을 엉망으로 구기며 말한 건주가 사윤을 놓아주었다. 그때였다.

“…아!”

사윤의 손이 다시 건주를 붙잡았다. 민첩한 움직임만큼 힘이 거셌던 건지 손목이 부러질 기세로 붙들린 건주가 신음을 뱉었다.

“시발.”

낮은 욕설이 간극을 가른다. 그 말에 미정을 비롯한 노아 소속 헌터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신경질이 잔뜩 담긴 욕설은 사윤이 정신을 차렸다는 걸 뜻했으니까.

“…아오, 시발. 이래서 아이템 하나 잘못 끼면 골로 가지.”

몇 번 눈을 끔뻑였다가 세이렌에게 반쯤 잡아먹혔던 이성을 되찾은 사윤이 험악하게 중얼거리며 푸른 이어링을 잡아 뜯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핏물을 신경도 쓰지 않은 사윤이 건주의 가슴팍을 툭 밀쳐 냈다.

“비켜 봐라, 예쁜아. 일단 수습부터 하게.”

“…잡고 있는 건 길드장님인데요.”

“어?”

무슨 황당한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건주가 시선을 아래로 흘겼다. 그 행적을 따라간 사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건주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제 다른 손을 발견하고 눈동자의 크기를 키웠다.

뭐야.

내가 얠 왜 붙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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