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아델리아의 무덤 (7)
협회와 정부의 허락하에 전용기를 띄워 베를린으로 이동을 마치기가 무섭게 경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버릇처럼 해 대며 늘 통보식으로 문자나 하던 그가 직접 전화를 줬다는 건 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머리가 아파 신경질적으로 흑발을 쓸어 넘긴 사윤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말해.”
-형님, 한건주 납치한 쪽 스콜인데?
“뭐?”
언성이 절로 높아졌다. 고함과도 같은 대꾸에 베를린 헌터 협회에서 나온 안내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노아 팀이 눈짓을 주었다.
‘왜 그래?’
미정이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구태여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한건주가 납치당했다는 걸 널리 알려 좋을 건 없었다. 적어도 해외에서만큼은 한건주의 납치 소식이 퍼지지 않았기에 혀를 찬 사윤이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낮췄다.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콜피언이 갑자기 왜 나와? 게네 3년 전에 활동 중단했을 텐데.”
한참도 전에 업계에서 사라진 놈들이다. 갑자기 나타날 이유가 없어 묻자 핸드폰 너머의 경진이 답답해했다.
-나도 그거 때문에 전화했지. 긴가민가했는데 아무리 봐도 스콜피언이거든. 최근에 그쪽으로 연락 닿은 애 없어? 아니면 새로 원수진 놈이 생겼다든가.
“…원수야 늘 지고 살지.”
이름을 들어 봤다 싶은 헌터 중에서 제게 유감이 없는 헌터를 찾는 게 더 빠를 거였다. 사윤은 영양가 없는 정보를 공유하는 대신 경진의 조사를 의심하는 걸 택했다.
“스콜인 거 확실해?”
-형님 나 못 믿어?
“다른 녀석이 스콜인 척 개수작을 부렸을 확률도 계산해 봐야지.”
5년 전 그 이름값이 얼마나 컸던가.
그때는 사윤이 밤쥐를 만들고 막 1년이 지났을 때라 범죄 길드 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미국의 갱단이자 헌터용 마약까지 매입하던 범죄자 길드인 스콜피언이었다. 흉악범들만 모아 놔 질이 떨어졌던 건 물론이고 최대 규모의 범죄 길드라 미국 협회도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진압을 시도하는 순간 근방의 민간인들까지 모두 학살해 버리는 반인륜적인 놈들을 어떻게 손대겠는가.
오죽하면 미국 정부에서 직접 구역을 나눌 정도였다. 시민들의 안전이 확보될 수 있는 그린존과 스콜피언이 돌아다니는 블랙으로.
그 블랙에서 영역 다툼을 진저리 나게 벌였지.
범죄 길드라는 말이 무색하게 지금의 밤쥐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가진 이가 몇몇 있는 건 그래서였다. 사윤이 2년을 내리 스콜피언과 자리싸움을 해 놈들의 행포를 막았고 스콜피언의 수를 줄여 갔으니까. 그걸로도 모자라 스콜의 수장인 데른의 목을 떨어트리기까지 해 당시 블랙에서 몸을 사리며 살던 헌터들은 축제 분위기였다고 했다. 사윤은 시스템 명령 때문에 그 짓을 한 거였는데 얼결에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범죄 길드가 세대교체되었고 암시장을 포함한 모든 것이 밤쥐를 기준으로, 정확히는 사윤을 기준으로 돌아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밤쥐라고 해서 딱히 선한 길드는 아니었지만 걸핏하면 심심하다고 아무나 죽이고 영역을 불법 점령하며 성매매를 성행시키는 흉악범 단체보단, 수장의 정체는 모르겠다만 간헐적으로 테러 몇 번만 일으키고 민간인을 해치는 비율보다 헌터를 해치는 비율이 높은 밤쥐를 차악이라 생각하고 기꺼워하는 이가 많았다. 스콜피언이 다시 부활할 바엔 밤쥐의 장기 집권을 바란다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부류의 사람이 있다면 그 대척점에 서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스콜피언은 놈들의 수장인 데른이 죽으면서 와해됐지만, 비틀린 충성심으로 그들을 좋아하며 스콜피언의 부흥을 노리는 미친놈들이 몇몇 있었다. 이유야 뻔했다. 마약 거래를 일삼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슬럼에 버려진 대부분의 쓰레기 헌터들은 스콜피언의 손에서 탄생되었다. 약을 공급해 주던 조직이 사라졌으니 약쟁이들이 눈 돌아가 놈들의 부흥을 돕겠다며 미친 짓을 해 댄 게 3년 전까지만 해도 일상이었는데 어느 순간 돌연 사라지더니 갑자기 스콜피언의 행각으로 보이는 한건주 납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홀연히 사라졌던 그 광신도들이 다시 나타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짚어 주자 경진이 침음성을 흘렸다.
-지금까지 남은 행적으로 조사해 봤을 땐 스콜일 확률이 높긴 해.
“어느 정도인데.”
-7할.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거의 확신한다는 거네.”
사윤이 미간을 좁혔다. 단순히 노아의 자리를 탐낸 헌터 하나가 이성을 잃고 벌인 미친 짓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게 3년 전 무너졌던 스콜피언의 재부활을 알리는 시도라면 전자의 경우보다 훨씬 머리 아팠다.
세력 싸움을 관둔 지가 언젠데.
밤쥐의 부피가 커지고 사윤이 명실상부한 비공식 랭커 최상위로 자리 잡으면서 타 길드나 세력이 시비를 걸어오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지냈는데 방심할 때 뒤통수를 맞는 것도 아닌 역린을 찔릴 줄이야.
그때 종식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스콜피언을 처치한 당시 종식은 몇 년간 슬럼을 장악한 놈들이니 뿌리가 깊을 거라며 잔당 처치에 사력을 다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그때 사윤은 새로운 시스템 퀘스트를 진행한다고 바빠 길드원 몇 명만 남겨 두고 블랙을 떠나 한국으로 거처를 완전히 옮겼다. 그 바람에 잔당 처치가 미흡했는데 오늘 일은 그날의 과오일지도 몰랐다.
꾹꾹 미간을 누르고 있자 협회와의 대화를 끝내고 온 미정이 사윤의 어깨를 짚었다.
“뭐 때문에 예쁜 얼굴을 다 구기고 인상을 쓴대?”
“골치 아프게 됐어.”
“왜?”
미정이 눈을 깜빡였다. 사윤은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상대가 미정이었기에 솔직히 입을 열었다. 스콜피언이 부활하면 시장이 시끄러워지면서 상인 길드의 수장인 그도 피해를 받을 테니 정보를 공유하는 게 나았다.
“정보값으로 뭘 줄 건지 생각해 둬.”
“무슨 정보길래 그래?”
“한건주 납치한 놈 스콜이라더라.”
“…….”
미정의 손이 굳었다. 사윤보다 일찍이 암시장에서 활약했던 그가 스콜피언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놈들의 위험성까지도.
“확실해?”
“7할.”
“반쯤 확정이네.”
사윤이 경진에게 했던 대답과 유사한 반응을 보인 미정이 헛웃음을 흘렸다. 징글징글한 놈들.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는 스콜피언을 향한 혐오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그럴 만도 할 거다. 놈들이 활동할 시기에 피해를 입은 길드만 몇이었는가.
답도 없는 대규모 범죄 조직이었다. 그들은 밤쥐처럼 행동 강령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쾌락과 유흥만을 좇아 단순하게 행동했다. 사람을 죽이고 싶을 때 죽이고, 마을 하나를 테러하고 싶을 때 테러하면서. 나름대로 세상을 멸망시켜 보겠다든가, 모든 헌터를 발아래에 두겠다든가 등의 똘기 다분한 생각을 가지며 밤쥐에 들어와 체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제 길드원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사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광기 어린 눈을 번뜩이며 웃어 댔던 데른을 떠올리고 숨을 들이켰다. 협회의 안내인을 앞세워 아델리아의 무덤으로 이동을 시작한 미정이 사윤의 팔뚝을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좋니, 사윤아. 네가 아끼는 애 죽었을 수도 있겠는데.”
정말로 한건주를 납치한 상대가 스콜피언이라면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놈들을 한건주가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사윤도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안 죽었을걸.”
“어떻게 확신해?”
“…알람이 안 떠서.”
“알람?”
미정이 의문을 뱉었다. 사윤은 대답 대신 시선만 느지막이 내려 페어링을 확인했다. 아직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즉사당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한건주가 위험한 순간이 오면 자신에게 신호가 올 거라 페어링을 낀 손을 꽉 쥐고 있자 안내인이 도착했다며 뒤로 물러났다.
아델리아의 무덤.
수많은 각성자의 뼈와 살을 먹고 자라난 미지의 게이트가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빠질 사람은 빠져.”
게이트 앞에서 뒤를 돌아본 사윤이 여기까지 따라온 이한과 미정, 호철과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얘기했다. 당연하게도 베를린까지 와 꽁지를 말고 도망치는 사람은 없었다. 예상한 결과였기에 몸을 돌린 사윤이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며 아티팩트 하나를 추가 착용했다.
[세이렌의 이어링(A+)]
아름다운 노랫말은 모든 이성과 통각을 마비시킬 테니.
-착용자의 정신에 일정한 간격으로 위해를 가합니다. 정신력이 낮을 경우 ‘상태 이상: 혼란’ 상태에 빠져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될 수 있습니다.
-착용하고 있는 동안 모든 통각이 사라집니다. 출혈, 중독, 신체적 마비 등의 상태 이상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착용하고 있는 동안 이어링이 주는 정신 공격 외 모든 정신 공격을 방어합니다.
-방어력 10% 상승
-마나 회복 속도 10% 상승
-바다에 사는 인어족의 이어링입니다. 물 속성 스킬을 사용할 경우 피해량이 10% 증가합니다.
미공략 게이트를 클리어 시도할 때 필수적으로 착용하는 아이템이었다. 이 정도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도전할 만했기에 숨을 토한 사윤이 헤리스의 단도를 손에 쥐고 게이트 안으로 입장했다. 나머지 세 사람이 사윤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클리어하기 위해선 다음의 조건을 모두 달성해야 합니다.>
[1만 마리의 망령 처치 0/10,000]
[망령의 늪의 지배자 처치 0/1]
<특수 지형 게이트입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할 때까지 외부에서의 추가 진입 외 모든 귀환 현상이 무효화됩니다.>
“1만 마리?”
들어가기가 무섭게 뜨는 알림창에 이한이 놀란 목소리를 흘렸다. 1만 마리의 몬스터 처치를 요구하는 게이트는 좀처럼 없었다. 게다가.
“커헙!”
자연스럽게 사윤을 지나쳐 앞으로 발을 내디뎠던 호철이 순식간에 늪으로 빨려 들어가 가슴까지 잠겼다. 사윤은 바닥을 확인했다. 딱 입구까지가 진흙이었고 그 앞부터는 늪이다. 한 걸음만 내디뎌도 호철과 같은 신세가 되는 거였다.
“으이구.”
미정이 한심하다는 눈을 하며 호철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붙잡고 간신히 올라선 호철이 비행 스킬이 없으면 못 갈 것 같다고 중얼거리자 사윤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디딜 곳이 없으면 만들면 돼.”
“응?”
“냉기 저항 아이템 착용하고 뒤로 떨어져.”
두 발 정도 뒤로 물러설 공간이 있었기에 경고하자 사윤이 무엇을 할지 예감한 노아의 헌터들이 각자 아티팩트를 착용한 다음 물러섰다.
이윽고 사윤은 냉기를 잔뜩 머금은 숨을 흘리며 서리의 기운을 개방했다.
콰드드득.
하얗고 푸른 기운이 사윤의 몸을 집어삼킬 듯 피어올랐다가 그대로 발을 타고 뻗어 나가 늪에 닿았다. 늪과 서리의 기운이 충돌하듯 몇 번 콰아앙, 콰아아앙! 굉음이 들렸지만 승자는 사윤이었다. 날뛰는 늪의 기운을 제압한 사윤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땅을 얼렸다. 늪지대였던 땅이 하얗게 뒤덮였을 때,
<서리 지대가 형성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알림창이 떴다.
“가자.”
눈동자가 푸르게 변한 사윤이 노아의 헌터들에게 턱짓하며 서리 지대 위로 발을 내디뎠다. 발이 닿기가 무섭게 혹한의 냉기가 치솟아 몸을 삼키려 들었으나 서리 기운의 주인에겐 무용한 움직임이었다.
“볼 때마다 범위가 느는 것 같아.”
“게이트 입구를 얼리는 것도 봤는데 이건 이거대로 놀랍군요.”
“어우욱! 추워라! 겨울이구먼, 겨울이야.”
노아의 헌터들이 쭉 펼쳐진 서리 지대를 보며 혀를 내두르다 사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넓네.”
제 눈에 보이는 범위만 해도 도시 하나는 넘어 보였다. 필드와 엇비슷한 넓이인 것 같아 헛웃음을 흘린 사윤이 헤리스의 단도를 고쳐 쥐었다.
버티고만 있어라 한건주.
때려도 제가 때려야지, 다른 놈한테 얻어터지는 꼴은 눈에 칼이 틀어박혀도 못 본다. 자신도 한 대 때릴 때마다 고민하다 치는데 어떤 새끼가 선수를 치냔 말인가.
종식이 들으면 눈동자에 칼이 틀어박힌 사람은 원래 앞을 못 본다고 투덜거릴 만한 생각을 한 사윤이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첫 미지 게이트 공략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