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어라? (5)
“…끝내자고 얘기한 적은 없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그가 진정되고 나면 말할 생각이었다. 뜸을 두고 뱉은 말에 침대에 앉아 있던 건주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안 맞는 거라 얘기하고 그대로 나가려 하는데, 그게 끝내자는 거랑 뭐가 달라요?”
“아니, 건주야. 애초에 너랑 내 사이에 끝낼 게 있긴 했니. 뭐 이리 과민 반응 해?”
시작한 것도 없는데.
필드에서 쌓아 올린 공든 탑은 무너져 내린 지 오래였고 그와 자신의 관계는 길드장과 길드원이 전부였다. 지금은 그마저도 깨졌으니 도로 백지다. 끝내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그가 밤쥐나 제비에 들어오길 했는가 아니면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는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상대가 침묵했다. 사윤은 분한 건지 억울한 건지 짐작이 안 가는 얼굴로 입술을 씹다가 생각에 잠긴 듯한 건주를 보며 의자에 도로 앉았다. 이야기를 끝낼 생각이었는데 저 상태를 보아 하니 이대로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알고 싶은 게 있다고 했지.
조금 전 맞춰 가자며 건주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가 궁금해한 것들은 제가 전부 말해 줬는데 또 뭐가 궁금한 걸까.
과거도 알려 줬고 그가 필요한 이유도 알려 줬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더 궁금할 거리가 없었는데 또 뭐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건지 모르겠다.
성향 보유자들은 다 이런 성격인가?
이재희도 그렇고 한건주도 그렇고 호기심 왕에 탐구 왕이었다. 저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리 궁금한 게 많고 알고 싶은 게 많은 건지.
게다가 그들이 알아내고자 하는 것과 밝히고자 하는 건 늘 까다롭고 어려운 것들이라 소모되는 에너지와 시간이 많았다. 이재희야 뭐 세상을 구하겠다는 창대한 목표가 있었으니 그만한 희생을 해도 그렇구나 싶었지만 한건주는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냥 미친놈이라서 그런가?
“왜 이렇게까지 해?”
순전히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다 문득 제 물음이 익숙해서 기억을 복기했다.
한건주도 딱 이런 말을 했는데.
왜 이렇게까지 잘해 주냐고.
그때 그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짐작해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때 한건주는 속이 시커매 안 보일 정도였으니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기분이었을 거다.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남자가 입을 달싹였다. 옅게 깔려 있던 정적이 깨졌다.
“저도 몰라요.”
“…뭐?”
“그래서 곁에서 도와주겠다는 거잖아요.”
“네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어서?”
“네.”
허.
대답이 담백하기 짝이 없어 더 기가 막혔다. 그 스스로도 모르겠다는 속내를 알아내기 위해 눈을 마주쳤지만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그때 이재희가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연하 애인이 어리광 부리면 받아 줘요.’
그 새끼는 대체 뭘 본 거야?
당시에는 우는 한건주 때문에 하도 정신이 없어 딴지 걸 타이밍을 놓쳤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천기를 읽는 남자의 말은 뜬금없고 수상했다. 대체 그 눈으로 뭘 봤으면 연하 애인이란 말이 나오는 건지, 여길 나가면 이재희부터 털어 봐야 할 것 같았다.
“…….”
방에는 다시 어색하고 건조한 침묵이 깔렸다. 건주는 또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고 사윤은 지금까지의 일을 곱씹느라 바빴다. 자기 감정을 모르겠다는 저 말이 무척이나 애새끼처럼 들리기도 했고 아주 약간은 공감이 가기도 했다.
사윤도 요즘 제 감정을 쉬이 정의 내리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저와 한건주는 그 케이스가 조금 달라 보였다. 자신은 감정을 판단할 여력이 안 돼 손 놓은 상황이었지만 한건주는 사력을 다해 살피는데도 그 감정이 뭔지 알아내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
하. 시발 누가 애새끼 아니랄까 봐.
저런 말을 왜 자신한테 해서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부모님 잘 계시다며. 거기 가서 말해 보지. 괜히 라이만 북북 소리 나게 쓰다듬고 있자 한참 만에 건주의 입술이 재차 열렸다.
“그래도 전처럼 수상한 마음은 아니에요.”
“전에 수상했다는 건 알고 있네.”
“…뭐.”
남자가 말을 얼버무렸다. 사윤은 피식 웃었다. 필드에서 느꼈지만 나름대로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성격이었다.
깊게 들이마신 숨이 천천히 몸 안을 가득 채웠다가 뱉어 내는 숨에 다시 빠져나갔다.
“믿어 볼까.”
혼잣말처럼 나직이 흘러나온 말에 건주가 반응했다. 사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자 의문 섞인 시선이 제게 닿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건주의 턱을 쥐었다.
“……?”
그의 눈빛에 당황이 섞일 때쯤 사윤은 건주의 턱을 좌우로 휙휙 돌렸다. 손길을 따라 고개가 돌아가니 다양한 각도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독기는 확실히 빠졌네.”
두 번을 연속으로 울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정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막 재회했을 때 느꼈던 독기는 확실히 사라져 있었다. 이 편이 훨씬 나았기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세 가지만 알아 둬, 건주야.”
“뭔데요.”
“나 눈 싸가지 없게 뜨는 새끼 싫어해.”
기다렸다는 듯 내뱉은 말에 건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윤은 딱 그 눈이라며 감탄했다. 어떻게 제 마음에 안 드는 눈을 저렇게 골라서 뜰 수 있는지 저것도 재능이었다.
“내가 그런 새끼들은 다 잡아 놔야 직성이 풀려서 계속 곁에 있으려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
“원래 신뢰를 잃으면 받았던 특혜를 잃는 법이잖니. 필드에서처럼 내가 봐줄 거라 생각하지 말고 눈 똑바로 뜨고 다녀.”
밤쥐의 길드원들이 괜히 건주를 보고 놀란 게 아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그리 특별 취급 하는 건 처음이었다. 남들이었다면 팔다리 네 번씩 부러트려 놔도 모자랄 판에 딱밤 몇 대나 조롱 몇 번으로 넘어가 주는 건 특혜 그 자체였다.
그리 대했는데 도망쳤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 건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사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수직적인 관계는 별론데요.”
그러고 보니 동등해질 필요가 있다고 했었지.
길드장과 길드원이란 관계가 끊어졌으니 그와 자신의 관계는 전과 같지 않았다. 사윤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느지막이 건주의 얼굴을 놓았다.
“괜찮아. 이건 지시나 명령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내 성격이라서.”
“무슨 말이에요?”
“딱히 내 아랫사람이 아니라도 눈 그딴 식으로 뜨고 있으면 족치고 본다는 얘기지.”
“…….”
건주가 할 말을 잃고 황당하게 사윤을 쳐다보았다. 이것도 오랜만에 보네. 예전에는 왕왕 있던 일이었기에 피식 웃은 사윤이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내가 배신당하는 걸 싫어해. 계속 강조했으니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사윤이 시선을 내려 건주의 발목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흘린 살기를 느낀 건지 남자가 움찔 떨며 제 발을 뒤로 밀었다. 예나 지금이나 감이 좋은 건 여전한 듯했다.
“네가 먼저 맞춰 가자고 말해 놓고 또 도망가면 그게 배신이지 뭐겠니.”
“…….”
“네발로 기고 싶으면 또 도망가 봐.”
다음엔 손목이 아니라 발목이었다. 한쪽이 아니라 양쪽이었고. 끝까지 발목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확실히 경고하자 한 박자 늦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음대로 해요.”
사윤이 웃을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까진 자유롭게 놔둘 생각인데, 내일부턴 웬만하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네가 또 안 보이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 나도 짐작이 안 되거든.”
이재희가 없으면 충동 조절을 못 해서.
그나마 최근에는 이재희가 옆에서 잘 막고 있어 적당히 사람처럼 살고 있었는데, 그가 없는 상황에서 한건주가 도망가면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 저도 예측이 안 갔다.
한바탕 다 엎을 수도 있었고 이번에야말로 저 목을 꺾어 버리겠다며 살기등등하게 찾아갈 수도 있었고 주변 사람들을 한 명씩 납치하고 협박해 압박할 수도 있었고.
떠오르는 방식은 여러 개였는데 문제는 그 방법을 한 번에 다 쓸 수도 있다는 점이었기에 미리 경고하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인상을 쓴 건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동등한 관계예요?”
“불만 있으면 더 강해져서 오든가.”
“…….”
“기껏 S급이 되면 뭐 하니. 손목 좀 세게 쥐었다고 질질 짜는데.”
“그게 좀 세게 쥔 수준이에요?”
황당해서 받아치는 남자의 말은 무시했다. 원래 불리한 말은 받지 않는 게 유리한 법이다.
“너도 말해.”
“뭘요.”
“네가 원하는 거.”
동등한 관계를 원했고 그걸 위해 떠났다고 했으니 구색 정도는 맞춰 줄 생각이었다. 제가 요구한 게 세 가지였으니 그의 요구도 세 가지 정도 들어줄 마음이 있어 고개를 까딱이자 한건주가 입을 열었다.
뭐 아이템 달라거나, 말 좀 예쁘게 하라거나 그런 거겠지.
뭘 원할지 예상이 가 마음을 편히 먹은 순간이었다.
“그거 빼요.”
“…이거?”
“네. …꼭 필요한 거예요?”
한건주가 제일 첫 번째로 요구한 건 사람 막 던지지 말라는 것도, 협박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손에 끼고 있던 이재희의 페어링 해제였다.
사윤은 기가 막혀 제 페어링을 한 번, 건주를 한 번 그리고 옆에서 눈치 없게 꼬리나 흔들고 있는 라이를 한 번 바라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반지 하나가 뭐라고.
“이거 쟤 소환용 반지야.”
라이를 눈짓하며 말하니 곧바로 또 다른 요구가 돌아왔다.
“그럼 팔찌로 만들어 달라고 해요.”
“네가 지금 무슨 요구 하고 있는 건지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한심한 시선을 던지자 건주가 입술을 꾹 씹었다. 에휴 시팔. 또 울 것 같아 반지를 매만진 사윤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재희한테 팔찌 있는지 물어봐야겠네.
유치한 애새끼 때문에 성인 둘이 고생이었다.
…눈앞에 있는 놈도 성인이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