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아델리아의 무덤 (8)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에서 으득으득 작은 얼음 조각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서리 지대가 불러일으킨 혹한이 늪을 덮치며 생성된 얼음 조각들이었다. 얼어붙은 늪에 타격을 주지 않을 만큼 속도를 높여 뛰는 사윤을 따라가던 호철이 냉기 저항 아이템을 추가로 차곤 입김을 내뱉었다.
“악명에 비해 생각보다 잠잠한데?”
그 아델리아마저 죽여 아델리아의 무덤이란 이름이 붙은 게이트다. 모두가 공략 시작과 동시에 엄청난 군세의 몬스터가 들이닥치리라 예상했지만, 막상 들어와 본 게이트 안에는 망령도, 몬스터도 없었다.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직 초입이라서 그런 건가?
망령의 늪 게이트는 멸망한 세계와 꽤 비슷한 규모다. 필드의 모든 곳에 몬스터가 있지 않은 것처럼 망령의 늪에도 몬스터들이 나오지 않는 구역이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자신이 깔아 둔 서리 지대가 몬스터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고.
사윤은 정확한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서리 지대 영향권 밖에 있는 늪을 살폈다. 멀찍이서 펼쳐진 늪의 풍경이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녹색의 물에 검은 기름을 쏟아부은 듯 탁한 늪이 가열된 솥 안에 들어간 수프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끓어?”
게이트에 막 들어온 당시엔 훈기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늪이 뜨거워서 끓는 건지 늪 아래의 어떤 존재가 영향을 끼친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나 확실한 건 저 장소부터 늪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거였기에, 사윤은 서리 지대의 영역을 확장시킬 생각으로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게이트 안의 영역이 워낙 광범위했기에 주변을 모두 얼리려면 방대한 마나가 필요했다.
콰드드득.
신발 아래에서부터 재차 서리의 기운이 눈보라처럼 일었다. 검은 눈이 푸르게 변하며 늪의 기운을 강제로 짓누르고 표면을 얼렸다. 폭군 같은 기세였다.
직선으로 5킬로미터.
포션 한 병으로 그만큼의 영역을 확대한 사윤이 흘러내린 식은땀을 무신경하게 닦고 땅을 박찼다. 미정이 그 모습을 곁눈질로 훑다가 호철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뻑 소리 나게 찍어 댔다. 그 옆에 있는 이한이 몸을 고꾸라트린 호철을 보고 놀라 흠칫거렸다.
“눈치 없기는. 아직 뭐가 없는 게 아니라 쟤가 막고 있는 거 안 보여? 고마운 줄 알아.”
호철이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언급하며 타박한 여인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서서히 얇아지고 있는 얼음 아래로 녹색의 늪이 비쳤다. 척 보기에도 아슬아슬한 두께였다.
“이거 잘못하다가 깨지겠다?”
혼잣말로 중얼거린 그가 사윤을 쳐다봤다. 이전보다 서리 지대의 지속 시간이 줄어든 것 같다는 물음을 받은 사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영역이 넓어서.”
많은 영역을 모두 서리 지대로 만들려다 보니 하나하나 강하게 유지하기 힘들었다. 기운을 퍼트린 범위가 얼마인데 강도까지 신경 쓸까.
빙결이 주 스킬인 헌터들 두 명을 데리고 와도 이만큼의 영역을 얼리긴 쉽지 않을 거라 납득한 미정이 사윤의 상태를 살폈다. 1인 헌터가 이만한 영역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범위까지 넓히고 있다. 몸에 부담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사윤의 턱을 타고 식은땀이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기에 대충의 사태 파악을 마친 여인의 눈동자에 걱정이 스며들었다.
“땀이 너무 많이 나는 거 아니야?”
그건 사윤을 향한 온전한 걱정이기도 했고, 그를 잃었을 때 노아가 입을 피해에 대한 계산적인 걱정이기도 했으며, 사윤의 전력이 예상보다 떨어질 경우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걱정이기도 했다. 꽤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한 걱정을 전달받은 사윤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나가 찰 때마다 극한으로 뽑아 쓰고 있는 탓에 심장이 쿵쿵 격동하긴 했다. 그러나 아프진 않았다. 그거면 됐다. 식은땀이 뭐 대수인가.
“거슬리는 통증만 없으면 돼.”
“너, 그 아티팩트….”
사윤이 버릇처럼 귀에 걸린 이어링을 매만지며 대답하자 순간적으로 그 손길을 따라간 미정이 이어링을 포착하고 으르렁거리듯 얘기했다. 아차 싶은 사윤이 모른 척 손을 내렸으나 상대는 상인 길드의 수장인 미정이다. 이 아이템이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정의 시선이 타박하듯 거칠어졌다. 사윤은 세이렌의 노랫말이 쉼 없이 들리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혼탁해지려던 눈동자의 초점을 익숙하게 바로잡았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연예인 걱정보다 더 쓸모없는 게 내 걱정일 테니까. 내 아이템 내가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왜.”
핀잔을 들어 줄 마음이 없어 선수 치자 사윤이 세이렌의 현혹을 떨쳐 내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미정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부분의 헌터들이 마흔까지도 못 버티고 일찍 죽는 이유가 뭔지 아니? 너 그렇게 혹사시키다 수명 줄어.”
“줄면 좋고.”
“……?”
협박하듯 뱉은 말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태연하니 여인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볼 때마다 꼭 죽고 싶은 사람처럼 말하는군.”
이한이 그럴듯한 의심을 흘렸다. 사윤은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미정의 말마따나 서리 지대의 지속 시간이 짧아지고 있었다. 언제 얼음이 깨지고 늪으로 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유지되고 있을 때 빠르게 이동해야 했다.
빠드득!
얼음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자 세 각성자들의 뜀박질도 반사적으로 빨라졌다.
“땅도 얼리고 몬스터도 막고, 아까부터 납치당한 놈 찾으려고 그 이어링을 낀 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느껴지는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호철의 계산적인 걱정이 떨어졌다. 뒤이어 미정도 한마디 했다.
“…이 앞부터는 서리 스킬 쓰지 마. 비행 스킬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면 늦어.”
사윤도 무턱대고 서리의 기운을 퍼트린 건 아니었다. 이만한 영역에서 서리 지대를 활성화시키면 몸에 무리가 간다는 것쯤이야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무식하게 마나를 뿌리면서 달릴 바엔 비행 스킬을 이용해 공중에서 몬스터들과 전투하며 나아가는 게 더 나을 거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리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
한건주.
그가 잡혀 있지 않은가.
S급이 되었다곤 하나 사윤이 보기에 한건주는 아직 애새끼였고, 스콜피언 같은 범죄 경력이 진득하고 성격 자체가 괴팍한 놈들을 상대하기엔 부족했다.
놈들이 얼마나 잔혹하고 집요한 놈들인지 사윤은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즉사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마음이 급해지는 거다.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은 아직까지 잠잠했으나 즉사라면 신호가 오지 않을 테니까.
자신의 안정을 바라거나, 제가 무리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서둘러 한건주를 찾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다.
“찾을 때까진 이대로 가. 쓸데없는 데 할애할 시간 없으니까.”
“전투광이 웬일이래….”
꾸짖는 듯한 어투였으나 미정은 이내 수긍했다. 어찌 됐든 이 파티에서 가장 강한 것도, 이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키도 사윤이었으니 일단은 따르겠단 태도였다. 네 사람의 감각에 동시에 한 존재의 기운이 잡힌 건 그때였다.
“……!”
대화를 하면서도 탐지 영역을 확장시켜 주변을 경계하는 걸 잊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 막 무언가 헌터들의 탐지 센서에 걸렸다. 무언가 있음을 파악한 네 사람이 땅을 도약해 기운이 느껴진 곳으로 내달렸다.
서리 지대 밖의 기운이다.
남들보다 기민한 감각으로 그 위치를 정확히 탐지해 거리를 좁힌 사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운의 주인을 발견했다.
서리 지대가 끝나고도 1킬로미터쯤 더 가면 나오는 장소에서 웬 남자가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싸우는 상대에게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 하니 언데드일 가능성이 높았다.
망령의 늪이란 이름값은 한다는 건가.
지금까지는 사윤이 얼음으로 막아 놔 올라오지 못했던 늪 속의 망령이 저기서부터 기어 올라오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늪이 끓고 있던 건 망령이 나타나기 이전의 전조 증상일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파악했으니 이젠 남자의 정체를 확인해 봐야 했기에 눈을 가늘게 떴다. 거리가 멀어 인영 말곤 보이는 게 없어 속도를 올리자 미정과 호철, 이한이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마침내 사윤의 시야에 남자의 모습이 선명히 들어왔다.
일단 한건주는 아니다.
로브를 쓰고 있는 차림새를 보아 하니 제가 찾던 이는 아니었기에 입술을 으득 씹던 그때 전투로 일어난 바람에 남자의 로브가 넘어가며 그 얼굴이 드러났다. 금발에 흰 피부를 가진 이국적인 외모의 남성이었다. 전형적인 서양인의 얼굴이었으나 사윤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자의 광대에 전갈 그림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모를 수가 없는 문신이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저 문신을 지닌 자들과 몇 년을 힘겨루기하며 싸워 댔는데.
스콜피언 놈이다.
단번에 남자의 정체를 파악한 사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3년 전 와해된 길드의 망령이 다시 등장했다. 겁도 없이 제 한건주를 부활 제물로 삼으며 말이다.
“누울 자리도 보고 발을 뻗어야지….”
“뭐?”
“스콜피언이다, 준비해.”
사윤은 아직 상황 파악을 끝내지 못한 세 헌터들에게 미리 언질을 준 다음 날쌘 짐승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황당하게 보던 미정이 호철과 시선을 교환했다.
“마음도 급하지. 자기 혼자 튀어 나갈 거면서 뭘 준비하래, 쟤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말에 호철이 동감했다.
“지독하게 독선적이군.”
이한이 나무라듯 중얼거리는 사이 사윤은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여 전투 중인 남자에게 접근했다.
은신 스킬을 써서 몸을 숨겼고 암살 스킬을 사용했다. 연이은 서리 지대 형성으로 마나가 바닥을 보이는 상황이었기에 조건이 충족되며 특전인 기습의 귀재가 활성화되었다.
<특전 ‘기습의 귀재’가 활성화됩니다. 표적이 당신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할 확률이 60% 상승합니다.>
말이 60퍼센트지 사실 사윤보다 등급이 높은 헌터가 아니라면 접근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거였기에 100퍼센트나 다름없었다.
“으아아악!”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은신과 기습의 귀재 특전을 믿고 전력으로 움직인 암살 능력자가 야차처럼 달려오고 있는 줄도 모르는 남자는 욕을 지껄이며 망령과 싸우고 있었다. 사윤은 눈동자를 살짝 굴려 앞으로 싸우게 될 망령의 상태도 확인했다. 딱히 강한 놈은 아닌 건지 특별한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눈앞의 남자를 상태 이상에 빠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발!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남자가 초점이 나간 상태로 허공에 칼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그의 검은 단 한 번도 눈앞의 망령에게 닿지 못했다. 킥킥킥, 망령은 자신이 혼란에 빠트린 상대를 보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들린 건지 남자가 포효하듯 기합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온 정신이 환각과 망령에 사로잡혀 기습 따윈 상상도 못 하고 있는 상태.
잘 차려진 밥상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세이렌의 노랫말을 내성으로 가볍게 무시한 사윤은 곧바로 남자의 뒤를 선점해 끌어안듯이 손을 둘러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라인에 단도를 박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