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60)화 (160/266)

제160화. 천상천하 유아독존 (3)

“퀘스트 하나가 떴다고 했잖아요.”

입을 열자 재희와 사윤, 라이까지 침대에 걸터앉은 건주를 바라보았다. 사윤이 더 말해 보라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건주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퀘스트 문구를 떠올렸다. 하도 곱씹어 이젠 딱히 떠올리지 않더라도 한 글자도 틀림없이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밤쥐에 있을 때, 퀘스트 하나가 떴어요. 왜 뜬 건지는 저도 모르겠는데 길드장님에 대해 알고 싶으면 퀘스트를 진행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일부러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확정 지어 얘기했다. 이렇게 말해야 더 정확한 반응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톡톡 철제 의자를 두드렸던 사윤이 의자 등받이 위를 손으로 긁듯이 매만졌다. 그 손길이 묘하게 익숙했다. 어째서인지 첫 만남 때로 돌아가, 펜치를 매만지고 있는 사윤을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딱 그때와 비슷한 긴장감이다. 여차하면 펜치로 머리를 내리찍을 것 같던 그때처럼, 지금의 사윤도 수틀리면 철제 의자를 들어 제 머리를 내려찍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사윤이라면 정말로 그럴 성정이었기에 건주는 숨을 삼켰다. 어째서인지 목이 말라 침도 한 번 삼켰다.

“나에 대해 알고 싶으면 퀘스트를 클리어하라고 했다고.”

사윤이 꼭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되물으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돌려 재희를 바라보았다.

까딱, 사윤이 턱짓하자 재희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꼭 뭔가를 확인받는 듯한 태도에 건주는 제 손가락을 꽉 쥐었다.

불쾌하다.

자신을 버젓이 앞에 두고서 저는 짐작하지도 못하는 어떤 신호를 주고받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불쾌하고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꼴 보기 싫었다.

말했잖아. 당신이 물어본다면, 내가 어련히 답해 주지 않았겠냐고.

근데 왜 확인을 받아.

사윤이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자신의 도망으로 인해 저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으나 막상 이런 식으로 그 사실을 체감하게 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치졸한 감정이 자꾸만 수면 위로 빼꼼 올라와 고개를 든다.

저 사람이 그렇게 믿음직한가.

지금 이 감정을 드러내 봐야 좋을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만스러운 시선이 재희를 향할 때였다.

“무슨 퀘스트인데.”

믿기로 한 건지 사윤이 물었다. 눈동자에는 여전히 약간의 의심이 경계심처럼 담겨 있었다. 건주는 한숨을 내쉬듯 숨을 섞어 대답했다.

“활성화를 위한 첫 번째 걸음이요.”

뜸 들이지 않고 대답하자 사윤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한순간 흐트러짐을 보였던 그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아 무정함을 가장했지만, 사윤에게서 특별한 반응을 캐치하고자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던 건주는 그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맞구나.

활성화를 위한 첫 번째 걸음이란 퀘스트 이름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아무런 정보도 모른 채 듣는다면 그냥 그런 퀘스트가 있구나 하고 넘어갈 일이지 놀랄 것도, 특별하게 여길 것도 없는 이름이다. 그런데도 사윤은 반응했다. 그가 이 퀘스트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꼬리가 보인다. 오랫동안 뒤쫓았던 사건의 꼬리가 보이는 듯했다.

“새로운 성향이 발견됐다고 했어요. 무슨 성향인지 이름은 공개 안 됐고 그 성향을 활성화시키려면 우선 S급이 되어야 하니 게이트 하나 좀 클리어하래요. 처음에는 신경 안 쓸 생각이었는데, 보상이 꽤 특이해서 관심이 가더라고요.”

덤덤한 목소리로 설명을 잇는 내내 건주는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끈질긴 시선으로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것이 불쾌했는지 사윤이 적당히 하라는 듯 노려보고 한숨으로 경고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 억척스러운 태도에 사윤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럴수록 건주의 시선은 더 고집스러워지기만 했다. 지금이 아니면 또다시 기회를 놓치게 된다. 건주는 뺨을 다섯 대나 얻어맞고 손에 붙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진정한 인류의 악.’”

“……!”

“제가 활성화를 위한 첫 번째 걸음 퀘스트를 깨면 보상으로 그런 이름의 게이트 하나를 만들어 준다고 하더라고요. 당신에 대해 궁금해하니,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면서 뜬 퀘스트에서요. 혹시 진정한 인류의 악이 뭔지 알아요?”

“…….”

사윤은 놀랐고 이어지는 말에는 침묵했다. 그 선택적인 침묵과 무반응에서 건주는 완전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역시 연관이 있었구나.

그 ‘진정한 인류의 악’이라는 게.

당신과 관련 있는 말이었구나.

속으로 작은 미소를 그렸다. 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건주는 과거에도 그 판단을 내리고 퀘스트를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윤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건주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건 미심쩍긴 해도 시스템밖에 없었으니 사윤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말하지 않겠다면 자신이 발로 뛰어 알아내기라도 해야지 뭘 어쩌겠는가.

그래서 건주는 그날 퀘스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시스템이 말한 생존 감각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생존 감각(SS+)]

당신의 날카로운 본능이 당신을 위험에서 구해 낼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루트를 하루 2회 제안. 루트 승낙 시 스탯에 상관없이 반드시 탈출 가능. (단 상대와의 등급 차이가 두 단계 이상 차이 날 경우 일정 확률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생존에 어려움을 느낄 경우 1분간 민첩함이 100% 상승합니다. 이후 10초간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활성화 시 근육이 강화됩니다.

각성자가 되고 나서 곧바로 확인했던 상태창에서 볼 수 있던 자신의 전용 스킬이었다. 이 스킬을 활용해 게이트를 찾으라는 건, 지금의 퀘스트를 받은 채로 생존 감각 스킬을 사용하면 퀘스트를 위한 지정 게이트가 열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 스킬을 쓸 만한 상황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건주는 길드원들의 감시로 밤쥐 건물을 나갈 수 없었으며, 사윤은 바쁜 건지 저를 찾아오지 않고 어딘가로 떠나 버렸다. 방치된 상황에서 건주가 자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그래서 건주는 도망을 결심했다. 퀘스트를 위해서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윤을 위해서라도 도망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였다.

솔직히 말해서 사윤에게 당신에 대해 좀 캐내 보려고 하니 협조해 주세요, 하면 그가 협조할 사람인가? 옳다구나, 하고 헛짓거리 못 하게 감금하고 감시할 사람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윤은 자신을 믿지 않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제게 아무것도 알려 주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

자신과 사윤은 정체되어 있었다. 이 정체된 관계를 다시 흐르게 하려면 변화가 필요했다.

“도망간 이유를 알아들을 수 있게 정확히 설명하라고 하셨죠. 솔직히 전 설명할 만큼 설명했다고 봐요. 길드장님도 아실 테지만 우리는 긴 시간 같은 자리만 맴돌았고 발전이 없었어요. 사람은 외부로부터 큰 충격을 받지 않는 이상 자체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변하는 일이 드물어요. 길드장님 같은 경우는 더 그렇죠.”

“그래서 지금, 나한테 충격을 주겠다고 도망쳤단 소리냐?”

사윤의 말투가 험악해졌다. 건주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가 변화를 준 거죠. 길드장님이 스스로 변할 일은 없다고 생각됐거든요. 제가 그때 당신에게 노아를 왜 죽였는지 솔직히 말해 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렸다면 당신이 말했을까요. 아니면 필드를 클리어하고 돌아왔을 때 죽겠다고 협박하며 사실을 말해 달라고 하면 당신이 솔직해졌을까요. 그도 아니면 차분히 대화할 시간을 가지고 솔직하게 말해 주면 안 되냐고 조용히 공들여 길드장님을 설득했다면, 말했을 것 같아요?”

쏟아지는 가정과 물음에 사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주는 그것 보라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손에 쥐고 있던 휴지를 매만졌다.

“글쎄…. 제가 무슨 짓을 하든 그때의 길드장님은 침묵을 고수했을걸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은 나를 믿지 못하고 또 내가 진실을 아는 걸 두려워하니까.”

“…….”

정곡이라도 찔린 것처럼 마주 본 사람이 조용해졌다. 알고 있고 짐작한 사실인데도 그에게서 이런 식으로 확답받게 되자 속이 쓰렸다.

뭐가 그리 못 미더웠을까.

차라리 내가 당신을 못 믿었다면 더 못 믿었을 텐데. 뭐가 그리 두려웠을까. 대체 어떤 비밀을 안고 있었길래.

착잡했으나 고개를 바로 들어 눈을 마주쳤다. 답답했기에, 알고 싶었기에, 관계가 바뀌었으면 좋겠기에 퀘스트를 수락하고 클리어한 것이다.

그 덕분에 이제는 그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길이 열렸다.

과거에 자신이 실마리를 잡았다면, 이제는 길의 입구에 놓인 셈이었다.

건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도망쳤어요. 당신이 은근히 보수적이라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조금 더 어려서 철없다는 말로 어느 정도 정상 참작 받을 수 있는 제가 뭔가를 바꿔야 옳잖아요.”

당시 건주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관계에서 바꿀 수 있는 가장 급격한 변화는 사윤의 곁을 떠나는 거였다. 원래 잃고 나서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었으니. 자신이 그를 위축시킨다면, 그리고 그가 자신의 시야를 가리려 든다면 서로의 곁을 떠나 세상을 보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건주는 페어링을 빼고 생존 감각 스킬을 사용했다. 밤쥐 길드원들이 자신을 감시해 밖으로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을 위기로 감지하고.

편법 같은 사용이었고 시스템 역시 그걸 알았는지 생존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적용됐다며 건주를 이동시켰다. 강한 빛에 휩싸인 건주가 눈을 떴을 땐 웬 도로 위였다. 물소리가 들렸고 습한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그곳에서 건주는 사윤을 만났다.

그때 눈치챘다.

그에게서 본격적으로 도망치게 된 지금, 생존 감각 스킬을 사용해야 한다고.

그것이 시스템이 바라는 시나리오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사윤이 있는 곳에 이동시킬 리 없었으니까.

대체 어떤 계획을 그리고 있는 거야?

당최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시스템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무엇인지. 건주는 그리 생각하며 도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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