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어라? (1)
“음… 안 좋은 생각일 텐데요, 그거.”
차분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사윤과 건주의 사이를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하얀 털 동물을 쓰다듬으며 발언한 남자가 제게로 향한 두 사람분의 시선을 받고 살짝 웃었다. 그의 고개가 건주에게로 돌아갔다. 털을 쓰다듬던 손이 내려가 불시에 거대한 펜리르의 꼬리를 쥐었다.
켕!
펜리르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 짖음 한 번이 무거웠던 분위기를 경쾌하게 바꾸어 하하, 웃은 남자가 건주를 돌아보며 눈꼬리를 휘어 보였다. 부드럽다 못해 따뜻한 미소다. 미소만으로 설원도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건주에겐 그리 느껴지지 않았던 건지, 침대에 앉아 있던 그가 몸을 뒤로 빼고 의심스러운 시선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는 솔직하게 말해 보는 게 나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해요?”
권유하는 듯한 어투였다. 얼핏 자애롭게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에 건주가 눈꼬리 끝을 뾰족하게 올렸다.
“무슨 말이에요?”
“알고 있잖아요.”
경계 어린 목소리와 나긋한 음성이 대조되었다. 사윤은 의자에 앉은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것들 봐라.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제 방에서 저를 배제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은 사윤이 팔뚝 위에 올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손끝의 지문이 살갗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둘의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내버려 둔 이유는 하나였다.
뭔가를 본 것 같았으니까.
흘러간 시선이 재희에게 닿았다. 검은 눈동자에 자리 잡은 짜증이 일 보 물러나고 그 자리에 흥미가 깃들었다.
이재희가 꿰뚫어 볼 수 있는 천기는 어디까지일까. 그는 어디까지 내다 보고 어디까지 읽을 수 있는 걸까.
문득 그의 성향이 다시금 떠올랐다.
흐름을 비트는 자.
곱씹어 생각해도 이재희에게 딱 맞는 옷이었다. 그가 엮이면 어떤 식으로든 판도가 바뀌었으니까.
하여튼 신기한 놈이란 말이지.
사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남자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의 눈동자에 탐구열과 흥미, 자비 등의 감정이 가득한 걸 보면 그가 한건주로부터 무언가를 읽은 건 분명한 것 같은데 무얼 읽은 건지 말하기는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고민하며 턱을 매만지는 모습이 그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천기누설을 사용하기엔 애매하다 이건가. 그도 아니면 남은 수명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있는 건가.
사윤은 떠오른 추측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재희가 자신들의 일에 간섭하면 간섭할수록 그가 불나방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제 목숨은 생각 안 하고 거대한 불로 달려드는 불나방 말이다.
허튼짓을 하기 전에 상황을 수습하는 게 좋을 듯했다.
이대로 저들의 대치를 내버려 두면 답답함을 참지 못한, 혹은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이기지 못한 이재희가 또 피를 토하며 천기를 발설할 수도 있었으니.
사윤은 다시 고개를 돌려 도망쳤던 제 애새끼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예쁜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흠씬 두들겨 패고 싶었는데, 낯선 사람과 조우한 고양이라도 된 양 바짝 털 세우고 경계하는 얼굴은 또 예쁘긴 더럽게 예뻤다.
솔직하게 말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던가?
분명 건주를 향한 제안이었지만 저 역시 그와 비슷한 제안을 그에게 받은 적이 있었다.
쟤가 나랑 같은 제안을 들었다는 건, 같은 생각을 했다는 소리인데.
뭘 숨길 생각이야?
사윤은 잠시 시선을 가라앉혀 과거의 기억을 헤집었다. 이재희가 제게 충고를 해 주었을 때의 기억을.
“그저 성향 차이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혼잣말한 사윤이 묘한 눈싸움을 하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둘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건주.”
부름에 이재희를 주시하고 있던 남자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저를 돌아보았다. 왜 부르냐는 듯한 시선에는 여러 감정이 얽혀 있었다. 어째서인지 약간의 희열도 보였고, 불안이 보였다. 공포도 아주 조금은 깃들어 있는 게 손목을 부러트린 게 그에게도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다.
그게 충격이었고, 네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으면 이용해 먹어야지.
사윤은 제가 부러트리지 않은 건주의 다른 손목을 살폈다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그의 발목을 응시했다. 시선의 이동은 느릿했다. 눈앞의 남자가 제 눈길을 놓치지 않고 따라올 수 있도록. 다시 고개를 든 사윤이 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두 발로 걸어서 방 나가고 싶으면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어차피 네가 뭔 수작을 부리든 안 통할 테니까. 쟤가 거짓말 탐지기 같은 거라 네가 구라 까면 다 걸리거든.”
“거짓말 탐지기는 아니죠. 음, 판별기가 낫지 않을까요?”
“넌 이 와중에도 그게 중요하니.”
이걸 배짱이 좋다고 말해야 하는 건지, 넉살이 좋다고 말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가 발목 하나를 날리니 마니를 얘기하고 있었는데 저런 대꾸가 나오는 게 말이 되나.
사윤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방 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어깨를 으쓱인 재희가 라이를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러자 몸을 일으킨 펜리르가 체중을 뒤로 옮기고 쭈욱 허리를 늘이며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했다. 녀석이 돌발 행동을 보인 건 그 다음이었다.
마치 씻고 나와 몸에 묻은 물을 털기라도 하는 것처럼 녀석이 몸을 좌우로 털어 댔다. 하얀 털이 눈처럼 방에 흩날렸다.
컹!
개운한 건지 펜리르가 시원하게 짖었다.
“…….”
기껏 무게 잡고 얘기한 것이 무색하게 방 안에 어색한 정적이 깔렸다. 직후 재희가 웃음을 참지 않고 터트리며 제 바지 위에 묻은 털을 떼어 냈다. 즐거운지 허밍까지 흘린 남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강압적인 분위기는 대화에 좋지 않아요, 사윤 씨.”
타이르는 듯 말한 남자가 건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울 땐 어깨를 두드리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더니 지금은 또 제정신이라고 그 손길을 거부하듯 몸을 튼다. 재희가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한 군데 부숴 먹겠다는 협박 역시 옳은 대화의 수단이 아니고요.”
덧붙이는 말에 사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맞는 말이긴 한데, 옳은 말이라 더 재수 없었다.
“뭐 어떡하라고.”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빙긋 웃은 남자가 옷을 털며 일어났다.
“사윤 씨도 잘한 거 없는 거 알고 있잖아요.”
“이재희.”
“그렇지만 크게 잘못한 것도 없죠. 아, 전에 말했던 것처럼 납치랑 이번에 하신 폭력은 예외입니다.”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다. 남이 화를 내든 말든 저는 저 하고 싶은 거 하겠다는 듯 경쾌하게 웃은 그가 라이의 등을 토닥였다. 라이. 작은 속삭임이 방 안에 흩어진다. 펜리르가 잠시 고민하듯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더니 건주 쪽으로 향했다.
털썩.
라이가 침대로 올라가 건주의 무릎에 턱을 올리며 주저앉았다. 살랑살랑. 만져 달라는 듯 펜리르의 꼬리가 흔들렸다.
“만지고 있으면 꽤 기분이 좋아요. 진정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떨떠름하게 라이를 지켜보고 있는 건주를 향해 조언한 재희가 문으로 향했다. 사윤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는 꼭 방을 나갈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실컷 이것저것 떠들고 중재하더니 갑자기 가긴 어딜 가?
“어디 가.”
“둘이서 대화할 시간도 필요할 테니 제3자는 잠시 빠져 있어 보려고요. 종식 씨한테 가 있을게요.”
종식이 그래도 나름 밤쥐의 2인자였는데 그의 방을 가겠다는 소리를 저렇게 태연하게 했다. 하긴 그러니까 제 방에도 태연히 앉아 있었겠지.
둘이서 대화할 시간이라.
일리 있는 말이긴 했다. 거기에 둘만 남는다면 중요할 때 이재희가 끼어들거나 중재하는 일이 없을 테니 고민하다 문을 향해 턱짓했다. 가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남자가 소리 나게 웃곤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사윤 씨랑 건주 씨였나?”
그 부름에 사윤과 건주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판별기는 나가 있을 테니, 서로 마음이 가는 만큼 솔직하게 대화해 봐요. 오랜만에 만난 거잖아요?”
둘 다 하고 싶은 말도 있을 테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인 남자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가 들어 올리곤 닫힌 방문을 열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도로 닫혔다. 잠깐 사이 바람처럼 사라진 재희에 그 흔적을 쫓듯 문 주변을 응시하던 사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사람인데 신선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신기를 읽으면 다 저렇게 되나.
“끝까지 참견질은.”
닫힌 방문을 힐끗거리며 중얼거리니 건주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문을 응시하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죄 드러나는 음성을 흘렸다.
“대체 저 사람은 정체가 뭐예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으레 이렇지.
웃고 있을 때는 멀쩡한 이재희였으나 막상 그와 대화를 나눠 보면 순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수상하고 친절하고. 원래 수상한데 친절한 사람이 제일 의미심장한 법이라 더 그랬다.
그러나 나쁜 놈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기에 답을 고민하던 사윤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제비 길드원.”
“…….”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이 돌아왔다. 무척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을 뻔했던 사윤은 표정을 굳혔다. 필드 안에서 지낼 때 하도 자주 봤던 표정이라, 부지불식간 웃음을 흘릴 뻔했다.
초점이 일순 엇나갔던 눈동자가 도로 건주를 품었다. 방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호흡도 두 개였고 아주 희미하게 들리는 심장 박동 역시 두 개였다. 눈앞에는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 보였다. 치솟았던 노기가 수그러들고, 사람 심란하게 만들던 이재희까지 방을 나서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한건주가 돌아왔다는 게.
둘만 남고 나서야, 그 사실을 온전히 실감하게 되었다.
잠시 멍하게 있으니 아까부터 문과 사윤을 번갈아 보며 인상을 구기고 있던 건주가 입을 열었다.
“애인이에요?”
“…뭐?”
사윤은 그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