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천상천하 유아독존 (5)
게이트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건주는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게이트 클리어 조건으로 1만 마리의 몬스터를 처치하라는 퀘스트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1만 마리.
여태껏 아무리 많아 봤자 백 마리, 천 마리가 전부였거늘 1만 마리였다. 0 하나 더 붙었을 뿐인데 아득한 숫자다. 게이트에서 나가지 말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말문이 막혀 있으니 시스템은 친히 새로운 알림을 하나 더 띄웠다.
<활성화를 위한 첫 번째 걸음 퀘스트 특전, ‘불사의 몸’이 주어집니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죽지 않습니다.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도치법으로 강조된 문구는 든든하긴커녕 도리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갑자기 불사의 몸이라니. 꼭 이 게이트에서 몇백 번은 죽을 거란 경고를 해 주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 건주의 예상은 고스란히 현실이 되었다.
평범한 게이트인 줄 알았다.
기껏해야 조금 어려운 게이트에서 그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존 감각으로 인해 만들어진 게이트는 건주가 알던 게이트와는 달랐다. 초심자용 게이트와도 불신의 터와도 달랐다. 굳이 비교하자면 필드와 조금 유사한 게이트였다.
게이트 안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부분에서.
처음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그곳은 온통 하얀 공간이었다. 게이트 같지 않은, 구태여 따지자면 어떤 대기실처럼 느껴지는 사방이 새하얀 곳이라 어색하게 서 있자 푸른 시스템창이 화악 시야를 채웠다.
<축하드립니다! 최초로 L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모든 스탯이 10% 상승합니다. 최초로 L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경우 20%의 추가 스탯 보상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해 활성화 퀘스트를 완료하세요. 클리어 전까지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L급 게이트?’
그때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자각했다. 랭크가 높은 게이트라고 해도 S급일 거라 생각했는데 L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사기 능력이라 생각했던 생존 감각조차 SS+급에 불과했다. L급은 어느 정도인지 감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건주는 L급이란 게 존재하는 등급인 줄도 몰랐다.
세간에 밝혀진 정보에 따르면 스킬의 최대 등급은 SSS급이었고 게이트는 S급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S+급도, SS급도 아닌 L급 게이트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다고.
몇 단계를 건너뛴 건지 모르겠다. 자신의 일만 아니었다면 이례적인 발견이라고 호기심을 갖고 칭찬할 만했겠지만 그게 제 일이 되고, 제가 공략할 게이트가 되니 눈앞이 캄캄했다.
아찔한 느낌에 필드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B급의 몸으로 S급 게이트를 들어가 그 개고생을 했는데 이젠 A급의 몸으로 L급 게이트에 들어오게 됐다.
얼마나 굴러야 하는 걸까.
‘엿 됐네.’
결국 건주가 내뱉을 수 있는 감상은 하나였다.
시스템이 하는 말을 보면 게이트를 클리어할 때까지 죽어도 안 보내 줄 생각 같았으니까. 졸지에 세계 최초로 L급 게이트를 클리어해야 하는 사람이 돼 버렸다.
착잡해져 있으니 각성자용 시스템창과는 다른, 처음 보는 주황빛 시스템창이 불쑥 나타나 건주의 시선을 채 갔다.
[L급 게이트, ‘예정된 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곳은 탑의 0층으로 각 층을 공략할 때마다 이곳으로 귀환해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왼쪽의 포탈을 이용해 원하는 층으로 이동 가능합니다.]
[예정된 탑은 0층부터 100층까지 총 101층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탑에 존재하는 시련을 모두 처치하면 몬스터 1만 마리 처치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절제의 신’이 축복을 내린 탑입니다. 예정된 탑 안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갑니다. 탑 안에서의 하루가 현실 세계의 1시간과 같습니다.]
[‘영속된 업을 사랑하는 지혜의 신’이 축복을 내린 탑입니다. 게이트 클리어 후 0층으로 복귀할 경우 모든 상처와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단 몸이 회복되고 하루 안에 다음 층을 공략하셔야 합니다.]
[예정된 탑의 시스템이 당신을 탐구합니다. 행성 9180호 ‘지구’의 첫 번째 도전자입니다. 행성의 최초 플레이어에게 정의를. ‘도전과 희망을 노래하는 용기의 신’이 새로운 플레이어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그럼 예정된 탑에서 미래를 엿보세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순식간에 떠오른 여섯 개의 창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주황빛의 낯선 창이 알려 주는 것들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시스템창을 곱씹어 보기도 전에 왼쪽에 푸른 포탈이 생겼다.
[1층을 클리어하세요.]
푸른 포탈이 반짝거리자 주황색 시스템창이 건주를 재촉했다. 알겠다고 대답하지도, 푸른 포탈로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포탈은 제멋대로 강한 빛을 내뿜더니 건주를 집어삼켰다. 뜻하지 않게 포탈 속으로 들어가게 된 건주는 온 땅이 진흙으로 이루어진 습하고 찝찝한 공간으로 이동되었다.
피부로 닿는 공기의 감각이 어딘지 익숙했다. 멸망한 세계 게이트에서 던전으로 들어갔을 때와 유사한 느낌이었다.
촤아아악!
갑작스러운 이동에 당황할 시간도 없이 진흙에서 괴생명체가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얼핏 심해에서 살 것 같은 아귀처럼 생겼으며 이빨이 위아래로 수십 개는 달려 위협적이었다. 그런 놈들이 한두 마리도 아닌 수십 마리가 진흙에서 치솟았다. 멍하게 있을 시간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칼을 틀어쥐어 괴생명체를 공격했다. 1층이라서 그런지 놈들은 건주가 휘두르는 칼에 금방 나가떨어졌지만 그게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단순 기절이었고 확살하지 않으면 1분 안에 다시 달려들었다. 진흙이라 발을 떼기 버거운 환경에서 상대하기엔 까다롭고 끈질긴 놈이었다.
땀에 진흙이 섞였다. 옷이 더러워졌고 얼굴에 진흙과 괴생명체의 피가 튀어 몸이 찝찝했다. 체감상 세 시간의 전투를 끝마치자 드디어 몬스터를 몰살시켰다는 알림과 함께 0층으로 돌아가겠냐는 주황색 시스템창이 떴다. 망설임 없이 예를 누르고 나오자 건주는 퀘스트창의 숫자가 올라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몬스터 1만 마리 처치 (100/10,000)’
그 개고생을 하며 돌아왔는데 겨우 1퍼센트 채웠다. 백 마리.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인데 1만을 옆에 두고 비교하려니 하찮기 짝이 없었다.
앞으로 남은 층은 99층이다. 한 층을 오를 때마다 1퍼센트씩 차오르는 것 같았다. 정말로 100층을 전부 클리어할 때까지는 나갈 수 없는 듯했다.
내내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인가.
먹을 것도, 쉴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푹신한 침대는 사치였고 침낭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했지만 하얀 공간은 그저 새하얗기만 할 뿐 아무것도 없었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하자 귀신같이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예정된 탑 안에서는 공복감을 느끼기만 할 뿐 아사하진 않습니다. 0층에서는 죽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요컨대 배는 죽도록 고프겠지만 죽지는 않을 거란 말이었다.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해도 비슷한 창이 떴다. 갈증은 지독하게 느끼겠지만, 수분 섭취 부족으로 죽을 일은 없을 거라는 알림창이.
정말이지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 알림창이었다.
‘최대한 빨리 클리어해야 해.’
솔직히 말해서 지독한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며 전투를 이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남은 층이 1층과 비슷한 난이도라면 충분히 빠르게 클리어할 만했기에 몸을 움직였다. 2층, 3층, 4층. 무려 3일간 잠을 자지 않고 빠르게 공략을 시도했으나 건주는 7층에서 한계를 맞았다.
‘이거 완전 미친 게이트 아니야….’
1층이 쉬웠으니 2층도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2층은 딱 1층의 두 배만큼 까다로웠다. 3층은 2층 몬스터의 두 배만큼 강했고 4층은 3층에서 걸린 시간에 두 배를 더 쏟아야 겨우 클리어할 수 있었다. 한 단계씩 난이도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 무슨 두세 단계씩 껑충 뛰었다. 건주가 그 사실을 절절히 체감한 건 예정된 탑에 들어온 지 일주일째가 돼 마의 10층 공략을 성공하고 11층에 올라갔을 때였다.
여태 진흙 바닥이었던 곳이 정글이 되더니 더 막강한 몬스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 종만 나오는 게 아니라 수십 종이 서너 마리씩. 몬스터들마다 약점이 다르고 강점이 달랐기에 건주는 수십 가지의 방법으로 그들을 상대해야 했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간신히 클리어하고 나왔더니 나흘이 지나 있었다. 탑은 미치지 말라고 그러는 건지, 다행히 시간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탑에서 며칠이 지났고 현실에선 얼마나 지났는지 표시해 주었다. 처음엔 그게 좋았는데 15층을 공략하고 나온 뒤 시간을 확인해 봤을 땐 그저 절망적이었다.
건주는 탑에서 한 달을 보냈다.
그러나 현실에선 고작 하루 하고도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괴리감이 얼마나 사람을 공허하게 만들던지.
15층을 클리어하는 데 걸린 시간이 한 달이다. 건주는 그간 공복감을 참지 못해 몬스터의 고기를 먹었고 배앓이를 했으며 정제된 물을 찾지 못해 정글 속에서 흙탕물을 퍼마셔 갈증을 미약하게 달랬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는데 현실에선 고작 하루였다.
실소가 터진 날이 많았다. 시스템이 말한 대로 죽을 뻔한 적은 많았으나 단 한 번도 죽지 않았다. 설령 목이 잘려도 불사의 몸은 한 시간 이내로 다시 살아났다. 그게 도리어 건주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없는 환경에서 전투만 계속하게 되었으니.
20층을 공략했을 땐 전부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때 건주는 제 실수를 깨달았다.
시스템이 불사의 몸을 준 건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그건 저주고 족쇄였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불사의 몸이 되었기에 죽음으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남은 80층을 모두 공략해야만 나갈 수 있었다. 퀘스트 한 번 잘못 수락했다가 수렁에 빠진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부정했으나 죽음으로 도피하는 걸 열 번쯤 실패했을 때 현실을 자각하고 다시 탑 공략을 시작했다. 30층까지 공략하는 데는 석 달이 걸렸다. 물론 어디까지나 탑 안에서의 석 달이었고 현실에서는 약 나흘의 시간이 걸리고 말 뿐이었다. 건주는 5층마다 죽음을 시도해 봤다가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 다시 공략을 이어 나갔다.
몬스터는 갈수록 강해졌다.
20층까진 건주가 본 적 없는 몬스터들이 나왔고 30층까지는 지구에 처음 게이트가 나타났을 때 보도 자료로 보았던 오래된 몬스터들을 보게 됐으며 40층부터는 건주도 상대해 봤던, 현시대의 게이트에 자주 나오는 몬스터들이 출몰하더니 80층부턴 아예 들어 본 적도 없는 강한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그때부터 건주는 한 층을 공략하는 데만 평균적으로 반년의 시간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래도 70층을 넘기고 나선 한 층, 한 층 오를 때마다 희망을 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끝이었으니까.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사윤을 떠올리며 매달렸다. 그저 실수로 이곳에 온 거라 생각하면 지독한 세월을 버틸 수 없었다. 이곳에 와야만 했던 정당한 이유가 필요했고 건주는 그걸 사윤으로 삼았다. 왜 이곳에 온 건지 그 목적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상기했고 사윤의 비밀이 무엇일지 여러 가지로 예상해 보면서 버텼다.
건주가 층계 공략을 백 번 정도 실패하면 시스템은 난이도를 조정해 준다고 말하며 몬스터의 수준을 낮춰 주었기에 100층 공략은 완전히 불가능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90층을 넘어갈 때였다.
약 8년을 탑에서 버티자 시스템은 제가 생각보다 오래 머물러 있었던 건지, 빨리 공략하라고 재촉해 대기 시작했다. 8년간 잘 작동되었던 시스템이 불안정하다는 말을 남기면서. 그때쯤부턴 시스템의 손을 빌려 몬스터의 난이도를 낮추는 것도 통하지 않았다.
무언가 불안하다고 생각했으나 클리어 속도를 늦출 순 없었다. 건주는 시스템이 불안정하다는 걸 알면서도 게이트 클리어를 강행했고 그 결과 건주는 91층에서 말도 안 되는 상대를 만났다.
온몸이 뼈로 이루어진 드래곤.
여태껏 수없이 강한 적을 만나 왔으나 눈앞의 적은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용을 써도 이길 수 없었다. 시스템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려던 순간이었다.
늘 뜨던 주황빛 시스템창이 아닌 실로 오랜만에 보는 푸른 시스템창이 시야를 채웠다.
[!!! Error! Error !!!]
[!!! Error! Error !!!]
[!!! Error! Error !!!]
[!!! Error! Error !!!]
[!!! Error! Error !!!]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시스템의 가동이 일시 중단됩니다.>
갑자기 붉은 글씨가 시야를 가득 채우더니 공간이 뒤흔들렸다.
콰아아아아앙!
폭음에 가까운 굉음이 들리고 시스템창이 건주를 덮쳤다.
이명이 울려 퍼졌고 알아듣기 힘든, 알 수 없는 말들이 건주의 뇌리를 울려 댔다. 쿨럭, 돌연 입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홱, 눈동자가 뒤로 뒤집어지는가 싶더니 건주는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