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아델리아의 무덤 (1)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이 절로 떠졌다.
아침이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번쩍, 눈꺼풀을 들어 침대 옆자리를 확인한 사윤은 성인 남자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발, 이 새끼가 또.
이게 또 튀어?
다른 데도 아닌 내 길드에서?
평범한 놈들이라면 엘리베이터나 입구에서 붙잡혔겠거니 싶었는데 상대가 한건주라 방심할 수 없었다. 전적이 있는 놈이었기에 바람막이 하나를 걸치고 방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벌컥 옆에 있던 욕실의 문이 열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고 있던 남자가 사윤을 보았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근데 어디 가요?
들려온 말소리에 사윤은 손을 뻗었다. 홱, 건주의 손목을 낚아채 쥐고 나서 손을 더듬어 맥박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가 실재하고, 제 앞에 있으며 환상 따위가 아님을 알았다.
“…왜 그래요?”
“…….”
물음을 무시하고도 한참을 멍하게 있던 사윤이 맥이 뛰는 손목을 아주 느릿하게 놓았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에 자조와 안도, 허탈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스몄다.
이게 무슨 꼴인지.
“넌 깼으면 내 옆에 붙어 있어야지.”
인상을 쓰며 성을 내자 건주가 황당해했다. 사람이 씻긴 해야 할 거 아니냐며 억울해하는 이에 사윤은 다 씻었으면 나오라며 건주를 밀어 내고 그가 있던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물로 세수를 마치고 나니 정신이 맑게 깼다. 거울 속 제 얼굴을 보며 눈을 홉뜬 사윤이 세면대를 꽉 쥐었다.
한건주는 돌아왔다. 그는 제 곁에 있고, 저항하는 자 활성화 퀘스트는 다시 진행되었다.
그래. 여기서부터 첫걸음.
아니, 두 번째 걸음이다.
생각 정리를 마치고 욕실을 나오자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사윤은 침대에 앉아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건지 머리가 덜 말랐는데 드라이기 소리가 꺼졌다.
“더 안 말리냐.”
“누가 뜨겁게 쳐다봐서 시선에 다 마를 것 같던데요.”
쳐다보지 말란 핀잔을 희한하게도 했다.
“감기 걸리니까 다 말려.”
“저 이제 S급인데요.”
“그런데.”
“감기 정도는 안 걸려요. 애초에 지금 계절이 감기 걸릴… 말리면 되잖아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이야기가 이어질 때마다 눈썹을 치켜올리니 사윤의 표정을 확인한 건주가 자리에 앉아 드라이기를 켰다. S급이면 무조건 감기에 안 걸리는 건지 한번 시험해 보자며 서리의 기운을 개방할 생각이었는데 눈치가 좋았다.
사윤은 다시 머리 말리는 그를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았다. 시선 한 번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았다. 혹여 잠깐 돌리면 눈앞에서 사라질까 싶어서. 보고 있는데 신기루같이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지어 보이는 표정이나 제게 드러내는 감정은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그 전부가 느껴지는데 왜 곁에 있다는 건 실감이 안 날까?
“…역시 괘씸하네.”
평소였다면 잠에서 깨고 한건주가 없다는 걸 눈치챈 순간 기감부터 넓게 펼쳐 그의 기척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꼭 헌터로 각성한 적이 없던 것처럼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만 보고 몸을 움직이려 들었다. 제 생각과 감각을 그리 망친 게 한건주의 도망이었기에 작게 중얼거리니 머리를 말리던 남자가 거울 속으로 사윤과 눈을 맞대곤 다시 드라이기를 껐다.
“왜 그렇게 봐요? 아까부터.”
“내가 뭘.”
“되게 뚫어져라 보잖아요. 관상용 물건이라도 보듯.”
기분이 나빴나 보다. 사윤은 관상품이라는 말에 오히려 느긋하게 그를 관찰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선을 천천히 내리자 건주의 콧잔등이 찡그려졌다. 그가 한마디 하기 전 사윤이 선수를 쳤다.
“건주야. 난 내 방에 내 물건만 둬.”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이 침대도 내 거고 네가 쓰고 있는 그 드라이기도, 거기 앉아 있는 그 의자도 내 거란 소리지.”
차분히 방에 있는 물건을 나열하니 건주가 사윤의 눈치를 보다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윤은 혼자서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일어나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에게는 남의 물건 함부로 쓰지 말라는 뜻의 눈치 주기로 보였나 보다.
내가 그렇게 속 좁은 사람으로 보이나.
물론 사윤은 속이 좁았다. 그것도 매우. 밤쥐 간부들에게 물어보면 네 명이 전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의문을 속으로 읊은 사윤이 무릎 위로 팔을 얹어 턱을 괴었다. 그 무감한 시선이 건주에게 닿았다.
“그러니 내 방에 있으면 너도 내 거란 소리지. 내 물건 내가 보는 건데 허락 맡을 필요가 있나.”
사윤이 황당한 논리로 쳐다보는 것을 정당화하자 건주가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탁탁 치던 걸 멈추었다. 그의 손에 있던 수건이 일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조금 뒤에야 아, 하고 낮은 성음을 흘리며 떨어진 수건을 주워 든 남자의 얼굴이 평소보다 붉었다. 표정은 태연했는데 피부만 은은한 분홍빛이었다.
사윤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창피했나? 뭐 때문에?
…아, 동등.
생각해 보니 내 물건이란 말은 그가 주장하던 동등에 엇나가 있었다. 수치스럽고 모욕으로 느낄 만해 건주의 반응을 이해한 사윤이 턱을 괸 채로 고개를 숙여 손바닥으로 입술 부근을 꾹 눌렀다.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으니 다시 내뱉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그때 건주가 낮게 물었다.
“그럼 그 사람도 길드장님 거겠네요.”
“누구.”
“이재희요.”
“야, 걔가 너보다 몇 살이 많은데. 형이라고 불러.”
“몇 살인데요?”
“그러게.”
걔가 몇 살이더라. 대충 서른쯤이었던 것 같은데. 서른은 넘을 거다. 그리 뭉뚱그려 말하자 남자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그런 거라면 길드장님보다 나이가 많은데요.”
“야, 내 실제 나이가 얼마인 줄 알고.”
사윤은 웃기지도 않은 얘기를 들었다는 듯 건들거리며 말했다.
“실제로 겪은 시간과 정신 나이 하면 내가, 어?”
“정신 연령은 어려 보이긴 하죠.”
“…….”
저거 아침이라 또 싸가지가 없네.
사윤은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즉시 침대 밑에서 자던 뱀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욕실로 들어갔다. 건주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 잠시 뒤 경악했다. 뱀들이 샤워 호스를 들고 나온 탓이었다.
끼릭. 욕실 안으로 들어간 뱀이 샤워기를 틀자 쏟아져 나온 물이 건주를 가격했다.
“아씹.”
“아씹?”
“…진짜.”
인상을 쓰며 물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발을 물리던 건주가 침대에 부딪혀 뒤로 넘어졌다. 다행히 침대가 그를 받쳐 주었기에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털썩. 매트리스 위로 건주의 무게가 더해지자 침대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사윤은 기껏 머리를 말려 놓고 다 젖은 건주를 보며 낄낄 웃었다.
“유치하게 이러고 싶어요?”
“그러게 누가 말하라는데 무시하래니.”
입가에 호선을 그린 사윤이 다시 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하며 실제 나이가 어쨌느니, 내가 얼마나 회귀해 봤느니 등을 무용담처럼 얘기하려 할 때 건주가 잊힌 질문을 다시 꺼내 왔다.
“그래서 이재희란 사람도 길드장님 거예요?”
“아.”
사윤은 자신이 말하고 있던 화제가 무엇에서 파생되었는지 자각하고 건주를 바라보았다.
얘는 전부터 이재희한테 왜 이리 관심을 가져? 종식 때도 그렇고 연상이 취향인가.
“이재희 애인 있다.”
혹시 몰라 덧붙였다. 건주가 전에 말해 준 걸 왜 또 말하냐는 표정을 지어 아니 그냥 뭐, 하고 어깨를 짚고 목을 한 바퀴 돌렸다.
“혹시라도 좋아하지 말라고.”
“…어디 가서 연애 상담소 차릴 생각은 마세요.”
건주가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했다. 그런 상담소를 차릴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음에도 그 얼굴이 너무도 진지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사윤은 무언가를 잊은 것 같아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건주의 질문을 떠올렸다.
“아까 네가 물은 거 말인데 이재희가 내 건 아닌데 걔가 가진 소환수는 내 거거든. 이러면 됐니.”
“…….”
쯧.
쯧?
소환수 주인이 듣는다면 기절초풍할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자 흑발의 남자가 무언가 못마땅한 건지 혀를 차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뭐야?”
그 미묘한 반응에 떨떠름해하고 있으니 건주가 도로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젖은 머리를 다시 말리는 드라이기 소음이 갑작스럽게 화제를 잃어 조용해진 방 안의 간극을 채웠다.
“근데 너 언제까지 여기서 지낼 생각이냐?”
종식을 시켜 받은 간단한 아침 겸 점심 샌드위치를 건네주면서 묻자, 곧바로 샌드위치를 까 우물거리던 남자가 한 입을 다 먹곤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저도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원래 지내던 곳은?”
“거긴 길드 건물이라서 집이라고 보긴 애매하죠.”
그 답변에 그렇구만, 하고 수긍하려던 사윤은 이상함을 깨달았다. 여기도 길드 건물인데? 사윤의 시선이 가늘어지자 샌드위치를 먹은 남자가 여긴 침대도 있고 숙소 층도 따로 있잖아요, 하고 설명했다. 반박하기 애매한 말인 데다 실제 밤쥐 길드원 중에서도 이곳을 집으로 삼은 이들이 있어 빠르게 수긍했다.
이 건물이 좀 집 같기는 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샌드위치를 준 지 10분이 안 지난 것 같은데 한 조각을 다 먹은 건주가 다른 빵을 입에 물었다. 게 눈 감추듯 먹는 모습에 사윤이 헛숨을 들이켰다.
“누가 밥 안 줬니.”
“뭐….”
자세한 답이 없는 걸 보니 정말로 안 줬거나 대답하기 귀찮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가 널 필드에서 어떻게 먹이고 재웠는데 밥도 안 먹고 다녀? 일갈하려 했으나 너무 유난일까 봐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건주가 막 마지막 빵 하나를 입에 물었으니 슬슬 나가 봐도 될 것 같았다.
“아.”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탄성을 흘렸다. 사윤이 물까지 야무지게 챙겨 마시고 있는 건주를 향해 짓궂게 웃었다.
“이따 내려가면 조심해라.”
“…왜요?”
왜긴 왜야.
“그건 내려가 보면 알 거다.”
내 길드원들이 너 족치려 벼르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