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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65)화 (165/266)

제165화. 천상천하 유아독존 (8)

<우리는 고민했고 새로운 제안을 가져왔어요, 건주! (º □ º l|l)>

포탈을 타고 탑으로 귀환하자, 다시 탑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은 걸 응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스템이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그래 봤자 시스템을 별로 신뢰하지 않게 된 건주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제 앞에 뜬 푸른 창을 바라보았다.

제안이랍시고 또 이상한 걸 가져온 거 아니야?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시스템이 새로운 창을 띄워 건주를 설득했다.

<모든 층을 공략하라곤 안 할게요. 5층 단위로만 공략해 주면 우리 쪽에서 임시 탑 공략자 칭호를 부여할 수 있어요. 그러면 게이트도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어디까지나 임시 칭호일 뿐이기에 효과를 제대로 누리려면 언젠가는 다시 탑으로 돌아와 클리어하지 않은 층들을 공략해야 해요. (º □ º l|l)>

이모티콘은 당황한 이미지였지만 푸른 창에 뜬 문구는 묘하게 신나 보였다. 드디어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 들떠 있는 느낌으로 읽혀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건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걸 자랑이라고 얘기하는 시스템이 어이없었다.

그런 해결책이 있으면 진작 내놨어야지. 아니면 처음 이 게이트에 갇혔을 때 내놨어야지.

사람을 수렁에 빠트려 놓고 자신들은 노력했다는 듯, 선심 썼다는 듯 얘기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구기자 그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시스템이 화를 내었다.

<이것도 간신히 만든 특혜예요! 우리가 아주 많이 힘을 써서 만든 예외라고요! (º □ º l|l)>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시스템에 건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시스템도 삐지기라도 한 것처럼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대치 상태가 오래 이어졌다. 하루, 이틀, 사흘. 길어지는 대치에 먼저 흔들린 건 시스템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켕기는 게 많은 것도, 급한 것도 건주가 아닌 그들이었으니.

<알았어요. 우리가 더 빨리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 미안해요. 더 적극적으로 도와 볼 테니 원하는 걸 말해 줘요. (º □ º l|l)>

간신히 얻어 낸 항복 선언이었다.

건주는 시스템의 요청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간 조정을 부탁했다. 탑에서의 하루를 현실에서 여섯 시간으로 측정해 달라고. 현실과 탑 안에서의 시간의 괴리가 너무 크자 오히려 혼란스러웠고 의욕이 사라졌기에 부탁한 요청이었다.

그러자 시스템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알겠다는 알림창을 띄웠다. 이윽고 주황색의 탑 전용 시스템창이 뜨며 시간 계산 비율이 바뀌었음을 알려 주었다.

이제 탑에서의 넉 달이 현실에서 한 달이다. 기간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만큼, 빠르게 공략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느끼게 해 주는 적당한 비율이었기에 만족스러워하고 있으니 시스템이 이제 퀘스트 좀 수락하라며 건주를 재촉했다.

<제안은 수락해 주세요! (º □ º l|l)>

-

[퀘스트 - ‘---’을 위한 첫 번째 걸음 부속 퀘스트]

‘예정된 탑을 5층 단위로 공략해 임시 탑 공략자 칭호를 획득하세요!’

주의: 칭호 효과를 누리기 위해선 추후 제대로 된 탑 공략을 시도해야 합니다.

보상: ‘예정된 탑’ 게이트 탈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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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수락을 누르라는 듯 퀘스트창이 깜빡거렸다. 이걸 받아야 시스템이 말한 5층 단위 공략이 성립되는 듯했다.

고집은 부릴 만큼 부렸고 현실 부정도 충분히 했다. 시스템이 최대로 배려해 줬다는 건 5층 단위 공략 제안과 시간 비율 변경에서 느껴졌기에 퀘스트를 수락한 건주는 한 달 정도 몸을 회복하고 떨어진 전투 감각을 되찾는 데 열중한 뒤 예정된 탑 공략을 시도했다.

10층부터 30층까지는 몬스터들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에 두 달 만에 공략할 수 있었다. 이전에 공략한 경험 덕에 클리어 시간을 더 당길 수 있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할 여지는 충분했다. 30층부터 60층까지는 다섯 달이 걸렸고 60층부터 90층까지 깨는 데는 1년이 걸렸다. 지난번엔 반올림하여 약 8년에 걸쳐 90층을 깼던 걸 생각해 보면 꽤 빠른 속도였으나 문제는 90층 이후부터였다.

95층과 100층.

두 개의 층만 공략하면 이 지긋지긋한 예정된 탑을 빠져나갈 수 있었으나 두 층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범상치 않았다. 90층 초반에 드래곤이 나타났을 때부터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95층과 100층엔 몬스터의 이상의 존재가 있었다.

몬스터라고 하기엔 그들은 너무나도 인간과 닮아 있었으며, 자아를 지녔고 지능이 뛰어났다. 몬스터가 아닌 인간을, 인간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그로 인해 건주는 고작 두 개의 층을 공략하는 데 1년이나 되는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시스템은 이전 공략을 생각해 보면 그것도 빠른 거라고 얘기해 주었지만 건주는 충분히 만족할 수 없었다. 시스템의 지원을 최대한 받으면서 너프를 먹일 수 있는 대로 먹이고 편법이란 편법은 모조리 사용해 가며 깬 것치곤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그것이 절망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끝났어?’

100층을 클리어했기에.

‘…끝났구나.’

탑을 나갈 수 있는 조건을 달성했기에 이젠 어떻게 공략했는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옥 같던 100층 공략이 끝나자 0층으로 자동 귀환 되더니 머리 위로 폭죽이 터졌다.

[축하드립니다! ‘예정된 탑’을 임시 공략 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임시 탑 공략자’ 칭호를 부여합니다.]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절제의 신’이 임시 클리어 보상에 따른 축복을 내립니다. 3 스탯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영속된 업을 사랑하는 지혜의 신’이 임시 클리어 보상에 따른 축복을 내립니다. ‘운명을 위하여(임시)’ 특전이 주어집니다.]

[‘도전과 희망을 노래하는 용기의 신’이 임시 클리어 보상에 따른 축복을 내립니다. ‘기사회생(임시)’이 주어집니다.]

[모든 클리어 보상은 임시가 아닌 정식 클리어 시 완전한 보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행성 9180호 ‘지구’의 첫 번째 탑 공략자 ‘한건주’ 님을 예정된 탑이 기억합니다.]

[그럼 예정된 운명으로 귀의를.]

주황색 알림창이 쉴 틈 없이 줄줄 뜨더니 정말로 신이 축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신성하다 해도 좋을 만큼 환한 빛이 건주를 감쌌다. 온몸을 휘감고 시야를 가린 강렬한 빛이 사라지고 나서 눈을 떴을 땐 어두컴컴한 하늘이 보였다.

하얀 천장이 아닌, 별이 떠 있는 검은 하늘이.

‘…아.’

꽉 막힌 음성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시원한 물소리가 들렸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으며 후덥지근한 여름의 바람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이토록 평화로웠나?

20년도 넘게 살던 세계였는데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 격전지만 헤매 지친 검은 눈동자가 몽롱함을 품고 어두운 하늘을 응시했다.

아무리 임시라곤 하나 예정된 탑 공략이 끝났다. 회귀한 시간을 포함하면 110층도 넘게 공략한 거였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아 멍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는 것처럼 푸른 퀘스트 완료 창이 시야를 차지했다.

<‘---’의 활성화를 위한 첫 번째 걸음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활성화용 특수 게이트 ‘진정한 인류의 악?’이 생성됩니다.>

[활성화용 특수 게이트 – 진정한 인류의 악?]

생성 진행도: 30%

-활성화 퀘스트를 진행할수록 진행도가 올라갑니다. 100% 달성 시 ‘진정한 인류의 악?’ 게이트 생성이 완료됩니다.

‘뭐?’

어째 주어진 보상이 이상했다.

게이트가 바로 생성되는 게 아니었다고.

퀘스트를 끝내면 틀림없이 곧장 게이트가 완성될 줄 알았던 건주는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이 맞게 읽은 게 맞는지 퀘스트창의 문구를 곱씹어 읽어 보았다. 다시 읽어도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뒤통수가 얼얼해 멍하게 있으니 눈치도 없는 시스템창이 반짝거렸다.

<축하드립니다! 첫 번째 활성화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다음 퀘스트를 진행하세요.>

-

[퀘스트 - ‘---’의 활성화를 위한 두 번째 걸음]

‘길드를 생성해 협회로부터 노아의 멤버 자리를 얻어 내세요.’

보상: 생성 진행도 20%, 활성화를 위한 세 번째 걸음 퀘스트 지급.

-

‘…….’

실컷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왔더니 이젠 또 길드를 만들란다. 시스템의 목적이 뭔지 이해가 가지 않아 혼란스러워한 건주는 곧장 사윤을 찾아가려 했다. 그러나 시스템이 그런 건주를 막으며 퀘스트 진행을 종용했다. 무시하고 움직이려던 건주는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으면 사윤에 대해 알 수 없을 거라는 시스템의 말에 인상을 쓰며 시스템의 퀘스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사람을 다루는 데는 뛰어난 시스템….

딱, 딱.

문득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저 밑바닥에서 강제로 끌어 올려져 눈을 바로 뜬 건주가 눈꺼풀을 슴벅거렸다. 검은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는다. 코앞에 사윤의 얼굴이 있어 흠칫 놀란 건주가 그를 바라보았다. 사윤이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하길래 불러도 대답이 없어?”

“아….”

그제야 자신이 그간 겪은 일에 대해 얘기하다 말고 과거 회상에 깊게 매몰되었다는 걸 깨달은 건주가 나직이 탄식을 흘렸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네가 게이트에 1년간 갇혀 있었다는 얘기.”

“아.”

거기까지 얘기한 게 전부였구나.

그 뒤로 있던 일이 많아 어떻게 요약할지 고민하던 건주는, 잠시 사윤과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전부 얘기하지는 말자.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런 건 원래, 조금 묵혀 놨다가 나중에 생색을 부릴 때 써먹어야 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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