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64)화 (164/266)

제164화. 천상천하 유아독존 (7)

‘형이 위험하다는 게 무슨 소리야?’

다리를 털고 몸에 붙은 몬스터들을 떨쳐 내며 묻자 푸른 창이 비상이라는 듯 다급하게 깜빡거렸다.

<사윤이 죽을지도 몰라요! (º □ º l|l)>

‘뭐?’

몽롱했던 정신이 바짝 차려지는 말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윤이 죽는다니.

건주는 자신이 알고 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조금 흐릿해지긴 했어도 매일같이 떠올리려고 노력한 탓에 완전히 잊히지 않은 사윤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고 그가 보여 준 전투, 그가 쏟아 내던 잔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무얼 상기하든 죽음과 사윤 사이의 괴리감이 컸다.

그가 어디 쉽게 죽을 사람이던가?

남을 죽이면 죽였지, 남의 손에 죽을 인간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가 직접 죽겠다며 자살 시도를 한다면 모를까.

…그가 직접 죽겠다며 자살 시도를 한다면 모를까.

건주는 떠오른 생각을 곱씹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하는 눈으로 시스템창을 응시하고 있으니 푸른 창이 급하다며 우선 포탈을 열어 줄 테니 사윤부터 구해 달라고 외쳤다. 불쑥 심술이 솟구쳤다. 시간까지 되돌리도록 전지전능하더니 사람 한 명 구해 내는 걸 못 하는 게 말이 되나.

‘시간까지 되돌린 잘난 힘은 어디에 두고 날 이용해 먹어.’

조소가 깃든 비판에 시스템창이 화가 난 듯 거세게 깜빡거렸다.

<사윤이 그냥 죽는다면 우리가 살려 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 사윤은 게이트 리셋에 휘말릴 예정이라고요! 우린 게이트 리셋 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설정해 둔 게이트 초기의 모습만 다시 재생되도록 만들었어요. 리셋에 휘말리면 사윤은 사라질 거예요! 흔적도 없이! (º □ º l|l)>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다급한 시스템의 어조며 극단적인 어휘 선택이며 일단 범상치 않은 상황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게이트 리셋이라니. 거기에 휘말리는 게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긴 한가? 모든 게이트는 게이트가 클리어되면 자동적으로 입장자들을 내보낸다. 따라서 게이트 클리어 이후 벌어지는 리셋에 사람들이 휘말릴 가능성은 지독히 낮았다.

고민하던 건주는 우선 시스템의 제안을 수락했다. 사윤이 왜 게이트 리셋에 휘말렸는지를 고민하느라 그를 잃을 수는 없었으니.

알겠다고 하자 시스템은 곧바로 포탈을 열어 주었다.

타고 이동했는데 또 이상한 곳이 나오면 어떡하지.

자연스럽게 발을 뻗으려던 건주는 불시에 머릿속을 차지한 불신을 견디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시스템이 왜 안 들어가냐며 건주를 재촉했다. 눈동자가 흐려진다. 시스템도 믿을 수 없었고 제 선택도 믿을 수 없었다.

들어갔다가 또 이상한 게이트에 휩쓸리게 되면? 이 모든 게 자신을 움직이게 하려는 시스템의 수작일 뿐이라면? 또다시 수상한 게이트에 갇히게 되면? 그땐 어쩌지.

불안이 불안을 배출해 끊임없이 사고가 오염되었다. 좀처럼 발을 뗄 수가 없어 포탈을 본 채 멍하니 서 있던 건주는 문득 두 손을 들어 올리고 제 뺨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정신 차리자.

무얼 위해 이곳에 온 건지 잊어선 안 된다.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켠 건주가 인벤토리를 뒤졌다. 오래간 끼지 않았던 페어링이 제 인벤토리 한 칸을 당당히 차지하며 단숨에 시선을 빼앗았다.

사윤의 상태를 확인하려면 페어링을 끼는 편이 현명했다. 하지만, 사윤이 페어링을 계속 끼고 있을까?

떠오른 의문에 대답할 수 없던 건주는 잠시 머뭇거리다 페어링을 꺼내 제 손가락에 착용했다.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이 재연결되었습니다.>

걱정이 무색하게 곧바로 알림창이 떴다. 안도인지 한숨인 건지 모를 것을 내쉬며 알림창을 치운 건주는 재연결되기가 무섭게 붉게 물들어 깜빡거리는 반지를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척 보기에도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시스템이 거짓말을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건주는 그길로 망설임 없이 포탈로 발을 내디뎠다.

게이트로 이동되었을 때와 똑같이 몸이 무언가에 감싸지는 느낌이 들더니 빛이 쏟아지며 사선으로 갈라진 어떤 공간으로 건주를 인도했다. 마치 저기로 들어가라는 것처럼 몸을 둘러싼 빛 무리들이 갈라진 공간 주변에서 깜빡거렸다. 그 안내를 따라 발을 움직이자 빛이 사그라들며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처음 와 보는 곳인데.

필드도, 밤쥐 건물도 아니었다. 게이트 리셋에 휘말릴 수 있다 했으니 게이트 안일 거라 예측한 건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잠시 굳었다. 저 멀리 하얀 형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건주는 알고 있었다.

언노운.

날개가 뜯기고, 몸이 잘려 만신창이가 된 놈이 게이트 한쪽에 형편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건주는 눈을 가늘게 떠 언노운의 상흔을 유심히 살폈다. 거대한 몸에 남은 흔적들이 어딘지 익숙했다. 저런 식으로 몬스터를 몰아붙이는 사람 역시 알고 있었기에 입을 다문 건주는 한 번 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이내 헛숨을 들이켰다.

먼 거리에 있을 거라 생각해 멀찍이 시선을 던져 살폈는데 헛고생이었다. 사윤은 제 발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언노운 못지않게 만신창이가 된 사윤이 시야에 들어와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한 번 더 게이트 안을 살펴본 건주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게이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노운의 사체 말곤 보여야 할 몬스터들의 사체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깔끔하게 전투한다 해도 몬스터 사체 하나, 살점 하나 안 남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마치 안에 있는 몬스터가 죄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한적한 게이트에 한 가지 가설이 건주의 뇌리를 스쳤다.

만일 게이트 포화가 일어났다가 해결되려던 찰나에 언노운이 나타난 거라면? 사윤이 언노운을 처치하기 위해 게이트 리셋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어 포화가 끝난 게이트를 비집고 들어온 거라면?

비약일 수도 있었지만 행위자가 사윤이라면 가능성이 차고 넘쳤다.

그는 자주 무모했고, 또 자신의 실력을 맹신하며 살았으니.

자기라면 게이트 리셋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무슨 사람이….’

기가 막혀 그리 중얼거리던 건주는 순간 옛 기억을 떠올렸다. 관성처럼 예고도 없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기억은 사윤과 자신이 대치하고 있는 필드의 광경을 보여 주었다.

정확히는 노아의 이야기를 꺼내며 부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윤의 얼굴을.

사윤을 안아 들기 위해 손을 뻗었던 건주의 몸이 흠칫 굳었다.

설마.

말도 안 되는 추측이 떠올라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시야가 흐려지고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느낌을 받은 건주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레짐작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모든 건, 자신이 예정된 탑을 클리어하고 나면 천천히 밝혀질 거였다.

그제야 어둠이 내려앉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길이 다시 환해지는 기분을 받았다. 아니, 길은 애초에 막힌 적이 없었다. 그저 제가 걷기를 포기했을 뿐이지.

결국 탑을 다시 공략하는 수밖에 없나.

사윤을 구하러 왔다가 제 길을 찾게 된 건주는 오랜만에 보는 사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아직은 무엇도 판단할 때가 아니었다. 숨을 들이켜며 완전히 사윤을 안아 들자 1층에서 몬스터에 뜯어 먹히고 있던 터라 회복이 덜 된 팔에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포션이라도 먹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한 건주는 격동하는 게이트에 시스템창을 바라보았다.

‘출구 열어.’

강압적인 부탁에 시스템이 출구라면 앞에 열려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건주는 코웃음을 쳤다. 저 포탈을 타고 돌아갔을 때 예정된 탑이 나와도 출구라고 우길 놈이다.

사윤이 제대로 쉴 곳이 필요했다. 그래, 예를 들면 그의 방 같은.

눈을 가늘게 뜨자 시스템이 흔들렸다. 재차 출구를 열라고 얘기하니 공간을 뒤트는 건 부담이 크다며 시스템이 변명했다. 알 반가? 건주는 시스템의 사정을 고려해 줄 만큼 너그러운 성정이 되지 못했다.

리스크쯤은 알아서 짊어지라고 타박하니 그제야 시스템은 느릿하게 사라지고 새로운 포탈을 만들어 냈다. 우연의 일치인 건지, 건주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사윤의 방으로 향하는 포탈이었다.

이토록 제대로 된 휴식 공간을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탑의 0층이 줄곧 제 휴식처였기에 잠시 방을 살핀 건주는 포탈이 사라지기 전에 들어가라는 시스템의 재촉에 못 이겨 사윤의 방이 보이는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단숨에 공간이 뒤바뀌고 사윤의 방이 펼쳐졌다. 여러 게이트를 드나들었으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잠시 신기해한 건주는 그제야 정신이 없어 제대로 살펴볼 시간이 없던 사윤을 침대에 눕히고 살폈다. 조금 전까진 죽은 듯 가만히 있더니 가까이서 살피니 희미하게 맥박이 뛰고 있었다. 꼭 심장이 멈추었다가 이제 막 다시 뛰기 시작한 것처럼 느릿했다. S급이라서 그런지 몸의 상처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건주는 신기한 것을 관찰하듯 회복하고 있는 사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렇게 생겼었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흐릿해진 기억을 덧칠하기 위해 한참이고 사윤을 관찰하다 그의 손가락에 자리 잡고 있는 페어링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끼고 있었다.

창백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하얀 사윤의 손가락은 장신구 따위 거추장스럽다는 듯 깨끗했는데, 오직 한 손가락에만 은색의 링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이 좋았다.

이유도 제대로 모르고 그저 막연하게.

그 반지를 보고 있는 거로도 좋았다.

탑에 갇혀 몇 년간 사람 한 명 보지 못하고 몬스터만 상대해야 했던 시간은 건주를 세상으로부터 잊힌 존재로 만들었는데 사윤이 끼고 있는 반지는 잊혔던 제 존재를 긍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모조리 휘발되었던 탑 공략을 향한 의지에 다시 불씨를 붙였다.

화가 나서 꼼짝없이 버렸을 줄만 알았는데.

사윤은 단 한 번도 그 페어링을 뺀 적이 없었다는 것처럼 제 도망에도 불구하고 반지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좋았나 보다.

건주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저와 같은 페어링이 걸린 사윤의 손가락을 매만졌다가 눈치를 보듯 기절한 얼굴을 힐끔 살핀 뒤 사윤의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긴 시간 느껴 보지 못했던 타인의 온기가 그곳에 있었다.

무얼 위해 탑에 들어왔는지 상기하자.

잊힌 목표를 다시 깨우치기 위해 속으로 중얼거리곤 사윤의 호흡이 조금씩 분명해지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입술이 깍지 낀 손가락 위에, 페어링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저도 계속 끼고 있을게요.’

그건 자신과의 페어링을 빼지 않았던 사윤에게 보답하기 위한 나름의 사과이자 아득한 탑 안에서의 시간을 다시 한번 견뎌 보겠다는 하나의 다짐이었고. 탑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 내건 장치였다.

천천히 깍지 낀 손을 푼 건주는 이제 이동해야 한다는 시스템의 재촉에 순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뤘던 일을 해내야 할 시간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