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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76)화 (176/266)

제176화. 아델리아의 무덤 (3)

“조금 질린 표정이다?”

곁눈질로 힐끗 살핀 한건주의 얼굴이 새하얬다. 피부야 원래도 깨끗하고 하얀 편이긴 했는데 이건 피부색이 아닌 낯빛을 얘기하고 있는 거였다. 길에 나가면 귀신들이 턱턱 달라붙어 기가 빨린다고 호소했던 어느 무당의 표정이 지금의 한건주와 같았다.

“…뭐.”

남자가 가면 속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윤은 옆에 붙어서 봐야만 보이는 그의 가면 안 얼굴을 살피다 어깨를 으쓱였다.

“적응해 둬. 앞으로 이런 일 잦을 테니까.”

어딜 가든 기자가 따라다닐 거고 사람들의 눈길이 달라붙을 거다. 유명세를 얻는다는 게 그랬다. 비록 사윤은 일부 헌터들을 제외하고 얼굴 인식 방해 아이템을 착용하고 다녀 그런 일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이한이라든가 주변의 헌터들을 보면 피곤해하다 못해 기자와 사람들의 관심 자체를 아예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힘겹게 적응해 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래도 넌 운 좋은 줄 알아, 한건주.”

그가 제비 건물이 아닌 밤쥐 길드 건물에서 지내게 된 만큼 이 이상의 관심은 사양이었다. 감시와 미행이 따라붙지 못하도록 철저히 따돌리고 모습을 숨긴 채 행동할 거라 한건주가 겪게 될 귀찮은 일은 남들보다 절반쯤 줄어들 것이다. 그 사실을 말해 주지 않고 그냥 운이 좋다고만 얘기하니 한건주의 미간이 슬 좁아졌다.

“운이 좋다기엔 떨어졌던데요.”

“뭐?”

“행운 스탯이요.”

스탯이 떨어져?

사윤의 퀘스트 페널티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올랐던 스탯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상태 이상 같은 게 걸리지 않는 이상 말이다. 사윤은 잠시 당황하다 천재의 눈을 사용했다. 끝을 뜨겁게 달군 바늘이 눈 안쪽을 찌르는 것만 같은 고통과 함께 이전에 봤던 한건주의 상태창이 다시 펼쳐졌다.

…진짜네.

정말로 S였던 그의 행운 스탯이 S-까지 떨어져 있었다.

“뭘 했길래 행운 스탯이 떨어져?”

행운 스탯은 아이템의 보정을 받지 않고서야 올리기 힘들다. 하락하는 변동도 마찬가지였다. 성장하면서 늘 수 있는 신체 능력 관련 스탯과 달리 행운은 타고나면서 부여받는 등급이었으니까.

그게 왜 떨어지나 싶어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이 새끼, 나한테 말 안 한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자신은 모두 얘기했다. 그가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개괄해서 모두 얘기해 주었다. 그런데 한건주가 숨긴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세상에 상도덕이 없는 것이다. 속으로 주장하며 날카롭게 벼린 시선을 흘리고 있으니 그것을 눈치챈 남자가 사윤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뭘 했길래 행운 스탯이 떨어지냐고. 네가 모르나 본데, 건주야. 원래 한번 올린 스탯은 잘 안 떨어져.”

행운 스탯 같은 건 타고난 등급이라 아이템 보정이 아닌 이상 올리기도 쉽지 않고.

사윤이 덧붙인 말에 건주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짐작 가는 것이 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골몰하는 표정이 나올 수 없어 사윤은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잘 모르겠는데 탑에 들어가서 떨어진 거 아닐까요.”

“예정된 어쩌고?”

“네. 거기 탑이 진짜 지랄맞게, 힘들어서.”

상상하기도 싫은 건지 번듯했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게이트 하나 잘못 들어갔다고 스탯 등급이 하락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필드를 겪어 본 한건주가 저리 말할 정도라면 예정된 탑이든 뭐든 간에 힘들다는 말엔 거짓이 없을 거였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가 보고 싶은데.

스탯을 떨어트리는 게이트는 처음이었다. 사윤은 궁금한 건 쑤시고 해결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이었고, 한건주가 겪어 봤다던 예정된 탑은 그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언제 한번 데려가 달라고 하면 데려가 주나?

전용 스킬을 써서 들어간 게이트라고 했으니 아무 때나 들어가거나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닐 것이다. 가고자 한다면 한건주의 협력이 필요할 것 같아 바라보자 한 발, 한 발 다시 회의실을 향해 걸음을 떼었던 남자가 끈덕진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왜요.”

“그냥 그 탑은 어떻게 들어가나 싶어서.”

“가고 싶어요?”

“내가 못 가 본 게이트라며, 가면 좋지. 그래서 그 게이트는 등급이 뭔데.”

“…….”

“……?”

등급을 묻는 말에 상대방이 침묵했다. 사윤은 뜬금없는 타이밍에 침묵을 택한 건주를 희한한 눈으로 보았다. 뭐 예민한 걸 물어본 것도 아니고 등급을 물어본 것뿐인데 왜 말을 못 해? C급 게이트에서 1년간 못 나오기라도 했나. 등급이 낮아서 말하기 수치스러운 게 아니고서야 이해하지 못할 반응이었기에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자 몇 번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반복하던 건주가 주변을 살피다 목소리를 낮췄다.

“L급이요. 자세한 건 더 묻지 말고 나중에 돌아가서 얘기하든가 해요.”

협회 건물 안에 있을 다른 S급 각성자들을 경계하는 게 역력했다. 사윤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건주의 말을 되짚어 보곤 놀랐다. 숨을 들이켜는 대신 호흡을 멈추는 것으로 놀람을 표한 사윤이 건주의 팔을 붙잡았다. L급이라고? 그리 묻고 싶었는데 건주가 고개를 저었다.

조심성 많은 새끼.

아니, 이건 조심할 만하다.

L급 게이트라니. 세상에 처음 나온 등급 아니던가. 세간에 알려지면 회자가 되는 걸 넘어 헌터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길 거였고 그 열기의 파장은 고스란히 L급 게이트를 처음 발견한 한건주에게로 돌아갈 거였다.

사윤이 생각하기에 헌터 중에는 제정신인 사람이 얼마 없었다. 아니, 그냥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미쳐 가는 세상에서 이능을 각성한 사람들이 제정신일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헌터들도 머리란 게 있기에 단순한 질투라면 상대가 강할 때 알아서 꼬리를 말겠지만 그게 질투가 아닌 탐욕과 투쟁심에서 비롯된 욕구라면 그렇지 않았다. 게이트 공략과 강함에 눈이 돌아간 존재들인 만큼 L급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한건주를 노리기로 한 이들은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물러서지 않을 거다. 그게 설령 사윤이라고 해도.

밤쥐의 수장인 사윤에게 주기적으로 암살자들이 찾아오는 게 딱 이 경우였다.

사윤을 죽여 얻을 수 있는 명성과 권한이 많았으니 죽이고 죽여도 꼭 한두 명씩은 나타나 반년에 한 번꼴로 목을 노리고 달려든다. 제게도 이런데 한건주에게는 오죽할까.

얼굴이 알려지면 골치 아파질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만일 세상에 L급 게이트 하나가 더 나타난다 하더라도 한건주는 철저히 입단속을 시켜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L급 게이트를 본 적도 클리어한 적도 없는 것이다. 그게 안전한 길이었다.

하여간 감이 좋기는.

헌터가 된 지 얼마 안 된 데다 1년을 탑에서 지낸 한건주는 헌터들의 음습한 습성이라든가 내밀한 사정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그런데도 예감만으로 입을 다무는 게 놀랍다. 처신을 잘 하다 못해 완벽하게 하고 있었다.

쟤를 누가 저렇게 키웠대.

내가 키웠지.

사윤은 건주가 들으면 기함할 말을 속으로 생각하곤 그를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L급 게이트라니. 그런 거라면 한건주가 1년간 게이트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것도 납득이 갔다.

L급이면 어느 정도일까. 대충 그때와 비슷하려나?

이제는 없던 날로 기억되는 축제의 밤을 떠올린 사윤은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한건주가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며 걸음을 서둘렀다. 저벅저벅, 경보하듯 걸어간 남자가 빠르게 멀어진다. 사윤이 보기엔 시간 지체는 핑계였고 그냥 말해 주길 꺼리는 것 같았다.

대체 그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러고 보니 이 새끼 얼렁뚱땅 넘겼네?

문득 한건주가 제게 얻어 간 정보에 비해 자신이 알게 된 정보가 적다는 생각이 들어 기억을 곱씹어 봤는데 생각해 보니 한건주 저 괘씸한 자식 제 정보만 홀랑 듣고 날랐다. 분명 자신이 그에 대해 묻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가 바뀌었고 그 상태로 얘기가 끝났지 않은가.

사실 따지고 보자면 사윤의 탓이긴 했다.

한건주에게 질문권을 넘긴 것도, 이야기를 끝낸 것도 사윤이었으니까. 하지만 한건주는 양심이 있으면 떠나려는 사람 팔 붙잡아 앉혀 두고 아직 제 얘기 다 안 끝났어요, 따위의 말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 가야 했다.

그걸 말하겠다고 울면서 아양을 부렸던 거 아닌가?

“흠.”

머리도 좋은 자식이 몰랐을 리는 없을 테고.

자신이 들려준 얘기가 충격적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한건주는 머리가 좋았고, 회전이 빠른 녀석이었다. 그러니 노아가 죽은 그 당시에도…. 이 생각은 그만하자.

샛길도 그냥 샛길이 아니라 진흙탕 샛길로 빠질 뻔한 생각을 간신히 멈춘 사윤이 멀어져 가는 건주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뒤통수가 제법 따가울 텐데도 한건주는 전처럼 돌아서거나 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필사적으로 앞만 보며 걷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행운 S-급은 무슨.

위기 상황을 족족 피해 가는 걸 보면 행운 수치 S급이었다.

뭐, 아예 안 말해 준다는 것도 아니었고 길드로 돌아가면 말해 준다고 했으니 그때를 기다리기로 한 사윤은 허공을 접듯이 이동해 곧바로 한건주를 따라잡았다. 벌어진 격차는 못해도 10미터였는데 일 보 만에 그 거리를 따라잡자 건주가 귀신이라도 보듯 사윤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S급이 되면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S급이 무슨 도사인 줄 아나. 땅을 접어 다니게.”

“전부터 슬슬 반말하는 것 같다, 건주야.”

“…….”

“왜 아예 맞먹지 그래.”

“…멋지다고요.”

동문서답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사윤은 강자를 만난 주제 파악 잘 하는 헌터처럼 꼬리를 내리는 건주를 보며 픽 웃었다가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기분도 좋겠다, 문을 부수지 않고 얌전히 연 사윤이 앞으로 한 발 들어가며 즐거운 기분을 마음껏 표출했다.

“이리 오너라!”

“미친 진짜….”

또라이 행각에 따른 수치심은 블루투스 기능이라도 있는 건지 사윤이 아닌 건주가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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