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어라? (8)
“잘 해결됐어요?”
자신이 없는 동안 할 짓이 없어 종식을 괴롭히기라도 한 건지, 낯빛이 평소보다 파리한 종식의 앞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사윤은 사무실의 문을 닫고 들어오며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뭐, 그럭저럭.”
“표정을 보아 하니 기분은 풀린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뭐….”
사윤은 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어 봤다. 기분이야 풀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 한건주가 짓는 열 오른 표정을 본다면 웃음을 터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 눈꼬리를 홱 치켜올리며 얼굴이 붉어진 채 짜증을 내는 게 얼마나 웃기던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리자 재희가 소파로 걸어와 앉았다. 하얀 펜리르가 어느새 주인 쪽으로 옮겨 가 몸을 비벼 대고 있었다.
“대화는 다 끝났어요?”
“어느 정도는.”
“그분은 어때 보였어요?”
“한건주?”
“네.”
“어때 보였기는.”
바짝 약이 올라 보였지.
아마 지금쯤 그는 방 안에서 자기가 던진 베개를 도로 주우며 짜증을 내고 있을 거였다. 그게 사실이었으나 이재희에게 그렇게 대답했다간 한심한 시선이나 받으며 ‘조롱과 짓궂은 장난은 좋은 대화의 수단이 못 됩니다, 사윤 씨.’ 같은 소리를 들을 게 뻔해 말을 돌렸다.
“그냥, 여전하더라.”
여전히 짜증을 잘 내고, 여전히 속 모르겠고, 여전히 유치하고, 여전히 야비하고.
그리고 여전히….
“울더라고.”
여린 편이었다.
담백하게 말한 사윤은 팔걸이에 걸터앉은 채로 몸을 눕혀 소파 위로 떨어졌다. 털썩, 하고 성인 남성 한 명의 체중이 소파에 실리자, 쿠션이 아래로 훅 꺼지며 사윤의 몸이 미약하게 아래로 가라앉았다.
무늬도 없이 깨끗한 천장을 조용히 응시했다. 벽지가 새하얘서 그런가, 빤히 보고 있으면 한건주의 검은 머리카락이 절로 그려졌고 그 아래로 그의 이목구비까지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 얼굴이 시선을 채 가, 떠오른 얼굴을 감상하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건주가 울었단 얘기만 하고서 침묵을 택한 사윤을 방 안의 그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궁금해 시스템 퀘스트까지 받았다길래, 직접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어 말해 줬더니 걔가 울더라.”
사윤의 고개가 재희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안 울었는데.”
“…저야 뭐, 원래 잘 안 우는 편이라서요.”
“그리고 눈물이 많은 쟤도 그렇게 서럽게 울진 않았는데.”
사윤이 종식을 힐끗거리며 얘기했다.
애초에 종식은 자신과 시스템의 관계에 대해 그리 자세히 알고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시스템에 의해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며 놈의 협박에 허구한 날 시달려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만 알았지. 그러니 한건주가 떠나고 나서, 자신이 수백 번 자살 시도를 했을 때 그렇게 놀랐던 것이다.
자신이 그만큼 간절한 줄은 몰랐을 테니까.
“…지금 울어야 하는 겁니까?”
“아니.”
시키면 당장이라도 울어 줄 것만 같은 종식을 말린 사윤이 발을 쭉 뻗어 소파 팔걸이에 걸쳤다. 딱히 울라고 얘기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새삼스러워서. 그리고 신기해서.
누군가 자신을 위해 울어 주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래서 네가 유난히 내 기억에 남았나 보다.
사윤은 잊히지 않는 소년의 이름을 마른 입술을 달싹여 중얼거렸다. 누구도 저를 대신해 울어 주지 않았는데 그 소년만이 저를 동정하며 울고 죽어 가 이렇게 깊게 기억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너도 그렇게 기억될까?
형편없는 얼굴로 눈물만 뚝뚝 흘리던 건주의 모습을 차분히 곱씹었다. 우는 상대가 눈앞에 있어 제대로 직면하지 못한 감정을 아주 느긋하고 또 느릿하게 마주하고 있으니 잠깐 사이 잠들어 버린 라이의 머리를 매만지던 재희가 입을 열었다.
“소환사가 소환수와 어떤 식으로 계약을 맺는지 아십니까?”
“시스템으로 얻지 않나?”
소환사에 대해 풀린 정보가 워낙 적었기에 대충 묻자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소환수의 터전이 따로 있습니다. 모든 소환사들은 다룰 수 있는 소환수의 수가 늘게 되면 그곳으로 가서 계약을 맺죠. 소환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인 데다, 소환사가 아닌 타인에게는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장소라 널리 퍼진 얘기는 아닐 겁니다.”
“잠깐, 난 소환사 아닌데?”
듣다 보니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긴 것 같아 한쪽 손을 들었다.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면서 왜 말하고 있냐는 표정을 짓자 이재희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사윤의 미간이 좁아졌다.
“목에 칼 들어가는 기분 느끼고 싶은 거 아니면 그만두지?”
이딴 일에 함부로 천기누설 쓰지 말라고 돌려 경고하자 재희가 웃었다.
“제가 라이를 만난 건, 연인을 잃고 난 후였습니다. 게이트를 나오니 업적을 세웠다며 소환수 하나를 추가로 다룰 수 있게 됐는데 그때 당시 전 소환수를 새로 다룰 힘도, 새로운 관계를 맺을 기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다만 도망치고 싶어서 그 터전을 찾아갔죠. 거기 있으면 아무도 저를 찾지 못할 테니까요.”
그러곤 이야기를 계속했다. 말을 귓등으로 듣는 녀석이었다.
“한 3일 정도를 거기에 틀어박혀 울었던 것 같습니다. 평생 울 걸 거기서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제 옆에 하얀 늑대가 와 있더라고요. 그때는 라이의 덩치가 지금보다 더 작아 펜리르라는 걸 몰랐습니다. 어린 늑대 정도로만 알았죠.”
사윤은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다고 이재희가 천기누설을 쓸 때 쓰는 수명이 줄어드는 게 아닌데도. 일종의 시위 형식을 취하면서도 귀는 똑바로 열어 얘기를 들었다.
기껏 쓴 수명을 바닥에 내다 버린 셈이 되도록 할 순 없었으니까.
티가 나지 않았을 텐데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교환한 남자가 묘하게 웃어 보였다. 쯔즛. 사윤은 혼자서 혀를 차며 얘기를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웬 늑대인가 싶어 확인해 봤더니 배 쪽에 큰 상처가 하나 있어 포션을 줬습니다. 다른 소환수들한테 공격당한 것 같아 치료해 줬더니 라이도 우는 제 얼굴을 핥더라고요. 아마 치료해 준 보답으로 위로해 준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제 곁에 온 거일 수도 있죠. 무리에서 동떨어진 자기 처지가 저랑 비슷해 보였나 봅니다.”
별로 재미없는 얘기인데 이재희가 낮게 웃으며 라이를 쓰다듬었다.
“그날부터 제가 울면 라이가 곁에서 저를 위로해 줬고 라이가 다쳐서 오면 제가 포션으로 치료해 줬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소환수 계약을 맺게 됐고 스킬도 하나 생겼죠. 소환수와 완벽한 유대 관계를 쌓으면 생기는 스킬이라던데, 신기한 일이지 않습니까?”
잃었던 인연을 앓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는 게.
재희가 쓰다듬는 걸 멈추고 사윤을 응시했다. 이윽고 남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흰색 펜리르의 소환을 취소했다. 사라지는 펜리르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남자의 입술이 정적 속에서 갈라졌다.
“사윤 씨에게도 그런 인연이 생기길 바랍니다.”
“…….”
“지울 수 없는 상처라면 위로받고 위로해 주며 그 흔적이라도 옅게 남길 기도해 봐야죠.”
어쩌면 이미 곁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긋하게 덧붙인 남자가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보았다. 갈 시간이 됐네요. 꽤 중의적인 말이다. 그가 갈 시간이 되었다는 건지 제가 갈 시간이 되었다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재희의 얘기를 듣는 잠깐 사이 시간이 꽤 많이 지나 있었다는 거였기에 사윤은 새벽이 된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는 겁니까?”
졸린 얼굴로 앉아 있던 종식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사윤은 이재희를 한 번 돌아보고 문으로 향했다가 발을 멈췄다.
“너도 적당히 하고 좀 쉬어라.”
“…네, 형님도 들어가십시오.”
잠깐 웬일인가 싶은 표정을 지었던 종식이 고개를 숙였다. 사윤은 종식의 사무실에서 웃으며 저를 배웅하는 이재희를 희한하게 보았다. 갈 시간이 됐다는 말은 그가 했는데 자신만 방을 나가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둘이 있을 시간을 더 주겠다는 건가?
이젠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쓸데없이 배려심이 넘쳤다. 오지랖이 넓은 것도 병이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 사윤이 문을 닫고 다시 제 방으로 향했다.
“자네.”
방문 앞에서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긴 했는데 방 안으로 들어와서 두 눈으로 직접 잠든 한건주를 보니 그가 자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화를 못 이겨 여전히 씩씩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잠들다니. 그에게 이 하루가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울어 댔는데.
기력을 쓸 만했다며 잠든 상대를 말없이 내려다보다 침대 한쪽으로 민 다음 자리에 누웠다. 그 상태로 이재희의 말을 곱씹었다. 한건주가 운 게 나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
잠들어 있던 남자가 제게로 굴러왔다. 사윤은 제 허리 위로 올라간 타인의 팔을 힐끔 보았다가 건주의 얼굴을 살폈다. 설마 싶어 감각을 곤두세웠는데 숨소리에 이상이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다. 잠들어 있는 게 맞다는 소리다.
“…뭐야?”
전에 봤을 땐 이런 잠버릇이 없었는데.
죽었나 싶을 정도로 얌전하게 자던 놈이었는데 못 본 사이 새로운 잠버릇이 생긴 것 같았다. 희한한 버릇이 들었다 싶어 인상을 찌푸린 사윤이 그를 밀어 내려 손을 뻗었다가 흠칫 굳었다.
‘사람 온기가 필요한 상황이거든요.’
하필이면 지금 그 말이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탑에 홀로 갇혀 있었다고 했나. 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며 고민하다 이불을 끌어 올렸다. 온기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면 될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건주가 다시 굴러왔다.
그의 팔이 제 허리에 얹어졌고 오른쪽 다리가 자신의 왼 다리에 살짝 걸쳐졌다. 기어이 사람과 닿고야 말겠다는 듯한 그 움직임이 많은 생각을 들게 해 한숨을 내쉰 사윤이 마지못해 그의 쪽으로 몸을 틀고 잠든 상대의 얼굴을 관찰했다.
호구 노릇은 관두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거 한 번만 더 봐줘야지 뭐 어쩌겠는가.
원래 힘 있는 사람이 그만큼 책임을 지는 법이었다.
경진이 들었으면 형님이 언제부터 그런 바른 사상을 가졌냐며 제 과로에 대한 책임이나 좀 져 보라고 게거품을 물고 외칠 생각을 품은 사윤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