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아델리아의 무덤 (2)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건주는 1층으로 내려가기가 무섭게 밤쥐 길드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사윤은 사방에서 가해지는 날카로운 눈빛에도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는 건주를 보며 팔짱을 꼈다.
이건 또 의외네.
조금은 겁에 질릴 줄 알았는데 반응이 태연하다. S급 되어서 그런가?
뭐, 등급만 따지고 보면 밤쥐 내에서 한건주를 이길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거였다.
하지만.
다구리라면 얘기가 다르지.
만인에게 공평한 말이 있다. 사윤과 같이 한 명이 국가급의 무력을 가질 경우에는 통하지 않지만 그럭저럭 강한 개인에게는 통하는 말.
다구리 앞에선 장사 없다.
얼마나 인상적인 말인가. 사윤은 한건주가 도망친 직후 그의 행방을 쫓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며 빈속에 각성제를 들이붓고 충혈된 눈으로 일주일을 지새웠던 자신의 길드원들을 위해 친히 건주의 곁에서 물러났다. 사윤과의 거리가 벌어지자 건주가 의아해하며 등을 돌렸다. 사윤은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길드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얼굴은 피해서 쳐라.”
저 얼굴은 귀했으니 가급적이면 상하지 않길 바랐다. 느긋하게 덧붙인 말에 건주의 의문이 강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은 풀렸다. 사방에 있던 한 맺힌 길드원들이 달려든 까닭이다.
일을 시킨 건 사윤이었지만, 목숨이 아까워 사윤에게 달려들지 못한 길드원들의 한이 건주에게 쏟아졌다. 우당탕탕 발길질이 이어진다. 여기가 네 집 안방이냐고 멋대로 도망쳤다가 멋대로 오냐는 말을 들은 건주가 억울함을 표했다.
“데리고 온 건 저 사람인데.”
“저 사람? 저어사아라암?”
길드원들은 건수를 잡았다 싶어 건주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며 더 때렸다. 누구 마음대로 길드장님을 그런 식으로 부르냐는 말에 건주의 억울함이 커졌다. 사윤은 먼지 나게 맞는 건주를 보며 인벤토리에서 멀쩡한 옷을 하나 꺼냈다.
조금 뒤에야 무자비하게 이어지던 폭행이 끝났다. 야근의 원수, 밤쥐의 원수, 경국지색 같은 새끼 등의 갖은 욕설을 들으며 얻어맞던 건주가 길드원들의 발아래에서 몸을 일으켰다. 꼴에 잘못한 건 아는지 맞는 동안 반격 한 번 하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들었기에 직접 그의 목덜미를 붙잡아 길드원들 사이에서 구해 준 사윤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의류 아이템을 건넸다.
“갈아입고 와. 거지꼴로는 어디 못 데려가니까.”
“거지꼴로 만든 게 누군데….”
맞은 게 제법 서운했던 건지 퉁명스러운 음성이었다. 사윤은 말없이 한쪽 눈썹을 산 모양으로 들어 올렸다. 더 얘기해 보란 시선을 받은 남자가 순순히 옷을 받아 들고 길드 건물로 들어갔다.
1층 로비에 있을 화장실을 쓰고 나올 거라 예상한 사윤은 혹시 몰라 길드원 한 명을 붙였다.
“저거 다시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따라가서 감시해.”
한건주가 들었다면 화장실쯤은 혼자 가게 해 달라고 펄쩍 뛸 말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도망치래?
전적이 있으면 전적에 따른 조치가 취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잠시 후 들어가기 전보다 표정을 굳힌 건주가 길드 건물에서 나왔다. 얼음장 같은 시선을 보며 사윤은 픽 웃었다.
“눈에 힘 풀어라.”
“…….”
“내가 말하지 않았니.”
눈 그렇게 뜨는 새끼들 싫어한다고.
허밍과 함께 덧붙인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담긴 말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그의 세 가지 요구를 들어준 만큼 그도 자신의 세 가지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사윤이 손목을 가볍게 돌리니 못마땅한 티를 팍팍 낸 건주가 천천히 눈동자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차가웠던 분위기도 그제야 풀렸다.
“…화장실을 가는데 감시를 붙이는 게 어디 있어요?”
“싫으면 도망치질 말았어야지. 내가 널 어떻게 믿고 그냥 보내?”
“계약서 써요.”
“싫은데.”
한건주가 어떤 편법을 쓰고 도망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얄팍한 종이 쪼가리를 믿을 순 없었다. 강경한 태도를 취하자 건주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사윤을 따라 걸었다. 길드원들이 그런 사윤과 건주를 보며 수군거렸다.
“뭐야, 생각보다 분위기 괜찮은데?”
“아까 때리면서 봤는데 건주 녀석 몸도 멀쩡하더라. 부러진 곳 하나 없던데.”
“길드장님이 그렇게 봐줄 리가 없는데….”
“아니, 우리 길드장님은 호구인가. 그렇게 뒤통수 맞아 놓고 왜 봐줘? 건주 놈 떠나고 나서 한 달을 앓았으면서.”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불만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눈동자를 살짝 굴리는 것으로 그들을 조용히 시킨 사윤이 대기되어 있던 차에 건주를 밀어 넣었다. 뒤이어 따라 탄 뒤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종식을 대신해 운전석에 앉아 있던 찬희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차 부서집니다….”
찡찡거리는 종식과는 또 다른, 소심한 그 핀잔에 조용히 웃기만 했다. 자타공인 사윤의 팬인 찬희는 그 미소에 얼굴을 붉히고 조용히 운전대를 잡았다. 저래 보여도 길드의 간부였기에 사윤의 웃음이 ‘닥치고 운전이나 해, 찬희야’의 뜻을 담고 있음을 알아차린 거다.
“찬희는 이래서 편해.”
종식과 달리 그는 등받이를 발로 차거나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원하는 바를 파악하고 움직였다. 암살자로 키웠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조용히 보조해 주는 걸 보면 암살자로 키워도 나쁘지 않을 만한 센스를 갖고 있었다. 문득 그런 아쉬움이 들어 중얼거리다 몸을 틀었다. 많이 얻어맞았으면 포션이나 줄 생각을 하고 건주를 돌아보았는데 그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찬희를 향해 쏠려 있었다.
아, 얘는 찬희를 처음 보나?
건주가 본 밤쥐 간부는 종식밖에 없었다. 관심을 가질 만해 밤쥐의 간부라고 설명해 주자 건주가 가늘게 웃었다.
“…주변에 사람이 몇 명이야.”
속삭이듯 흘러나온 혼잣말이었다. 저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단순한 혼잣말인 건지 모르겠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사이 찬희가 운전하는 차량은 착실히 굴러가 사윤과 건주를 협회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국가급 게이트 재난을 방지해서 설립한 팀 노아의 정식 활동이 오늘이었기에 협회 근처에는 기자가 쫙 깔려 있었다. 사윤은 밤쥐로 활동했을 때와 달리 제비로 활동하는 만큼 얼굴 인식을 방해하는 아티팩트를 해제했고 인벤토리에서 가면 아이템을 꺼내 건주에게 넘겼다. 일단 주길래 받아 든 남자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무슨 가면이에요?”
“무슨 가면이긴 무슨 가면이야, 네 얼굴 가릴 거지. 1인 길드로 활동하면서 얼굴 안 밝혔다며. 가리고 있어.”
“이젠 밝혀도 상관없는데요.”
“왜. 내 앞에서 벗어서?”
장난스럽게 뱉은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윤은 건주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강제로 가면을 씌웠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가면을 낚아채듯 가져가 체중을 기울여 씌우자 건주가 놀란 듯 몸을 뒤로 뺐다. 그가 자신의 얼굴에 씌워진 가면을 매만졌다.
“왜 씌워요?”
“가리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데리고 다니기 쪽팔리게 생겼어요?”
잠깐의 뜸 이후에 이어진 말에 사윤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쟤가 지금 저 얼굴로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 밤쥐의 다른 애들이 들으면 기만이라며 소리칠 말이다. 사윤은 헛소리하지 말란 의미로 가면의 코 부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아! 하고 짧게 신음한 건주가 코 부분을 감싸 쥐고 몸을 물렸다.
“헛소리하지 말고 쓰고 있어. 이만한 사건에서 얼굴 밝혀져 봤자 좋을 거 없으니까.”
넌 나이도 어리잖아.
사윤은 나이가 어린데 S급으로 각성한 사람이 얼마나 큰 견제를 받는지 알고 있었다. 한건주는 안 그래도 노아에서 가장 어린 나이다. 최연소라는 수식어는 노아의 이름이 세상의 알려졌을 때 각광받을 만한 표현이었고 그만큼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기 좋은 위치였다.
헌터들은 악랄하지.
질투에 눈이 돌아간 것들이 특히 그렇다. 경진에게 조사를 부탁한 결과 노아에 가입하고 싶어 몸이 단 헌터들이 수천이었는데 그들이 한건주의 나이를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안 그래도 한건주는 1인 길드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알린 기간이 짧았다.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지위를 가진 다른 헌터들과 달리 사윤과 건주는 그렇지 않았다. 밤쥐라는 이름을 숨기고 제비로 알려진 사윤도,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1인 길드로 명성을 좀 알리다 노아의 멤버가 된 건주도 노아에 가입하지 못한 헌터들의 표적이 되기 딱 좋은 상황이다. 그런데 스물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까지 알려져 봐라.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새끼는 뭔데 저기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며 달려들 사람이 눈에 훤했다. 그러니 쓸데없는 보복을 당하지 않으려면 얼굴을 가려야 했다. 저야 가족이 없어서 괜찮다지만 한건주는 아니지 않은가.
질투에 눈이 돌아간 것들은 한건주의 친구나 가족을 인질로 삼고 노아에서 탈퇴하라 협박할 수도 있었다. 시답지 않은 장난질이었으나 사윤이 해 본 결과 잘 통하는 방법이었다. 사람이란 보통 사람에게 약한 존재였으므로. 그러니 세계에서 이름을 날린 악랄한 악인이나 범죄자도 자신의 가족이나 배우자에겐 따뜻한 사람이었단 말이 도는 것이다.
“길드장님?”
생각에 잠겨 있으니 건주가 사윤을 불렀다. 사윤은 상념에서 깨어나 천천히 차 문을 열었다.
“네 얼굴이 알려지면 네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볼 거야. 그렇게 안 되려면 얼굴을 가리든가 실력으로 입증하든가 해야 하는데 아직 넌 보여 준 게 없잖니. 남들이 보기엔 허접이란 소리지.”
한건주가 S급이 되고 나서 얼마나 강해졌든 사람들은 몰랐다. 그의 얼굴이 알려지고 나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습격할 헌터들은 아직 그의 실력을 납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실력 증명이 안 된 상태에서 얼굴을 까발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
“그러니 얼굴 까고 싶으면 실력부터 보여.”
네 자리를 탐내는 독사 같은 이들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게.
눈을 휘며 충고한 사윤이 차에서 내렸다. 즉시 셔터음이 터져 나오며 기자들의 입에서 각종 질문이 쏟아졌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이를 보며 혀를 찬 사윤이 서리의 기운을 흘려 투명하고 얇은 얼음벽을 만들었다. 기자들이 당황했고 그사이 사윤이 차에 타고 있던 건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내리고 뭐 하니. 에스코트라도 필요해?”
웃으며 내뱉은 말에 손을 잡으려던 이가 움찔거렸다. 그러곤 이내 뭐래, 하고 작은 말을 흘리고 혼자서 차 밖으로 내려왔다. 다시 셔터음과 함께 플래시가 터진다. 사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음벽 사이의 길로 건주를 이끌며 협회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