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84)화 (184/266)

제184화. 꼬리잡기 (1)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 네가 스콜피언인 건 확실하다는 거지?”

“예, 예….”

확신을 얻기 위해 되묻는 미정을 향해 얼굴이며 목까지 눈물범벅이 된 남자가 형편없는 꼬락서니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죽을 처지임을 깨닫고 최대한 가련하게 보이려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어 입꼬리만 살짝 올린 사윤이 남자의 머리채를 놓았다.

“척 보기에도 맹하게 생긴 게 아무리 봐도 스콜피언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 스콜피언에 가입했지?”

“도, 돈이 필요했어요!”

“돈?”

사윤이 고개를 외로 꼬았다. 남자가 바짓자락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손을 뻗어 기어 왔다.

“스콜피언이란 곳에 가입하면, 돈을 준다는 얘기가 있어서….”

“스콜피언에 가입하면 돈을 준다고?”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사윤이 아는 스콜피언은 길드원의 돈을 뜯으면 뜯었지, 가입한다고 해서 돈을 나눠 줄 만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대체 어떤 사이비 단체에 가입한 건가 싶어 기막혀하고 있으니 남자가 억울한 표정으로 설명을 보탰다.

“지, 진짜예요! 저도 우연히 듣고 설마 해서 찾아갔는데 정말로 가입금으로 천을 줬다고요…. 듣기로는 지금 제 등급이 8등급이라고 했어요. 사람 열 명 이상을 데려오면 7등급으로 올려 준다고 했고 등급이 올라갈 때마다 가입금의 제곱이 되는 금액을 받는다고…. 제 친구들이랑 저는 거의 8등급, 7등급이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6등급이 되고 나서부턴 보수가 걸린 임무도 준다고 했던 것 같아요.”

“…다단계 아니야?”

“그러게 말입니다.”

미정이 꺼낸 말에 이한이 동의를 표했다. 반면에 별 반응을 하지 않은 사윤은 남자의 얼굴에 새겨진 문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5년 전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스콜피언의 문신이 맞다. 허접하지 않은, 진짜 문신이다. 간혹 스콜피언의 맹렬한 추종자들이 그들과 같은 타투를 새기긴 했지만 스콜피언 길드원과 일반인이 새긴 타투는 차이가 컸다. 스콜피언 놈들의 문신은 각성자가 힘으로 각인시킨 문양이었으니까. 스콜피언의 추종자도, 그 길드원들도 숱하게 보았던 자신이 그 차이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이건 놈들의 문양이 맞았다. 각인을 전문으로 하는 각성자가 새긴 스콜피언의 문양. 그렇다는 건 눈앞의 남자가 정말로 스콜피언과 계약을 맺었다는 말인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인생 만사는 새옹지마라더니 설마 스콜피언이 다단계 단체로 전락해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다단계는 속임수겠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어. 7등급과 8등급은 단순히 줄어든 세를 다시 확장시키기 위한 미끼일 뿐이고 6등급부터 녀석들의 정식 길드원으로 취급되겠지. 1등급이 간부쯤 되려나? 최소 3등급 이상. 그 라인에 스콜피언 원년 멤버들이 모여 있겠어.”

조금 전 남자의 얘기를 통해 스콜피언 놈들이 새로운 길드원들을 모아 부활을 노리고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아니, 놈들은 이미 부활한 것과 다름없다. 은밀하게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고 이번 사건을 통해 존재감을 알렸다. 부활을 마친 녀석들이 노리는 건 날개를 뻗을 타이밍이다. 진흙 속에 처박혔던 전갈이 다시 돌아왔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그러니 한건주를 납치하는 계획을 세웠겠지.

노아가 아델리아의 무덤을 공략하기로 했다는 건 세계적으로 알려질 사안이었다. 어떻게 정보가 벌써 새어 나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의 냄새를 맡은 스콜피언 놈들이 노아가 출발하기 직전 한건주를 납치해 노아에게 갈 스포트라이트의 일부를 자신들에게로 돌렸다. 그 시점에서 놈들의 계획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 하필 한건주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놈들은 한건주라서 노린 게 아니라, 노아의 멤버 중 가장 약할 것 같은 멤버를 노린 거였다.

“그래서 아델리아의 무덤에 끌고 온 거였나.”

같은 범죄 길드였기에 알 수 있었다. 일 처리하는 방식이 자신과 비슷했기에 헛웃음을 흘린 사윤이 고개를 치켜들어 망령의 늪을 바라보았다. 얼음이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죽은 자들이 가득한 곳, 망령의 악의와 악취로 가득한 공간. 이 공간에 스콜피언 놈들이 한건주와 함께 진입한 이유야 뻔하다.

‘청소’인 거다.

한건주는 물론이고 이번 일에 개입했던 길드원들까지 모두.

사윤도 으레 써먹곤 했던 방법이었다. 시체 처리나, 쓸모없게 된 인질, 적대 길드의 수를 대량으로 줄일 때 사용했던 방법. 게이트에 사람을 밀어 넣고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는 것만큼 손쉬운 뒤처리가 없었으니까.

흘러간 시선이 움찔움찔 떨고 있는 남자에게로 닿았다. 한숨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이건 버리는 패라는 건가.

3년 전 스콜피언이 완전히 와해되면서 놈들의 세력은 지독하게 약해졌다. 그 일로 경계심이 올라갔을 놈들이 이토록 쉽게 자신들의 본거지와 정예 길드원을 노출시킬 리 없었다.

그러니까 놈들은 버리는 길드원을 이용해 한건주를 납치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그 일에 이용해 먹은 모든 사람을 이 던전 안에서 치우려고 한 것이다. 그러다 미처 치우지 못한 길드원들이 제 눈에 발견된 거고.

악랄하기도 하지.

과연 눈앞의 허접한 스콜피언과 달리 5년 전 블랙 구역을 통째로 집어삼켰던 놈들다웠다. 사윤은 멍청하게 스콜피언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이 일에 휘말린 것으로 보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천재의 눈을 사용하기엔 아깝지.

“등급이 뭐야?”

“예? 저, 저는 8등급….”

“그거 말고 새끼야. 네 각성자 등급 말이야.”

“아…. A급입니다.”

“이름은.”

“석지환이고요….”

“잠시만요. 여기서 호구 조사를 왜 해요? 설마 길드원으로 들일 생각이에요?”

등급부터 이름, 나이, 주요 능력 등을 캐내려 하고 있으니 건주가 다가와 사윤의 팔을 붙잡았다. 자기를 죽이려던 사람을 지금 길드원으로 들일 거냐는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그에 기가 막혔다. 평소에는 눈치가 빠르더니 이런 쪽으로는 왜 또 둔한 건지.

“무슨 소리야? 신분은 알아야 죽이고 나서 지금까지의 행적을 추적하거나 할 거 아니야?”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니 눈앞에 있던 남자가 몸을 움찔 떨었다.

“…진짜로 죽이실 건가요?”

스스로를 석지환이라 소개한 남자가 간절한 시선을 던졌다. 사윤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자신이 한건주에게 친절해서 그런가. 눈앞의 남자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은 그리 착한 사람도 아니고, 너그러운 편도 아니다.

잘못 휘말렸든 고의가 아니었든 그가 한건주를 납치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그를 살려 둘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설령 살려 준다고 하더라도 그에겐 그리 좋은 결과가 아닐 거였다.

“어차피 나 아니었어도 너 여기서 죽어. 다른 놈들도 다 여기 괴물한테 휩쓸려 죽었다며? 넌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았던 거고. 솔직히 내가 잡아 둔 거 아니었으면 그 허접한 망령한테 홀려서 이미 죽은 상태였을걸.”

무감하게 툭 던진 말에 남자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다만 억울하다는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주먹을 움켜쥔 채 파들파들 떨고 있는 남자를 무신경하게 응시하자 남자의 얼굴이 더욱 울적해졌다. 사윤이 그렇게 억울하면 이상한 길드에 가입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충고하려던 찰나였다.

“…그래도 죽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정도 딱해 보이는데 괜찮다면 제가 협회로 데리고 가죠.”

지환이 애원하고 사윤이 그걸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상황의 반복을 지켜보고 있던 이한이 나섰다. 지환, 이한. 이름이 비슷하다고 뭔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사윤은 성자 행세를 하는 이한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마음대로 하든가. 어차피 아는 것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딱 보기에 버리는 말로 쓰여 영문도 모르고 이 게이트에 함께 끌려온 놈이다. 그런 놈이 뭐 아는 게 있겠는가. 기껏 해 봐야 조금 전 설명했던 스콜피언의 구조에 대한 게 전부였다.

“미리 경고하는데 산다고 해서 다 좋진 않을 거다.”

사윤이 눈을 반짝 빛내고 있는 지환을 향해 가볍게 충고했다.

천만 원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스콜피언이 정말로 뭣도 아닌 각성자에게 그만한 금액을 쥐여 주겠는가. 달콤한 미끼로 꿰어 냈다가 버리는 거다. 그에게 준 천만 원도 스콜피언 놈들이 다시 회수할 게 뻔했다. 어쩌면 이미 회수당했을 수도 있었고.

돈이 필요해서 목숨 걸고 단체에 가입했던 놈이, 여기서 목숨을 부지한 채 나가 봐야 여기나 밖이나 지옥일 것이다. 목숨 팔아 구한 돈이 다 사라졌을 텐데 절망감이 오죽하겠는가.

따라서 사윤이 그를 여기서 죽도록 내버려 둔 건 나름의 자비였다. 이한 같은 위선이 아닌.

이한 역시 헌터 업계에서 나름 잔뼈가 굵은 놈이다. 제 형이 세웠던 길드를 물려받아 입지도 탄탄했고 그의 형이 헌터들에게 죽었기에 헌터란 족속들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도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스콜피언 놈들이 이미 지환에게 준 돈을 회수하고도 남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목숨을 구해 주겠다고 나서는 게 위선이 아니면 뭔가?

살게 해 줬으면 살아갈 수 있을 만한 동력도 함께 줘야지.

무엇이든 엔진이 다하면 움직이지 않기 마련이다. 사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한을 구원자 보듯 감격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지환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고 불편한 마음을 삼켰다. 그런 제 심기는 어떻게 눈치챈 건지 건주가 왜 그리 표정을 구기고 있냐고 물었다. 사람을 잘 관찰한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런 변화를 하나하나 다 캐치해 내는 걸 보면 그도 어지간히 제 곁에 오래 붙어 있긴 했나 보다.

물론 붙어 있던 기간보다 떨어져 있던 기간이 더 긴 것 같긴 했지만.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요. 저 사람이 속한 단체 때문에 그래요? 스콜피언이란 게 대체 뭐예요?”

“아.”

얘는 아무것도 모르나?

스콜피언의 이름은 5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밤쥐보다 더 유명했다. 그러나 한건주는 원체 헌터 업계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고, 세상만사에 그리 지대한 관심을 쏟지 않는 편이었으니 모를 순 있을 것 같았다.

하긴,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리 무리도 아니지.

갓 각성했다는 걸 고려해 보고도 헌터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헌터 업계에 대한 시각이 순수하기 짝이 없던 건주를 기억해 낸 사윤이 스콜피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쓰레기 범죄 길드였던 놈들이 하나 있어.”

“…….”

“왜 그래?”

“밤쥐 길드 얘기인가 싶어서요.”

이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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