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천상천하 유아독존 (6)
눈을 뜨기 싫을 정도로 편안하고 따뜻한 온기가 몸을 감쌌다. 게이트에 들어오고 나서 건주는 잠을 푹 잔 날도, 마음 편히 푹 쉰 날도 없었다. 8년간 그랬다. 매 순간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혼을 놓고 살았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던 시간을 보내온 건주에게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눈을 감고 편안하게, 흐름에 맡겨 기절해 있을 수 있는 지금의 순간은 벗어나고 싶지 않은 안식의 한 형태였다.
몸이 부유하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세차지 않은 물살에 떠밀려 목적지를 모를 곳으로 느릿하게 이동되는 듯한 그 감각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도 건주를 재촉하지 않았고, 무엇도 제 삶을 압박하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
뭘 하고 있었더라? 왜 이렇게 누워 있게 됐더라?
의문에 휩싸였다. 중요한 걸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그게 뭐였더라. 생각해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쉬고 싶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지금처럼.
그리 느끼며 되돌아오려는 의식을 다시 놓아 버리려는 건주의 귓가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세요! (º □ º l|l)>
<일어나세요! (º □ º l|l)>
<일어나세요! (º □ º l|l)>
물이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귀 안이 먹먹해지더니 저를 깨우려 아등바등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일어나라고 해? 이게 얼마 만의 휴식인 줄 알아?
치기 어린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치하고 무책임한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이 휴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집으로 버티고 있으니 다시 한번 일어나라며 누군가 저를 깨웠다.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홱 울어 버릴 듯 축축한 목소리였고 버럭 소리칠 듯 흉흉한 목소리였다. 모순적이라 생각하며 마지못해 눈을 뜨자, 푸른 시스템창이 꼭 저를 포위하듯 사위를 에워싸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라는 알림창만 수십 개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무섭게 보게 된 시스템창에 기가 질려 인상을 찌푸렸던 건주는 한 박자 늦게 제가 무슨 일을 겪은 건지 깨달았다.
잠깐만.
눈앞에 일어나라는 시스템창이 떠 있다는 건, 조금 전 들린 목소리도?
설마 제가 시스템의 목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눈이 화등잔만 해져 앞을 바라보고 있자 기존에 떠 있던 시스템창이 스르륵 흐려지며 사라지더니 곧 새로운 푸른 창이 그 자리를 채웠다.
<미안해요! (º □ º l|l)>
사과였다.
‘…뭐?’
건주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탑에 갇혀 있는 8년 동안 걸핏하면 시스템을 욕하며 살았지만 시스템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반응하는 게 이상했으니 이해했다. 그를 욕하며 제 처지를 한탄하는 건 그저 건주가 미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랬던 시스템이 지금은 제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것도 모자라 사과까지 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자 시스템이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쪽 시스템의 오류로 당신이 공략하고 있던 층이 게이트로 한국에 열려 버렸어요. 우리는 수습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모두가 그 게이트가 열려선 안 된다는 것에 동의했으며 운명에 어긋나게 죽은 이가 너무 많았기에 최선의 결정을 내렸어요. 게이트가 열렸단 사실 자체를 삭제시키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죠. 다만, 게이트가 열린 이유가 삭제되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으므로 우린 선택해야 했어요. 당신을 죽이거나, 혹은 예정된 탑에서 당신이 이룬 업적을 모두 삭제시키거나. 전자를 선택할 순 없었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였어요. (º □ º l|l)>
스크롤이 생길 만큼 긴 시스템창이었다. 건주는 영화관 스크린처럼 큼직하게 뜬 푸른 창에 적힌 글씨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분명 처음엔 이해가 됐는데 문장을 씹어 머릿속으로 넘길수록 시스템이 무얼 말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정한다. 정확히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제가 이해한 대로라면, 자신은 지금.
시스템창을 바라보는 건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깐 사이 식은땀이 흘러내려 이마와 등을 축축하게 만들었으나 그와 모순되게 표정만은 침착하고 차분했다. 그건 일종의 방어 기제와도 같았다.
천천히 푸른 창의 글씨를 곱씹고 있으니 그 옆에 새로운 창이 떴다.
<우리는 세계의 시간보다 당신의 시간을 조금 더 많이 되돌렸어요. 당신이 이 탑에서 세운 업적이 사라지도록. (º □ º l|l)>
‘…무슨 말이야.’
다 알고 있는데도 물었다. 제 생각이 맞는지 확신받고 싶은 건지, 제가 이해한 것이 틀렸단 부정을 듣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직이 묻자 츠즈즛 모든 창이 사라지고 새로 창 하나만 나타나 건주의 시선을 모조리 독점했다.
<미안해요, 건주. 당신은 이 탑에 처음 입장했을 때로 되돌아왔어요. (º □ º l|l)>
‘하.’
우선 실소부터 터졌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그간 고생했던 8년을 전부 잃고 이 탑에 처음 들어왔을 때로 회귀한 거란 소리인가? 왜 일어났는지 모를 망할 놈의 오류 때문에?
눈동자가 흐려졌다. 건주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 발을 바라보았다.
신발이 깨끗했다.
8년간 닳고 닳았던 신발이.
예정된 탑은 탑 안에서 보낸 시간이 몸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불사의 몸에 불로의 축복까지 내려 건주를 보호해 주었으나 옷이나 신발은 그 축복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나마 옷은 사윤이 준 의류 아이템이었기에 잘 버텼지만, 신발은 아니었다. 밑바닥이 두껍게 깔려 있던 신발은 긴 시간 닳고 닳아 단화처럼 납작해졌는데, 그랬던 운동화가 지금은 멀쩡했다. 해진 곳 하나 없이.
건주는 믿고 싶지 않아 상태창을 불러왔다. 그러곤 이내 할 말을 잃었다.
8년간 느릿하게 올랐던 스탯 역시 탑에 처음 왔을 때로 되돌아가 있었다.
모든 걸 잃었다.
탑을 공략하며 얻은 스탯도, 육체의 강함도, 그간의 업적도.
완전한 공략까지 10층도 남지 않았었는데 한순간에 0층으로 돌아왔다.
흐른 식은땀이 옷을 적셨다. 상태창을 확인하다가 바닥으로 떨어진 시선이 느지막이 위로 올라왔다. 마침내 시스템을 향해 고개를 든 건주는 반투명한 시스템창에 미약하게 비쳐 보이는 제 얼굴을 확인하고 숨을 참았다.
목덜미까지 흘러내린 땀에 축축하게 젖은 얼굴 위로 자리 잡은 새카만 눈동자는, 그 깊이가 가늠이 안 되는 지독한 절망을 품고 있었다.
* * *
<미안해요, 건주. (º □ º l|l)>
시스템창은 그날부터 매일같이 건주에게 사과를 건넸다. 어떤 때는 대의를 위한 거였으니 이해해 달라고 건주를 설득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이게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이냐며 화를 내었고 또 어떤 때는 울적한 목소리로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고 용서를 구하려 들었다. 그러나 건주는 그 모든 목소리를 외면한 채 예정된 탑의 주황색 시스템창이 표기해 주는 시간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루, 하루 탑 안에서의 시간이 흘렀다. 건주는 1층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몬스터가 제 몸을 뜯어 먹도록 내버려 둔 채 8년의 세월이 이틀에서 사흘로, 사흘에서 일주일로 바뀌는 모습만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표정이 사라졌다. 건주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지내 입술이 봉합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살았다.
아니, 그걸 살았다고 서술하는 게 옳은가?
그저 버텼다.
그건 어떻게 보면 시스템을 향한 시위였고, 어떻게 보면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말로였다. 사람이 몬스터에게 갉아 먹히는 풍경은 어느 지옥의 장면을 보는 듯했지만 표정 변화 없이 무덤덤한 얼굴이 어떤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만약 누군가 그 당시 건주의 표정을 봤다면 지옥에서도 감히 볼 수 없는 지독한 공허를 엿볼 수 있을 거였다.
죽었다가 살아나고 죽었다가 살아나고. 뜯어 먹혔던 살점이 재생되고, 갉아 먹혔던 눈동자가 재생되고. 고통이 찾아왔다가 모든 게 잊혔다가.
건주는 긴 시간 제 몸에 찾아오는 현상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며 고민에 잠겼다.
과연 자신이, 다시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
불가능했다.
시도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한번 맛본 깊은 절망은 건주를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어 그 무엇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1년이 넘을 때부턴 예정된 탑이 표기해 준 시간도 보지 않았다. 건주는 1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1층에 머물러 있었다.
처음 반년은 열렬하게 건주를 설득하던 시스템창도 지쳤는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재촉해 대는 게 없으니 조금은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무의미한 날을 끝도 없이 되풀이하던 어느 날이었다.
<도와주세요! 사윤이 위험해요! (º □ º l|l)>
오랜만에 나타난 시스템창이 건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윤?
건주는 오랜만에 보는 그 이름에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아,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 강박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그 목적과 기억이 슬그머니 생각나 건조한 검은 눈이 이채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