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어라? (4)
한참을 소리 죽여 울던 건주는 흐느끼는 울음을 듣다 못한 펜리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앞발로 그의 얼굴을 턱 가리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
컹!
빤히 쳐다보니 뭘 보냐는 듯 짖는다. 당황과 놀람이 섞인 눈으로 펜리르를 본 건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 들쑥날쑥했던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저거 참 영물이라니까.
뭐, 소환수에다 펜리르였으니 영물이라는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는데 사윤이 보기에 이재희의 하얀 털 뭉치는 확실히 다른 소환수들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신묘한 기운이 있었다. 종족 특성에 테라피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어린 펜리르의 특징인 건지.
궁금해서 쳐다보고 있으니 시선을 느낀 펜리르가 사윤을 돌아보았다.
“왜.”
작게 대꾸하자 라이가 꼬리를 축 떨어트리고 사윤과 건주를 번갈아 보더니 낑낑 울었다. 사윤은 그 모습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라이랑 오래 있다 보니 작은 꼬리 짓이나 표정, 짖을 때의 소리 등으로 펜리르의 기분이나 의사를 알 수 있게 됐는데 지금 라이의 반응은 확실히 답답하고 슬픈 감정이 강했다. 우는 건주는 달래야겠고 제 옆에는 오고 싶고 아주 혼란한 모양이었다.
쓸데없이 정이 너무 많이 들었지.
남의 집 소환수인데 제집 개처럼 기르고 말았다. 이렇게 된 거 이재희한테 라이 소환용 반지 몇 개를 더 뜯어낼 생각을 하며 손을 털었다. 그냥 붙어 있으란 신호를 보내자 앞발을 내린 라이가 건주의 허벅지에 자리 잡았다. 울음을 그친 남자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제 허벅지 위를 따뜻하게 데우는 동물의 털을 매만졌다.
방 안이 잠시 고요해졌다.
“한건주.”
이름을 부르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조금 빨갛게 붓긴 했어도 물기는 다 가신 게 감정을 추스르고 진정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햇빛에 익은 듯 달아오른 눈가를 빤히 보고 있으니 눈살을 찌푸린 그가 시선을 피했다.
“자주 우네.”
“…….”
나직한 말에 건주가 시선을 내렸다. 사윤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을 반추했다.
그가 저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는 모습이라곤 넉 달간 두 번을 본 게 전부였다.
성을 빼앗겼을 때와 노아의 죽음 당시.
그 두 번이 다였는데 탑에 갇혀 지내는 동안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건지 걸핏하면 저렇게 운다. 원래 저렇게 쉽게 우는 애가 아니었는데. 아니, 약한 건 전부터 약하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사윤은 문득 눈을 가늘게 뜨고 건주를 살폈다.
저거 S급 됐다고 했지?
느껴지는 기세는 확실히 변하긴 했는데 정확히 얼마나 성장한 건지 가늠이 안 갔다. 푸른 기운을 미약하게 머금은 흑안이 건주의 상태를 확인했다. 완전한 진정을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했으니 그가 안정을 취할 때까지 제 궁금증을 털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천재의 눈을 써 건주의 상태창을 띄웠다.
<한건주 님의 상태창>
나이: 23
성별: 남
등급: S급
칭호: ‘신들이 주시하는 자(?)’, ‘제가 좀 잘났습니다(A)’, ‘만물을 습득하는 자(S)’, ‘하늘 아래 천재는 한 명뿐(A)’, ‘압도적인 재능(SS)’, ‘시간 여행자(?)’, ‘임시 탑 공략자(SSS)’, ‘등불을 따라가는(A)’, ‘1인 길드 설립자(A)’
스킬: [처세술(A)], [적응(SS+)], [통찰력(S)], [달변가(A)], [무기 마스터(SS)], [침착(A+)], [인내(S)], [일격참살(SS)], [만검(S+)], [기습(A+)], [(임시) 기사회생(SS)], [시기 유발(A+)]
전용 스킬: [생존 감각(SS+)], [간파(SSS)]
미개방 스킬: [그림자 지배(L)]
특전: ‘수준 차이가 제법 나네요(A)’. ‘재수 없겠지만 각성 일주일 차입니다(S)’, ‘타고난 센스(A)’, 진흙투성이 꽃(A)’, ‘만개하는(SS+)’, ‘울어도 괜찮아(A)’, ‘(임시) 운명을 위하여(SS+)’
-능력치
근력: S+(SSS)
민첩: SS-(SSS)
체력: S(SSS)
행운: S-(S+)
시발 S가 몇 개야
굉장히 오랜만에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사윤은 괜히 확인했다가 눈을 버린 것 같은 건주의 상태창을 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누가 보면 1년이 아니라 한 10년은 수련하다 온 사람의 상태창인 줄 알 거였다.
고작 1년 만에 새로운 칭호랑 특전이 뭐가 이리 많이 생겼어? 능력치 상승 폭은 또 뭐고.
스킬은 생길 수 있다. 사용자의 전투 방식의 행동 특성에 따라 새로운 스킬이 생기는 경우는 왕왕 있었으니까. 이전에 시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몬스터를 처치할 때도 생기는 게 스킬이었으니 한건주의 두 줄짜리 스킬창이 갑자기 약 네 줄로 늘어난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칭호랑 특전은 그렇지 않았다. 그 두 가지는 말 그대로 살아온 삶과 그간 이룬 업적을 평가해 주는 거기 때문에 1년에 한 번 얻을까 말까 했다.
물론 사윤처럼 시스템에 시달려 격정적인 삶을 살면 1년에 두 개나 세 개 정도 얻을 수 있긴 했지만 한건주는 고작 두세 개 는 게 아니었다.
대체 뭘 하다 오면 저렇게 될 수 있는 거지? 예정된 탑이라고 했나. 나도 한 번 들어가야 하나?
성장이 가파른 수준이 아니라 그냥 일직선이었다.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상승 곡선을 그려야지 갑자기 혼자 수직에 가까운 성장을 보이는 게 말이 되나.
“음.”
그의 상태창을 보니 자신은 여태 놀기만 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본 드래곤을 상대하며 얻은 능력치와 칭호, 스킬은 시간이 되돌아가면서 사라졌고 그것 외엔 위협을 느낄 만한 사건이 없어 사윤의 능력치는 1년 전과 유사했다. 중간에 떨어진 등급을 올리느라 쏟아 낸 시간이 긴 탓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쟤 때문에 그런 거잖아.
시선이 싸늘해졌다. 사윤이 빌어먹을 사기꾼을 보듯 건주를 노려보며 제 상태창을 켰다. 경이로운 변화가 있던 한건주에 비해 제 상태창은 특별히 말할 게 없었다. 잔잔한 물결도 아니다. 호수와도 같은 안정감이었다.
요새 쉽게 살긴 했지.
정확히는 이재희를 만나고 나서부터 휴식 시간을 꽤 가진 것에 가까웠다. 쉴 만큼 쉬었으니 슬슬 다시 차이나 넘버 식스로 활동해 볼 시간인가 싶어 의뢰용 핸드폰을 꺼냈다. 새로 온 요청이 없나 메일을 확인해 보니 각국에서 온 미공략 게이트 처리 요청이 차이나 넘버 식스용 메일함에 처박혀 있었다.
이 중에 골라 가면 되는 거지.
어디를 갈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길드장님. 눈앞에 있던 남자가 저를 불렀다.
“처음부터 그 얘길 해 주셨으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미묘한 말이었다. 탓한다고 하기엔 어투가 담백했고 미련이라고 하기엔 건조했다. 그렇다고 냉소적이지도 않았다. 구태여 따지자면 그래, 무엇이 잘못됐는지 오류를 체크하고 그 문제를 말해 주는 것에 가까워 사윤은 픽 웃었다.
“그랬겠지. 근데 내가 처음부터 이 얘길 했으면, 네가 지금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
“배신하지 않았을 거라 확신해?”
사윤이 자조적인 웃음을 덧붙이며 다리를 외로 꼬았다.
“나는 조금 전에 네가 적은 계약서도 믿기 어려워 찢고 그냥 죽일까, 수차례 고민했는데 그때의 내가 널 믿을 수 있었겠니.”
건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태도가 영 수상했음을 인지하고 있는 눈치였다. 사윤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숨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가 다시 무거워지는 걸 보아 하니, 일이 더 꼬이기 전에 대화를 마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너를 믿지 못했고 너는 나를 속이려 했으니 처음부터 솔직하게 얘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
“필드에서는 그래, 네가 나를 알려 했는데 내가 알려 주기 싫었으니 일이 꼬였고.”
천천히 사실을 되짚어 주자 건주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저 저를 똑바로 바라보기만 했다. 할 말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잠시 기다려 봤는데도 그가 입을 열지 않아 사윤은 삼켰던 숨을 토해 내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우린 그냥 지독하게도 안 맞았던 거야, 건주야.”
이재희에게 배웠던 것을 그에게도 알려 주며 라이를 불렀다. 하얀 펜리르가 곧장 꼬리를 흔들며 일어나 사윤에게 다가왔다.
“가자.”
자리를 비울 것을 알리며 건주를 힐끔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건지 표정이 어두워진 남자가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하나.
같이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꼴을 보아 하니 무리였다. 사윤은 고민하다 펜리르만 데리고 방문을 열었다. 생각 정리되면 나와.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그때 얘기할 테니까. 그리 덧붙이려던 순간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맞춰 가면 되잖아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사윤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안 맞던 걸 맞추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건데.”
“…….”
“길드장님은 제가 필요하고 저도 제 나름대로 알고 싶은 게 있으니 지금부터 맞춰 봐요.”
…그렇게 끝난 것처럼 얘기하지 말고.
마지막 말은 아주 조그맣게 들렸다.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가 얘기하는 그를 사윤은 조금 멍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