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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67)화 (167/266)

제167화. 어라? (2)

“애인이냐고?”

“네.”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한건주의 눈빛이 진중했다.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니, 어딜 봐서?

사윤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구겨지는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미친놈을 애인으로 두는 취미는 없었다. 이재희가 들었다면 제가 할 말이냐며 핀잔을 늘어놓겠지만 일단은 그랬다.

더군다나.

“쟤 애인 있어.”

이재희에겐 이미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뭘 보고 그런 오해를 한 건지 모르겠다. 탑에 1년간 갇혀 있었다더니 사람을 못 만나 인간관계를 구분하는 능력이 저하되기라도 한 건가.

추측하고 있으니 건주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문을 향해 도륵 눈을 굴린 그가 사윤을 살피며 이전보다 크게 얼굴을 찡그렸다. 이제야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했음을 인지했나 보다.

“그럼 짝사랑이라도 해요?”

“뭐 시발?”

착각은 자신이 하고 있었다. 한건주는 전혀 진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짝사랑?

짜아악사아아랑?

사윤은 맹세컨대 27년을 살면서 누군가를 짝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남들이야 저를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윤은 그렇지 않았다. 사윤이 사랑했던 것은 대개 가족이었으므로.

예를 들어 부모님이라든가.

혹은, 그날의 옆집 아저씨라든가.

사윤이 품은 사랑은 가족애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어리고 순진했던 시절에 있는 사랑이었지 성인이 되고 나선 누군가를 딱히 품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짝사랑?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헛웃음을 연이어 흘린 사윤은 눈치가 없다 못해 마이너스로 떨어져 버린 것 같은 건주를 바라보았다. 원래 이렇게까지 멍청하고 눈치 없지 않았는데. 불현듯 눈동자에 의심이 깃들었다.

혹시 다른 수작인 건가.

이 속 모를 새끼가 자신을 엿 먹일 방법으로 새로운 수를 쓰는 건가 싶었다. 눈을 가늘게 뜬 사윤은 조소를 지었다.

안 속는다.

눈앞의 남자에게 뒤통수를 맞는 건 한 대면 족했다.

“그런 거 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일 없으니 괜한 말로 시간 벌지 말고 네 얘기나 해. 애초에 애인이 있었던 적이 없는데 뭔 오해야?”

혀를 차며 말하자 건주가 의심하는 눈으로 사윤을 살폈다. 이렇게까지 말해 줘도 제가 그 짝사랑인지 뭔지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눈빛에 도리어 사윤이 당황했다.

아니, 수작질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대체 뭐 때문에 그런 오해를 했는지 물어라도 보자 싶을 때였다.

“애인이 없었다고요?”

“음?”

“살면서 한 번도?”

그렇게 생기진 않았는데.

덧붙이는 말이 묘하게 기분 나빴다. 그가 저를 무시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던 사윤은 입가를 매만졌다가 일단 대답했다.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애인 많은 화려한 과거가 자랑이 될 이유도 없었고, 애인 없는 과거가 부끄러울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살아가야 하는데 애인 그게 뭐 별거라고.

“어.”

“왜요?”

“……?”

지체 없이 돌아온 물음에 사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안 사귀는 이유, 뭐 그런 걸 물어보는 건가?

이런 쪽의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이런 물음을 던지는 저의가 뭘까. 미인계로 사람을 유혹해 등쳐 먹기라도 하려는 걸까?

그를 처음 봤을 때 조금 더 자라 젖살이 빠지고 날렵한 인상이 된다면 사람 여럿 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그걸 제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기막혀 숨을 참으니 한 번 더 건주가 저를 불렀다.

“무슨 생각 해요?”

네가 나한테 수작질 부린다는 생각.

차마 그대로 말할 순 없어 쓸데없는 생각을 치우고 그의 물음을 곱씹었다.

왜 애인이 없었냐니.

그야….

“애인 같은 걸 둘 여유가 있었나.”

사윤이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헛웃음도, 조소도 아니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입매에 걸리자 건주가 왜 여유가 없었냐고 물었다. 사람이 탑에 갇혀 지내더니 무슨 물음표 살인마가 되어 돌아왔다.

황당해하던 사윤은 말해 달라고 종용하는 이를 보며 제게 있던 추궁의 권리가 그에게 넘어가는 걸 느꼈다.

네게도 물어볼 권한이 있다, 이거지.

시스템의 퀘스트를 받고 농락당하듯 1년간 탑에 갇혀 있었다는 말에 이재희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 걸 보면 그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맞긴 한 모양이었다.

뒤통수 맞은 전적이 있어 여전히 의심스럽긴 하나 결과는 부정할 수 없는 법이다. 제가 뭐라 생각하든 그가 저를 이해해 보겠답시고 1년을 고생하다 왔으면 그 1년 치의 값은 치러 주어야 했다.

그건 시스템이 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동시에 시스템이 내어 줘서도 안 됐다.

자신의 삶이었으니까.

얘기를 하고 말고의 선택권은 제게 있어야 했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시스템을 통해 제 비밀을 캐내려 했던 그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자신은 말하고 싶지 않았고 한건주는 제가 덮어 놓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한 것뿐이었으니까.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이다. 한건주는 단지 제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본성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줄곧 외면하려던 그 사실을 받아들인 사윤은 재촉하지 않고 제 말을 기다리고 있는 건주를 빤히 응시했다.

…직접 말하는 건 두 번째인가.

종식 때는 제 말실수로 그가 눈치챘고, 이재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천기를 읽어 제 비밀을 알아냈다. 자신이 직접 판단을 내려 비밀을 고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기에 사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건주.”

“말해요.”

“너 이전에 나한테 내 비밀을 들은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아니.”

“남한테 얘기한 적이 있어요?”

“……?”

대화의 핀트가 묘하게 어긋났다. 이렇게 무게 잡아 얘기하면 보통은 겁에 질려 벌벌 떨거나 궁금하지 않다고 듣지 않으려 발악하거나 하는데 한건주는 아예 논점 자체를 놓치고 있었다.

그 탓에 제 계획이 삐끗, 어긋나는 걸 느낀 사윤이 묘한 눈으로 건주를 바라보았다. 당최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없었겠니. 나도 사람인데.”

그런 실수를 한 번쯤은 해.

헛숨과 함께 덧붙이자 건주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실수는 한 번만 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건주야.”

저거 슬슬 필드에서의 버르장머리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사윤은 그의 신경질이 수용성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었기에 화장실 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조용히 들을 테니 말해요.”

곧바로 만족스러운 대답이 떨어졌다.

진작 이렇게 나올 것이지.

아무래도 목숨이 두세 개쯤은 있는 게 분명했다. 남들 같았으면 이쯤에서 죽을까 봐 벌벌 떨 텐데 그러지도 않고.

…아는 거지.

제가 그의 다리를 부러트리든 목을 조이든, 손목을 으스러트리든 어떤 폭력을 행해도 죽이진 않을 거란 걸.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저리 겁 없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호구 다 됐네, 진짜.

우습게 보인 것 같아 속으로 중얼거린 사윤이 어디까지 대화했는지 곱씹었다. 기억을 헤집어 저 아래 깊이 묻어 둔 일을 잠시 꺼내 들춰 보았다가 도로 덮었다.

“너 이전에 내가 비밀을 말해 준 애는 내 손에 죽었어, 건주야.”

“…….”

“그 새끼가 내 비밀을 알고 뒤통수를 쳤거든. 감히 배신을 결심하길래 놈을 비롯해 배신에 가담한 새끼들을 모조리 죽였지. 그때가 한창 밤쥐가 성장하던 시기였는데 덕분에 쌓아 올린 성적이 다 재가 됐다며 종식이 하소연하더라.”

사윤은 퍽 재밌는 얘기를 하는 것처럼 웃으며 말했지만 건주는 그를 따라 웃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시작한 얘기를 갑작스럽게 끝맺은 사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예상이 안 가는 짙은 흑안을 마주 보며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 넌 그러지 마라, 건주야.”

“…….”

“내 손으로 널 죽일 일 없게 하라고. 그렇게 못 하겠으면, 듣지 마.”

들을 거면 배신 안 하겠다고 계약서라도 한 장 쓰고.

사윤은 인벤토리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냈다. 누군가의 비밀을 들을 거라면 그 비밀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눈앞의 어린 뱀 새끼가 그 준비가 되어 있을지 의문이라 목소리를 낮게 깔자, 사윤이 건넨 계약서를 바라본 건주가 망설임 없이 그걸 받아 사인했다. 제 비밀을 타인에게 발설하거나, 악의적으로 이용할 경우 목숨을 내놓겠단 계약서였는데도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사윤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제게 계약서를 건네는 건주의 모습이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길드 가입 계약서에 망설임 없이 사인하던 그 모습을.

“사인했어요.”

태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바라는 거 해 줬으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도 달라는 듯, 저를 재촉하는 듯한 시선에 사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 봐라.

오랜만에 느끼는 작은 희열이다. 사윤은 눈꼬리를 길게 빼곤 건주가 건넨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그의 이름 석 자가 깔끔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예전에 봤던 사인과 똑같았다.

그래, 네가 언제는 내 예상대로 행동한 적이 있니.

중요할 때마다 제 생각을 벗어나 놀던 한건주다. 사윤은 웃음을 흘리며 받은 계약서를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목숨 하나를 받았으니 삶 하나로 대가를 쳐줘야 할 시간이었다.

“진정한 인류의 악.”

저 아는 얘기가 나오자 건주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더 얘기해 보라는 눈빛이 강해진다. 어떤 욕구마저 느껴져 피식 웃은 사윤은 이게 그리 알고 싶은 건가, 생각에 잠기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뭐라고 예상했는진 모르겠는데 그거 나도 알고 있는 이름 맞아, 건주야.”

“…….”

“시스템이 강제로 부여한 내 성향이 딱 그런 이름을 하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지.”

누구를 비웃는 건지 모를 냉소를 흘린 사윤이 눈을 감았다. 오래된 얘기가 물 밑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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