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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71)화 (171/266)

제171화. 어라? (6)

“또 뭐.”

부탁 하나를 들어주었으니 이제 두 개 남았다. 이재희의 페어링을 빼 인벤토리에 넣고 묻자, 은색 페어링 하나만 남은 손을 빤히 본 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해 가만 지켜보니 바닥에 쪼그려 앉은 그가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아.”

작은 탄성을 흘린 건주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페어링을 찾아 도로 손가락에 끼웠다.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이 재연결되었습니다!>

시스템 알림창이 떴다.

기가 막혀서 진짜.

사윤은 코웃음을 치며 눈앞에 뜬 상태창을 지웠다.

북도 장구도 혼자 치더니 이젠 꽹과리까지 알아서 치고 있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저럴 거면 뭐 하러 던진 거야?

그가 페어링을 던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사윤의 이마에 핏줄이 돋은 순간이었다. 건주가 입을 열었다. 생존 본능 한번 기가 막히게 좋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페어링 뺀 적 없어요?”

“없는데.”

“왜요?”

페어링을 왜 안 뺐냐니. 그야….

“뺄 이유가 없었으니까.”

감흥 없는 목소리로 단조롭게 대답하자 건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꼭 원하는 대답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길드장님이라면 괘씸하다고 바로 빼 버릴 줄 알았는데요.”

“괘씸한데 빼긴 왜 빼? 찾아서 두들겨 패야지.”

“…….”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사윤은 뭐가 문제냐는 듯 삐딱한 시선으로 건주를 응시했다. 자기도 도망칠 때 그 정도 각오는 하고 도망친 것 아니던가.

“…두들겨 패긴 하셨죠.”

“그런 거로 팼다고 하면 곤란하지. 밤쥐 애들이 들으면 울겠네.”

뺨 몇 대에 손목 하나 부러진 거로는 어디 가서 제게 맞았다고 명함도 못 내밀 거였다. 사윤은 패기로 작정했으면 포션 두 통을 들이부어야 살 수 있을 만큼 죽일 생각으로 두들겨 팼으니까.

그에 비해 뺨은 양호하지 않나.

힐끗, 제게 맞았던 뺨을 바라보며 살피고 있자 뺨 쪽을 손등으로 툭툭 두들긴 건주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털었다.

“이게 아닌데….”

“뭐가 아니야?”

“…몰라도 돼요.”

어째 받아치는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제가 뭘 했다고 또 저런 태도인가 싶어 고민하던 사윤은 무얼 생각하든 오답일 거란 지난 경험을 떠올리고 생각을 관뒀다. 일이 이렇게 된 거 빠르게 화제를 바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은 두 개는 뭔데.”

“두 개요?”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것 세 가지 말했으니 너도 세 개는 빌어야지.”

“길드장님이 저한테 말한 건 원하는 거라기보단 당부나 협박 같은 말이었는데요.”

“그럼 너도 당부나 협박식으로 말해 보든가.”

자신 있으면.

덧붙인 말에 입을 달싹이던 남자가 다시 침묵을 선택했다.

이 새끼 봐라.

말해 보라 했다고 진짜 말할 생각이었나 보다. 목숨이 서너 개인 것처럼 구는 건 알아줘야 했다.

아니, 실제로 하나 늘어서 오긴 했지.

임시가 붙긴 했지만 한건주의 스킬창에서 봤던 ‘기사회생’은 죽음의 위기에서 그를 한 번 정도는 구해 줄 것이다. 실컷 구르다 왔다더니 그만한 보상은 받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배가 아프다고 해야 할지.

나는 뭐 없냐?

혹시나 해 속으로 시스템을 불러 봤지만 푸른 시스템창은 반응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사윤은 뭘 기대했나 싶어 건주가 내뱉을 요구만 기다렸다.

“동맹을 맺어요.”

“동맹?”

이번에 날아온 요구도 뜻밖이었다.

사윤은 방금까지는 유치하기 짝이 없게 페어링이 어쩌고 팔찌가 어쩌고 하며 애새끼처럼 굴다가 대뜸 운영 얘기를 꺼내는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말해 보라는 듯 턱짓하자 미리 준비해 왔던 건지 건주가 인벤토리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계약서를 꺼낼 줄이야.

늘 제가 건넸는데 건주 쪽에서 먼저 꺼내니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설립한 1인 길드랑 동맹을 맺자는 얘기예요. 길드장님 길드에 도로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 없다면서 왜 호칭은 길드장님이야?”

“그쪽이나 당신은 버릇없어 보이잖아요.”

“넌 원래 버르장머리 없었어.”

“…….”

사실을 알려 줬는데 눈을 치켜뜬다. 저 싸가지 없는 눈 좀 봐라. 원래부터 저랬는데 이제 와서 뭔 예의를 지킨다고.

혀를 차며 의자에 기댄 사윤이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들겼다. 이제 와서 이미지 관리라도 하는 건가. 안타깝지만 그건 제 앞에서 세 살배기 애새끼처럼 울 때부터 글러 먹었다. 노아랑 비슷한 수준으로 울던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남자가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거리감도 느껴지고요.”

예상치 못한 이유였다.

그런 걸 언제 신경 썼다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사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형이라고 부르든가. 아까는 잘만 하더니 왜 이젠 안 해?”

놀릴 의도가 반,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본 게 반이었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대했는데 지가 먼저 형이라 불러 놓고 제가 언급하니 얼굴을 확 구긴다. 아무래도 양심이란 걸 탑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시스템에 잘못 걸린 사람들은 다 이렇게 양심을 잃는 건가?

“그냥 길드장님으로 통일하죠.”

“내 길드원도 아닌데 그렇게 부르면 애들이 질투해서 안 돼.”

“일단 계약서부터 받으세요.”

이것 봐라.

의견 차가 안 좁혀지니 아예 안 부르는 걸 택한 모양이었다. 사윤은 우습지도 않은 수작질에 속아 주는 셈 치고 건주가 건네는 계약서를 받았다.

“동맹은 왜 제안하는 건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으니까요.”

“내가 너랑 동맹해서 얻을 이익은 뭐고.”

“그걸 묻는 순간 거래가 되는 거 아니에요?”

“내 동맹은 늘 이랬어.”

태연하게 말하자 건주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시선을 보냈다. 조금 뒤 그가 게이트 공략 후 얻는 A급 이하의 아이템은 모두 넘길 테니 필요시 서로 협력할 것을 요청했다. 나름대로 용을 써 본 것 같은 제안에 사윤은 픽 웃으며 사인했다. 이후에야 아차 싶었다.

저 머리 좋은 새끼가 정말로 동맹이랑 거래에 대해 뭘 몰라서 저런 조건을 내걸었을까?

계약서에 사인할 때까지만 해도 사윤은 건주가 내민 조건을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다. 밤쥐에는 아티팩트가 넘쳐났으니 이득이랄 게 딱히 없었다.

그런데도 그 한건주가 머리를 데굴데굴 굴려 간신히 생각해 낸 조건이란 게 재밌어 사인해 줬는데 생각해 보니 놈은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저를 떠보다 도망간 사람이 그렇게 허술하겠는가.

재회 이후 어리숙한 모습만 보인 게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런 제 생각이 맞았음을 증명하듯 건주가 부드럽게 웃었다.

“계약서 조항 보시면 동맹 기간 동안 상대에게 목숨이 위험할 수준의 위해를 가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적혀 있어요. 동맹 기간은 1년이고 서로 별도의 얘기가 없을 시 자동으로 1년씩 연장될 거예요. 잘 부탁드려요.”

웃음이 여유로웠다. 눈을 살살 접으며 웃는 꼴을 보니 확실해 사윤은 헛숨을 내쉬었다.

맞네. 이 새끼가 내 등을 쳐 먹은 게 맞았다.

괘씸해서 미간을 홱 좁혔다가 짜증을 털었다. 어차피 그가 말하는 세 가지 요구는 전부 들어줄 생각이었으니 이 정도는 손해도 아니었다.

뭐. 동맹 비슷한 걸 생각해 두긴 했으니까.

하도 동등, 동등 거리길래 이재희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협력 관계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제 기분이 불쾌한 것 말곤 그리 나쁘지 않아 숨을 고르자 건주가 바로 다음 요구를 꺼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같이 지내고 싶은데요.”

“…음?”

한 번에 이해 가지 않아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말하라는 시선을 보내니 건주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길드장님 지내는 곳에서 같이 있고 싶다고요. 제가 탑에 좀 오래 갇혀 있어서 나름대로 사람 온기가 필요한 상황이거든요.”

“그걸 왜 나한테서 채워?”

“길드장님에 대해 알겠다고 탑으로 간 거니까요.”

“네가 멋대로 간 걸 왜 나한테 채우냐고.”

“억지 부리고 있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세 가지 요구를 들어주신다길래 요청해 봤는데, 안 돼요?”

고개를 비스듬히 한 남자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 사람은 여기서 지내는 것 같던데.”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 이마를 짚은 사윤이 손을 내저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골치 아파질 거란 예감이 팍팍 들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종식아.

어쩌다 밤쥐 길드가 하숙집이 됐을까.

사윤은 고맙다고 대답하는 건주를 보며 종식을 찾았다. 어디서 지낼 거냐고 물으니 자연스럽게 제 방이라고 답하는 모습을 보고선 종식을 찾을 의지마저 잃어버렸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대체 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시스템이 뭔 짓을 해 놨길래 한건주를 이 지경으로 바꿔 놨나 싶었다. 1년 전 처음 만난 그는 분명히 개인 공간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고 제게서 멀어지고 싶어 안달이 난 새끼였는데.

사윤은 기가 차서 허허 웃으며 제가 들어준 세 가지 요구를 다시 곱씹었다. 하나는 이재희의 페어링을 빼는 거였고 하나는 그와 동맹 관계를 맺는 거였으며 하나는 자신의 거처를 밤쥐 길드로 옮기는 거였다.

처음에는 황금 같은 기회를 왜 이런 데다 써먹나 싶었는데 모아 두고 보니 나름대로 알뜰히 잘 빼먹었다.

검은 머리 짐승을 들이는 게 맞는지 고민하던 그때였다.

<‘활성화를 위한 첫 번째 걸음’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퀘스트를 진행하세요! (º □ º 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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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활성화를 위한 두 번째 걸음]

종류: 저항하는 자 퀘스트

진행 인원: (2/2)

‘성향 보유자와 협력해 게이트를 클리어하세요.’

상세: 천상천하 유아독존 성향을 보유한 각성자와 A급 이상의 게이트 협력 클리어로 우호적인 관계 증명하기

보상: 활성화를 위한 세 번째 걸음 진행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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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와 재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뜨지 않았던 게으른 시스템창이 이제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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