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어라? (7)
“아.”
계약서를 인벤토리에 집어넣던 남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제게 퀘스트가 뜬 것처럼 그에게도 새로운 퀘스트가 뜬 듯해 사윤은 고개를 기울였다.
타이밍이 묘한데.
자신의 퀘스트가 뜬 타이밍과 건주의 신규 퀘스트가 뜬 타이밍이 이상하리만치 비슷해 의문을 갖던 사윤은 무언가를 깨닫고 눈앞의 시스템창을 재차 확인했다.
‘진행 인원(2/2)’
이전에는 저 한 명이었는데 퀘스트가 새로 업데이트되면서 은밀하게 한 명이 더 늘어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어 건주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번 퀘스트부턴 그와 공동으로 퀘스트를 진행하게 되는 듯싶었다.
신기한 일이다. 과거와는 확실히 다른 방식의 퀘스트였다.
한건주의 돌발 행동 때문인 건가?
그가 시스템이 건넨 퀘스트를 수락했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인가 싶어 잠시 퀘스트를 확인하고 있는 건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가 그의 발끝을 툭 하고 쳤다. 퀘스트에 골몰해 있던 남자가 놀라 사윤을 보았다.
“퀘스트라도 떴나 보지?”
“네. 길드장님이랑 같이 게이트 공략하라는데요.”
역시 공동 퀘스트다. 예상했던 것이 맞아 그래서, 하고 이어 말하라 턱짓하자 건주가 괜찮은 게이트가 있냐고 물었다.
“게이트야 많지.”
A급 이상의 게이트를 공략하라고 했으니 한건주의 실력 좀 볼 겸 종식에게 적당한 S급 게이트를 찾아 두라 하면 될 거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 단순한 S급으론 조금 부족했다.
저래 보여도 B급 몸으로 필드에 들어가 한 번도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놈이다. 그도 모자라 자신에게서 도망까지 쳤던 놈이었으니 평범한 S급 게이트론 그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할 것 같았다.
밑바닥까지 제대로 봐야지.
얼마나 성장했고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했다. 한건주가 성장한 만큼 종식 역시 제 계획에 반대하지 않을 거라 생각을 마친 사윤이 차이나 넘버 식스의 핸드폰을 꺼냈다.
“건주야.”
평소보다 친절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니 이상하게 예민하게 반응한 남자가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왜 그렇게 불러요?”
“내가 뭘.”
“답지 않게 친절한 척하잖아요. 길드장님이 그럴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났던 거로 기억하는데….”
말끝을 흐린 남자가 반듯했던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필드에 데려갈 때도, 몬스터에게 던지기 전에도 늘 그렇게 부르지 않았어요?”
이래서 쓸데없이 기억력 좋은 새끼들이란.
별 시답지도 않은 걸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엔 그런 거 아니니까 긴장 풀어. 게이트 공략해야 한다며. 그 얘기 하려고 했지.”
“생각해 보니 게이트는 제가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앉아, 건주야.”
“…….”
당장이라도 게이트를 찾으러 나갈 기세였던 건주가 자리에 앉았다. 사윤은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흘렸다.
“들어 봐, 한건주. 너 지금 평균 스탯 S급 넘지.”
“…뭐.”
“그리고 혼자서 S급 게이트 클리어해 본 적도 있고.”
“그건 그렇죠.”
한건주가 1인 길드로 노아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그만한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혼자서 S급 게이트를 주야장천 깼을 거였기에 입꼬리를 올렸다. 종식이 싫어하는 예의 그 미소였다.
“그렇게 웃지 좀 마요.”
…이제부턴 한건주도 싫어하게 된.
“쓸데없는 거에 신경 팔지 말고 들어. 너도 혼자서 S급 게이트 클리어할 줄 알고 나도 S급 게이트 단독 클리어가 가능한데 우리 둘이서 그냥 S급 게이트에 들어가면 재미가 있겠니.”
“빨리 끝내고 나올 수 있으니 좋네요. 전 재밌을 것 같은데요.”
“그게 뭐가 재밌어.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살면 재미없다, 건주야.”
삶이란 자고로 고통과 피, 죽음으로 이루어진 법이었다. 사윤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건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몸을 움찔 떤 남자가 사윤의 손을 붙잡아 내리며 일단 들어 보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말해 봐요.”
사윤은 냉큼 메일로 들어가 영국 각성자 협회가 의뢰한 미공략 게이트를 보여 주었다.
“영국 협회가 미공략 게이트 하나로 골머리 앓고 있거든. 거기 클리어하러 가자.”
S급 미공략 게이트 재앙의 바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바다가 펼쳐져 비행 스킬이 없는 각성자는 공략할 엄두도 못 내는 게이트였다. 환경부터가 그런 조건이다 보니 클리어 난이도가 다른 S급 게이트에 비해 몇 배로 높았다. 시작부터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는 그 게이트의 진가는 바다 안에 사는 몬스터에게 있었다.
재앙의 바다 보스, 백혹의 문어. 심해에서 살아 외부로부터 큰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놈은 바다 안의 다른 몬스터들을 조종할 수 있었기에 헌터들이 자신을 찾는 사이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명해 역으로 공격하는 놈이었다. 보스를 찾다가 다른 몬스터들의 기습을 받아 전멸한 경우가 잦다는 정보가 적힌 메일을 함께 보여 주자 건주가 음, 하고 목을 울렸다.
마음에 드나?
“별로네요.”
시발 이 까다로운 새끼.
“뭐가 별론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별로인데요. 애초에 미공략 게이트면 다른 S급 헌터들도 공략하려다 실패한 곳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런 위험한 곳을 굳이 공략해야 해요?”
“위험하니까 재밌는 거지.”
“…저는 그쪽이 그만 좀 위험했으면 좋겠는데.”
따지고 보면 삶이 그냥 위기 아닌가.
건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욕하는 건가?
사윤은 그가 자신을 욕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로 얘기한 건지 모르겠어 표정을 살피다 핸드폰을 회수했다. 연락 온 데는 많았으니 재앙의 바다가 싫다면 다른 게이트를 보여 주면 될 일이다. 열 개쯤 보여 주면 그도 지쳐서 하나 정도는 고르겠지.
제가 아는 한건주라면 그러고도 남았기에 새로운 메일을 클릭했다. 그때 핸드폰이 징, 하고 울리며 상단에 새로 도착한 메시지가 떴다. 협회에서 온 안내 문자였다.
그게 건주한테도 간 건지 그가 진동을 느끼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사윤이 그보다 먼저 문자 내용을 확인하고 웃었다.
“재앙의 바다는 안 가도 될 것 같네.”
“…….”
방 안에서 희비가 교차했다. 일이 재밌게 돼 웃고 있는 사윤과 달리 하필이면, 따위의 표정을 짓고 핸드폰을 내려다본 건주가 신음을 흘렸다.
[노아 팀원분들께 협회에서 안내드립니다. 명일 차주 월요일에 있을 미공략 게이트 공략을 앞두고 기자 회견과 회의가 있을 예정이오니 오후 1시까지 협회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핸드폰 화면에는 협회에서 온 문자 내용이 떠 있었다.
“협회랑 짰어요?”
“그럴 리가. 그놈들이랑 짠 건 제비 길드밖에 없는데.”
“그럼 왜….”
건주가 왜 이 타이밍에 온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굴다가 문득 제한 시간, 제한 시간 중얼거리며 허공을 확인했다. 퀘스트의 제한 시간을 확인하는 것 같았는데 안타깝게도 활성화를 위한 퀘스트는 좀처럼 제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편이었다. 사윤은 낙심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는데 노아로서 게이트 공략하면서 퀘스트까지 깨면 일석이조지.”
“…길드장님이 퀘스트를 그냥 깰 것 같지 않아서 이러는 거잖아요.”
“그건 뭐.”
당연한 거지?
사윤이 씩 웃자 건주의 표정이 딱 그만큼 썩어 들어갔다. 사윤은 낄낄 웃으며 어느덧 제 곁으로 온 라이의 발을 쥐었다. 앞발을 쥐고 몇 번 흔들자 라이가 다른 발도 올려 사윤의 무릎을 딛고 섰다.
찹찹.
얼굴을 핥기 시작하는 펜리르에 몇 번 고개를 젓다가 체념하고 내어 주고 있으니 그 모습을 빤히 보던 건주가 정신을 되찾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걘 뭐예요? 전에는 이런 애 없었는데.”
“이재희 소환수. 이래 보여도 너보다 강하거나 너랑 비슷하거나 할 거다.”
“흐음.”
실력이 비슷하다는 말에 건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저거 라이랑 한판 뜨려는 거 아니겠지. 사윤은 펜리르의 혀를 피하면서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생각해 봤다. 눈앞의 라이는 순진했고 한건주는 야비하게 머리 굴리는 걸 잘했으니 한건주가 이길 것 같았다.
일단 예상은 그렇긴 하지만.
“설마 싸우진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주인 있는 남의 소환수를 냅다 치진 않을 거였다. 자신도 그러지 않았는데 설마 한건주가 그럴까.
그런 생각으로 중얼거린 말에 건주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사윤은 제 시선을 피한 그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싸울 생각이었니.”
“…….”
대답이 없다.
사윤은 어이가 없어 라이를 제 등 쪽으로 옮겼다.
하여간 저놈 저거. 불신의 터에서 변신을 채 마치지 못한 몬스터를 칠 때부터 느꼈던 건데 은근히 야비한 자식이었다.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뭐….”
이제 얘기는 대충 끝난 것 같고.
분위기도 풀렸고 앞으로 뭘 할지도 정했다. 대충 일단락이 난 것 같아 라이의 엉덩이를 토닥여 펜리르를 일으킨 사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루고 미뤘던 하얀 털 뭉치의 주인을 찾아갈 시간이라 문 쪽으로 걷고 있으니 잊고 있던 의문이 불쑥 치솟았다. 사윤은 궁금증을 참지 않고 물었다.
“맞다. 너 협회에선 왜 그랬냐?”
“뭐가요?”
“가면 쓰고 왔다가 도로 벗었잖아. 왜 그랬냐고.”
가면 쇼 하러 온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의문이었다. 내심 그가 화가 나서 벗은 것 같다 싶긴 했는데 정확한 건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야 알 수 있는 법이다. 궁금해서 빤히 쳐다보니 건주가 탁자에 놓인 가면을 바라보다 목덜미를 주물러 댔다.
“몰라도 돼요.”
그리 말하는 남자의 귀 끝이 붉었다. 한건주는 입으로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표정으론 진실을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표정이 아니라 피부색이었지만.
뭐만 하면 저렇게 다 붉게 달아오르나?
울 때도 그렇고 지금처럼 부끄러워할 때도 그렇고 참 솔직한 피부였다. 하얘서 더 티가 나는 얼굴을 보며 피식 웃으니 그 웃음소리를 들은 건주가 머리를 헝클였다.
“아 진짜.”
잔뜩 짜증이 난 목소리에 사윤이 낄낄 웃었다.
저거 나한테 정체 들키기 싫어서 숨기고 있다가 이재희 페어링에 눈 돌아가 가면 벗은 거 맞나 보다.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고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까다로우니.
도통 종잡을 수가 없어 어깨를 으쓱인 사윤이 문의 손잡이를 쥐었다.
“거기서 얼굴 식히고 있어. 밖에 나갔다 올 테니까. 아, 가면은 꼭 쓰고?”
놀리듯 말하자 곧바로 베개가 날아왔다. 사윤은 라이를 데리고 민첩하게 방을 나서 문을 닫았다. 턱! 건주가 집어 던진 베개가 제게 닿지 못하고 문에 부딪혀 떨어졌다.
“…진짜 또라이 아니야?”
이전에도 한 번 들었던 말이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방 안에서 들렸다.
이거지.
사윤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꼬리에 건 채로 라이와 함께 종식의 사무실로 향했다. 활짝 웃으며 종식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사윤의 표정을 확인한 종식이 또 무슨 사고를 치고 왔나 싶어 불안함을 드러낸 건 이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