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61)화 (161/266)

제161화. 천상천하 유아독존 (4)

자신이 눈앞에서 도망친다면 사윤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란 것쯤은 예상했으나, 죽일 기세로 쫓아올 줄은 몰랐다. 잡히면 죽는다. 반드시 죽었다. 뒤쫓아 오는 이가 뿜어내는 막강한 기운에서 그를 직감했으나 작정하고 쫓는 사윤을 따돌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몬스터를 상대했을 때와 비교하면 사윤은 꼭 신체 능력이 한 단계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느린 속도였지만 건주는 S급에 한참 못 미치는 몸이었다. 도주가 무색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붙들렸고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리는 듯한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시선이 칼날 같다는 의미를 건주는 머리끝까지 화에 절여진 듯한 사윤을 마주하고 나서 절감했다.

평소의 사윤이 아니었다.

능청맞고,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으며 사사건건 훈수를 두는 그 은근히 친근한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광망만 번뜩이는 이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배 위로 올라온 발이 복부를 압박했다. 건주는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워 그 발을 떼어 내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사윤의 얼굴 위로 떠오른 감정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분노, 배신, 실망 그리고 짜증.

온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몸속에 전율이 일었다. 이 와중에도 한 꺼풀 벗겨 냈다는 생각이 들면 저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닌 것이리라.

‘내가 사람이 좋아서 널 안 죽이고 있는 거로 보이니.’

그럴 리가 있겠나. 건주는 사윤을 생각만큼 나쁘지 않은 사람으론 인식했어도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는 엄연한 범죄자였으며,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었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면 첫 만남 당시 납치가 아닌 다른 온건한 방법을 생각해 봤으리라.

그러니 아니지.

당신이 날 죽이지 않는 이유는, 당신이 선해서가 아니지.

목적이 있어서지.

그 목적, 목표, 이유. 건주가 알고자 하는 모든 게 사윤에게 있었다. 처음으로 사윤이 그 주제를 먼저 꺼내는 듯해 입이 말랐다.

기회를 놓쳐선 안 됐고 사윤이 스스로 감정을 갈무리해 다시 꼬리 말고 껍질 속으로 고개를 숨기도록 둬선 안 됐다. 그를 자극하는 것만이, 원하는 것을 알아낼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성을 잃을 때의 사윤은 충동에 쉬이 휩싸이는 것 같았으니,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비밀 역시 충동심에 말하게 될지도 몰랐다.

건주는 그걸 노리고 사윤을 자극했다.

‘나도 죽일 생각이에요? 노아처럼?’

그와 자신에게 역린과도 같은 존재를 언급하며.

예상대로 사윤은 흔들렸다. 망설였으며, 짜증을 냈고 입을 달싹였다. 억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극하면 원하던 걸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된다면 건주는 도망을 포기하고 사윤의 곁에 남기를 택할 거였다.

그리만 된다면….

그러나 사윤은 건주가 생각한 만큼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흥분한 와중에도 예리함은 가시지 않았다는 게 맞았다. 그는 잠시 인상을 쓴 채로 기억을 곱씹는 듯하더니 이내 욕설을 내뱉었고 그 다음엔 황당한 표정을 지었으며 마지막으론 치욕스럽단 표정을 지었다.

아.

건주는 그 표정을 보고서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떠봤냐?’

‘떠본 거냐고 새끼야.’

그의 속내를 알고자 했는데 제 속내가 들켜 버렸다. 사실 안 들키는 게 용한 수준이었기에 건주는 동요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가 알아챌 날이 올 거라 예상했었으니까. 다만 그날이 오늘이고, 지금 순간일 줄은 몰랐다. 아쉬운 일이었지만 기회는 날아갔다. 결국 사윤에게서 직접 얻어 낼 수 있는 진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환영회의 밤 때와는 다르다. 필드 안에서 마음을 결정하기 위해 그에게 목적이 뭔지 다시 물어봤을 때와도 달랐다.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던 그때와 달리 지금 건주에겐 퀘스트창이 있었다.

당신이 말을 하기 싫으면 됐어.

그런데 어쩌지.

‘난 이미 실마리를 잡았는데.’

사윤이 진실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실마리를 따라갈 뿐이었다. 결국, 결국 우리는 당분간 서로 떨어지는 게 옳다. 이대로면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을 테니.

왜 변하지 않을까.

당신이 나를, 그저 어린애로만 봐서? 당신이 간수해야 할 애새끼로만 봐서? 그도 아니면 내가 당신의 비밀을 들을 위치가 못 돼서?

뭐가 됐든 제가 그의 손아귀에 있고 그가 자신을 한없이 찍어 누르기만 하는 지금의 관계는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었으니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다. 사윤의 비밀을 계기로.

‘내 생각에 우린 조금 더 동등해질 필요가 있어요.’

‘이대로라면 당신은 변하지 않을 것 같거든. 계속 이런 식으로 굴 거야.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죄송한데 저도 더 이상 길드장님한테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요.’

사윤을 만난 이래 그에게 휘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제 의사로 결정한 게 얼마나 있던가. 납치당한 것도, 게이트에 들어간 것도 하물며 노아의 죽음도 제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일이었다. 건주가 그를 만난 이후로 스스로 선택한 것은 단 하나 이번 도망이 전부였다.

이 관계는 기울어져 있다.

나에겐 부당한 처사를 받고 있는 사람이 나로 판단되겠지만 당신에겐 또 다를지도 모르지.

그래, 당신에겐 다를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러니 이해해 봐요.’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어이없고 황당하고, 짜증 나도 참아 봐요. 당신을 만난 이래 나도 그 모든 감정을 참았으니까.

“…음.”

기억을 곱씹으니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몸을 지배할 듯 감쌌다. 이토록 생생한 걸 보면 어지간히도 강렬한 기억인 모양이었다.

강렬하지 않을 때가 있긴 했나?

건주는 문득 깃든 의문에 고개를 들어 사윤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사윤을 만나고서 단 한 번도 무난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평생을 무난하게 살아온 게 자신이었는데.

남들만큼 공부하고, 남들만큼 경험을 쌓으면서 남들만큼 적당히 잘 살아왔다. 딱히 불행하지도 않았고 심히 가난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차고 넘치게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난했다. 비록 남들은 외모 때문인 건지 몰라도 제 삶을 동경하는 눈으로 보았으나 건주가 느끼기에 제 삶은 생명의 격동 한 번 없는 재미없고 지루한 삶이었다.

다가오는 사람은 많았으나 정작 힘이 들 때 연락할 만한 친구는 없었고 그저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둔 채 그저 그런 삶을 살았다. 그래서 헌터가 되었을 땐 제법 들떴다. 처음으로 찾아온 이례적인 변화였으니까. 지겹게 느껴질 정도로 단조로웠던 인생에 들어간 변주였으니까.

헌터가 되어 본격적으로 활동한다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보단 더 격정적이고, 행복하거나 굴곡이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될 거라 여겼다.

비록 그 굴곡이 이런 굴곡일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범죄자를 만나 납치를 당한 이후부턴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삶의 고난과 역경을 기재하는 란이 있다면 사윤을 적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당한 것에 비해 당신이 밉지 않은 건, 내가 삶의 변화를 바라서일까.

건주가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생각에 잠긴 듯한 사윤의 얼굴을 눈동자에 담아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도 알았다. 남들이었다면 강제적으로 길드 가입 계약서를 쓰게 된 곳이 범죄 길드란 걸 알았을 때 도망칠 궁리를 했을 거고 게이트에 강제로 끌려갔을 때 몰래 탈출 시도를 하거나 사윤을 죽이려 하거나 했을 거란 걸.

그러나 건주는 그러지 않았다. 게이트에 끌려갔을 땐 짜증을 냈을 뿐 그를 죽이겠다거나, 그가 죽도록 밉다거나 하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엿 한 번 먹이면 좋은 정도라고 생각했지.

그러다가 정까지 품어 이젠 그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개고생을 사서 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남들이 제 이야기를 듣는다면 ‘넌 납치당해 죽을 뻔하고 원치 않은 일만 강요당하며 개고생을 했는데 널 그렇게 만든 사람을 이해해 보고 싶냐?’라고 물을 법한 일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자신은 이상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러고 싶어진 것을.

제가 이렇게 태어난 인간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네가 도망친 곳이 그 게이트니.”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사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이 도망친 이유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길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는데도 그 부분에 대해 캐묻지 않는 게 묘하게 불쾌했다. 건주는 눈살을 한 번 찡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존 감각 스킬을 써 길드장님한테서 도망치니 시스템이 게이트를 열어 주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들어갔다가….”

음.

건주는 잠시 기억을 곱씹고 인상을 썼다. 게이트 안에서의 기억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1년간 갇혀 있었죠.”

시스템이 S급을 만들어 주겠다면서 저를 그 게이트에 1년이나 가둬 놨으니까.

그것도 아주 죽여주는 몬스터 처치 코스를 밟게 하면서.

감히 말할 수 있는데 그 안에서 건주가 겪은 일은 사윤이 필드에서 행한 모든 악독한 훈련보다 지독하고 악랄했다. 일단 그 게이트 안에서만큼은 죽어도 죽지 않는 몸으로 만들었다는 게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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