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아델리아의 무덤 (4)
“대낮부터 채신머리없게 구는구나.”
사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회의실에서 핀잔이 날아들었다. 훈장님 같은 목소리에 사윤이 킬킬 웃자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회색 정장을 잘 갖춰 입은 동주였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노아로서 첫 활동이니.”
“음. 나도 모르는 사이 팀장이 댁으로 뽑혔나 봐? 혓바닥 길게 잔소리도 하시고.”
“…권사윤.”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경고하듯 이름을 불렀으나 늘 그랬듯 귓등으로 들었다. 그의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보란 듯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찾은 사윤이 마침 비어 있는 옆자리의 의자를 빼었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 수와 하나밖에 안 남은 의자를 보아 하니 자신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온 듯했다.
“이리 와.”
“…하.”
의자를 탁탁 두드리며 건주를 부르자 잠깐 굳어 있던 남자가 회의실 안에 있던 다른 헌터들의 표정을 살피곤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남은 의자라곤 그것밖에 없는데 뭘 불러요?”
작은 투정은 동주의 말과 마찬가지로 무시했다. 건주가 무사히 착석한 걸 보고 나서야 고개를 돌린 사윤은 마지막에 들어와서 그런지 제게로 몰려 있는 시선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대면식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이들을 심드렁하게 응시했다.
여전히 다들 재미없는 얼굴이다. 흥미로워 보이는 건 당장이라도 제 멱살을 붙들고 싶어 움찔움찔 떠는 태석뿐이었다.
달려드나?
한번 달려들어 주면 게이트 공략 전 몸도 풀고 재밌을 거다. 그러나 그런 사윤의 기대와 달리 태석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주먹을 꽉 쥔 채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이마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화가 나는데도 꾹 참고 있는 게 보통 인내심이 아니다. 어찌 됐든 오늘은 미공략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노아로서 모인 거였으니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다.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주의라도 받은 모양이지.
손쉽게 자신이 오기 전의 일을 예측해 본 사윤이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텄네, 텄어.
다른 헌터들도 그렇고 태석도 그렇고 분위기를 보아 하니 오늘 한판 하기에는 영 그른 듯했다. 아무 짓 안 하겠다는 의미로 양손을 들었는데 어째 헌터들의 시선이 제게서 떠나질 않았다. 그들이 사윤의 옆에 앉은 남자와 사윤을 번갈아 보며 다채로운 반응을 보였다. 눈썹을 들어 올리는가 하면 고개를 기울였고 인상을 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문제는 해결됐나 보군.”
그러던 와중 동주의 입에서 먼저 사윤과 건주의 관계 상태를 짐작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평소와 같이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은근한 미심쩍음이 섞여 있었다. 그제야 헌터들이 품고 있는 궁금증을 깨달은 사윤이 픽 웃었다.
이전 만남 때는 죽일 듯 굴었던 상대와 자신이 같이 온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긴 저들 중에서는 어림짐작으로 오늘 이 자리에 한건주가 나오지 못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도 있을 거였으니. 가면을 쓴 한건주를 보며 왜 살아 있지? 같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딱히 엉터리 짐작을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역시 자신의 성격과 업적을 알고 있는 이들다운 반응이라 사윤이 건주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응수했다.
“참….”
“……?”
말을 하려다 말고 도로 삼키자 남자가 의아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고개를 돌려 버린 사윤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상대가 한건주만 아니었다면, 건방지게 도망쳤다가 돌아온 게 한건주만 아니었다면 저들이 예상한 대로 제 손으로 친히 묻어 주고도 남았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상대가 한건주였으니 제가 좀 봐줘야지 어쩌겠는가.
울기까지 했는데.
제가 건주와 같이 오게 된 데는 그런 사정이 있었지만 그걸 저들에게 말해 줄 의무는 없었다. 의문 섞인 시선들 속에서 사윤은 태연히 어깨를 올렸다.
“뭐, 대충 해결은 했지.”
“그게 대충이에요?”
대답하기가 무섭게 옆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윤은 의자 사이 거리보다 가까워진 건주를 의외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건주는 아닌 척 숨기려 했으나 사윤은 그가 은연중에, 아니, 실은 대놓고 자신을 남들에게 내보이기 창피해한단 걸 알았다. 정확히는 자신이 좀 흥미로운 짓을 벌이면 참담한 얼굴로 그걸 보며 모르는 사람인 척 대하려 했다.
그러니 대놓고 또라이 짓을 할 이 장소에서도 자신과 가까운 티를 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먼저 이렇게 몸을 기울여 오며 티를 낼 줄은 몰랐다. 다른 곳도 아닌 협회의 회의실에서.
S급 헌터가 일곱이나 모인 자리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거물 다섯이 저 앞에 있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게 툴툴거리는 게 퍽 한건주다워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하기야, 제 앞에서도 똑바로 서 있었는데 남들 시선에 기죽어서 되겠나.
“흐음.”
“…또 뭔데요.”
“웬일로 기특하게 군다 싶어서.”
눈을 슬 접으며 말하자 가면 속 얼핏 보이는 흑안이 의문을 띠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딱히 이해시켜 줄 마음이 없었기에 다시 정면을 바라보니 헌터들이 묘한 눈으로 자신과 건주를 관찰하고 있었다.
닳겠다, 닳겠어.
이전 대면식은 10분 내외의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졌고, 저들은 제 반응을 보고 한건주가 제 손에 죽을 줄 알고 대면식 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죽지 않은 것도 모자라 꽤 친밀해 보이기까지 하니 이제야 허겁지겁 관찰하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수상한 점을 탐색하고 잡아내려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한 사람은 빼고.
“재밌네.”
누가 상인 길드의 수장 아니랄까 봐 미정은 마치 상품 가치를 재는 듯한 눈으로 건주를 살피며 말했다. 다른 시선들은 곧잘 견뎌 내던 한건주도 그 값어치를 매기는 듯한 시선은 불편했던 건지 몸을 가볍게 들썩였다.
“재밌는 걸 데려왔어.”
미정의 시선이 사윤에게로 향했다. 한 번 감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두 번째 감상을 흘린다는 건 한건주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제게 닿는 시선의 의미가 언제 한번 그와 대화하게 해 달라는 요구임을 알아 눈웃음만 지었다.
따로 대화해 볼 필요 없이 한건주의 가치는 이번 게이트에서 증명될 거였다.
L급 게이트를 클리어했고 1년간 상태창이 몰라보게 달라졌을 정도로 성장한 걸 보면 그의 실력은 꽤 좋았다. 아직 이 자리에 있는 이들과 완전히 비벼 볼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 중에 누군가를 넘어설 거였다.
그만한 원석이다.
“또 왜 그렇게 보냐니까요.”
아, 내가 또 이상하게 봤나?
불쑥 들려온 지적에 눈을 두 번 깜빡이다 고개를 돌렸다. 국내 최상위권을 꽉 잡고 있는 헌터들이 아직도 영 미심쩍은 눈으로 건주를 보고 있었다.
사윤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사윤이 보기에 그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경계나 탐색이 아닌, 호의였다. 연줄이란 게 미리미리 맺어야 생기는 거 아니겠는가. 한건주는 자신과 달리 범죄 길드의 수장도 아니고 인성이 글러 먹은 것도 아니라서 인연을 맺어 나쁠 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반응을 보면 영 그른 것 같았다.
한건주는 뒤끝이 길었으니까.
저 쪼잔한 녀석이 지금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손바닥 뒤집듯 예의 있게 나온다 해서 받아 줄 리 없었다. 오히려 한번 후회해 보란 듯 건방지게 굴면 모를까.
제가 당할 때는 몰랐는데 남한테 그리 군다고 하니 꽤 통쾌해서 피식피식 웃자, 경계 어린 시선에 대고 보란 듯이 느슨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건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윤이 그에게 한마디 하려고 할 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협회의 직원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신입인 건지 태도가 빠릿빠릿했다. 노트북을 켜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등의 세팅을 마친 이가 구석으로 가 섰고, 이윽고 협회의 거물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끼익.
모두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사윤은 제가 일어나면 따라 일어날 생각인 건지 아직 얌전히 앉아 있는 건주를 바라보다 느긋하게 일어나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국 헌터 협회 회장 배민철.
올해로 52세가 된 중년이자 한국 최초의 헌터로 첫 게이트 폭발 당시 수많은 생명을 구해 아직 영웅 대우를 받고 있는 그가 노아의 첫 임무를 맡기기 위해 직접 행차했다.
노아 소속의 헌터들이 모두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상하 관계까진 아니었으나, 최초의 헌터이자 수라의 현장을 발로 뛴 영웅에 대한 예우였다. 사윤도 대충 고개를 숙였다가 다른 헌터들과 함께 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먼저 털썩 소리 나게 앉으니 협회장이 사윤 쪽을 돌아보았다. 고지식한 배동주는 표정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자네도 여전하군, 그래.”
“알면서 불렀잖아?”
“그건 그렇지.”
순순히 인정한 남자가 헌터들을 향해 묵례하곤 자리에 앉길 권했다. 이윽고 그가 스크린 앞에 서자, 벽에 붙어 있던 직원이 뛰어와 화면을 켰다. 장식용으로 달려 있는 것만 같던 스크린에 노트북 화면이 떠올랐다.
“그럼 이번에 갈 미공략 게이트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존칭을 사용한 협회장이 스크린을 보기 편하게 몸을 돌렸다.
“최초의 미공략 게이트이자 아직도 공략에 성공하지 못한 S급 게이트. ‘아델리아의 무덤’ 그 게이트의 클리어가 노아의 첫 목표입니다.”
이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해외로부터 명성을 얻을 겁니다.
이제 노아의 첫걸음인데 그 첫 단추부터 해외가 언급되고 난리다. 사윤은 배포 크게 나가는 협회장에 일이 재밌게 됐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