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천상천하 유아독존 (2)
어떠한 전조도 없었다.
그 시스템창이 뜨기까지 어떤 전조도, 변화도 없었는데 침대에 누워 있는 건주의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창이었다.
놀라서 퀘스트 내용을 확인해 본 건주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성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자신이 헌터 업계에 대해 잘 모르고 정보가 부족하다고 해도 각성자들이 기본적으로 한 가지 성향만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건 헌터 등급이 F급부터 S급까지 있다는 걸 말하는 것만큼이나 아주 당연한 것이고 공공연한 진실이었다.
만약 두 번째 성향 같은 게 있었다면 진작 말이 나왔을 터였다. 수상하지 않을 수 없는 퀘스트였다. 게다가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º □ º l|l)’
이 무슨 애들 장난 같은 이모티콘이란 말인가.
건주는 각성 이래 이모티콘을 쓰는 시스템창을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남들도 마찬가지였고 헌터 협회가 각성 멘트라고 알려 준 멘트에도 이모티콘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의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있나.
오류라도 난 건가?
그도 아니면 해킹이라도 당한 걸까.
어느 쪽이든 희박한 가능성이었다. 시스템은 갑작스러운 게이트 사태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인도해 주는 신의 은총이라 불리는 것인데 그게 오류가 나거나 해킹이 된다면 사실상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이 퀘스트가 어떤 오류 따위가 아닌, 정말로 시스템이 내린 퀘스트란 소리인데.
생각에 잠겨 있으니 퀘스트를 수락하겠냐는 알림창이 떴다. 누를 수 있는 버튼은 수락과 수락뿐이었다. 거절 버튼도 안 만들어 놨으면서 뭐 하러 물어본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섣부르게 누를 순 없었기에 고민하자, 시스템은 자기 멋대로 퀘스트 수락을 눌렀다.
<퀘스트 부여 후 일정 시간이 지나 퀘스트가 자동으로 수락되었습니다! (º □ º l|l)>
무슨 이런 시스템창이 다 있어?
강매에 가까운 퀘스트 수락이었다.
황당한 일을 겪은 건주는 그날 바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수소문해 자신이 본 것과 같은 수상한 시스템에 대해 찾아보고, 퀘스트와 성향에 대해 알아봤지만 수확은 없었다. 수상한 시스템 같은 걸 입력해 봤자 ‘수상 구조 시스템’, ‘무인 시스템 개발자의 다음 연구 대상은?’ 따위의 기사들만 나올 뿐이었다.
결국 직접 겪어 보는 것 외엔 이 시스템에 대해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골치 아픈 일만 늘어났다.
원치 않은 일에 골치 아픈 일만.
노아와 사윤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퀘스트는 웬 퀘스트란 말인가.
건주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노아에게 묶여 있었다. 가상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 실존 인물이 아니었으니 금방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그 후유증이 오래갔다. 잠을 자려 하면 제 품에 안겨 자던 소년의 목소리가 떠올랐고 밥을 먹으려 하면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천진한 얼굴이 떠올랐다. 악몽과 환각은 내면의 심리 작용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제가 꾸는 악몽과 보는 환각, 듣는 환청은 모두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거였으니 듣기 싫다고, 보기 싫다고 생각하면 사라져야 했는데 노아를 향한 것들은 그렇지 않았다.
지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끊임없이 떠오르고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노아가 죽어 사윤에게 안겨 있다시피 한 그 순간까지. 차가운 몸을 제 손으로 들어 올리고 눈을 뜨지 못하는 소년의 얼굴을 마주한 그 순간이.
반복 재생되듯 계속 머릿속과 눈앞을 맴돌았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미치는 거구나, 생각될 정도였다.
그리워서 노아라는 이름을 부르면 반사적으로 셋이서 함께 지내던 날이 떠올랐다. 웨이브를 막아 낸다고 정신없던 던전 안 기억 중에서 좋은 것이 있다면 노아와 관련된 기억뿐이었다.
노아와 함께 있을 때 건주는 대부분 웃고 지냈고, 사윤도 즐거워했다.
그 분위기가 건주는 좋았다. 불안하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고 어린아이의 웃음만이 넘쳐 흐르는 따뜻한 분위기가.
사윤과 둘이서만 있을 땐 결코 느낄 수 없는 인간적이고,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필드에 들어오고 나서 매일이 힘들었기에 그 순간의 안락하고 평온한 관계가 좋았다. 그래서 귀히 여겼고 소중히 여겼으며, 정성을 다해 노아를 살폈다. 그럴 때마다 사윤은 유난 떤다며 질책을 가하곤 했으나 그의 눈에 담긴 애정을 건주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핀잔을 해 대긴 해도 사윤은 분명 노아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가 이해 가지 않았다.
애정이 눈에 다 보일 정도로 노아를 아끼던 그가 소년을 죽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노아를 죽이고서도 그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겨 기어이 제 오해를 산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당신이 고작 던전 하나 빨리 나가자고 그 애를 죽였을 리 없다. 그럴 거였으면, 그 사실을 내게 알리지 않았겠지. 내게 그 애가 멸망의 근원이라는 걸 얘기하기 전에 죽였을 거다. 그런 뒤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면, 그랬다면 당신이 던전을 나가기 위해 그 애를 죽인 거라고 납득했겠지. 그 뒤에 후회가 따라왔든 실망이 따라왔든 납득만큼은 분명히 했을 거다.
그러나 사윤은 제게 와 노아가 멸망의 근원임을 설명했고 어찌할지 물었다. 죽이고 싶지 않아 하는 제 의견에 동의했고 어떻게든 웨이브만으로 던전을 나가 볼 사람처럼 굴었다.
그랬던 사람이, 그런 사람이 한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노아를 죽일 리 없었다. 그런 거였다면 그리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았겠지.
그러니까 말해.
그러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
믿고 싶었고 알고 싶었다. 적어도 노아와 함께한 시간 동안 웃으며 그 소년을 챙기고, 노아가 위험하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황급히 달려가던 그 모습만큼은 거짓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 믿을 수 있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사윤은.
그러나 당신은.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위선자라고 비웃어도, 부러 말하라고, 억울하면 반박이라도 해 보라고 지독하게 뱉은 말에도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갑작스럽게 이곳에 끌려와 그러고 싶지 않더라도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당신밖에 없는데 그 사람이 내내 선만 긋고 거짓만 고한다면 누굴 믿고, 누굴 의지해 곳곳이 무덤으로 보이는 필드를 버텨야 하는가.
정말이지 왜.
‘왜 아무런 말도 안 했을까.’
여전히 노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상황 속에서 그리 중얼거렸다. 그렇게 곱씹으면, 몇 번이고 자문하면 해답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늘 제자리걸음이다. 늘 도돌이표였다. 적어도 사윤이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마음먹지 않는 이상 이 반복은 죽을 때까지 여전할 거였고 먼저 지쳐 가는 건 자신일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는데 퀘스트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지금은 퀘스트를 수행할 만큼의 의지도, 기력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영원히 방치할 수도 없었으니.
…일단 급한 것부터 처리하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
건주는 사윤과 필드를 나오면서 한 등급 올라 어엿한 A급이 되었다. A급 중에서도 남들보다 스탯이 좋은 A급. 그러니 S급이 되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였다.
초조해질 필요는 없다.
우선 밤쥐에서의 일이 해결되고 나면, 컨디션이 회복되고 사윤과의 갈등도 해결되고 나면 그때 진행해 보고자 했다. 애초에 당장 진행하려고 해도 아무 게이트나 들어가서 되는 게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었으니 지정 게이트가 무엇인지 알아낼 때까지는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런 퀘스트를 줄 거면 지정 게이트가 뭔지라도 확실히 알려 줄 것이지.’
퀘스트 제목부터 내용, 이모티콘까지. 모든 게 의심할 요소뿐이라 투정 부리듯 말하곤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잠들면 악몽을 꾸게 되나 이 방에서 계속 노아의 일을 곱씹는 것보단 악몽을 꾸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꿈은 그래도 환상이기에, 꿈속에서의 사윤은 자신이 왜 그랬냐고 물으면 매번 다른 대답을 해 줬다.
시스템이 강제로 시켰다고 하기도 했고, 노아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되어 그랬다 하기도 했고 이유는 매번 각양각색이었다. 그리고 건주는 그런 악몽을 꾸고 나면 괜히 울컥해 치솟는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자신이 듣고 싶어 했던 말이 그런 거였다는 걸, 꿈을 통해 알고 싶지 않았다.
꿈이 아니라면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는 현실 역시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악몽에서 깨고 나면 건주는 항상 그리 중얼거렸다. 그날 사윤이 지어 보인 표정이, 남을 죽이고서도 꼭 자신이 죽은 것처럼 멍하게 있는 그 표정이 신경 쓰였고, 노아가 죽여 달라고 했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소년이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왜 노아가 죽여 달라고 했다던 말을 전할 때 당신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는지.
‘하.’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기력만 쇠하고 있다.
그리 느낀 순간이었다.
<당신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다면 퀘스트를 진행하세요! (º □ º 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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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의 활성화를 위한 첫 번째 걸음]
‘운명을 분석하는 시스템이 당신의 특수한 성향을 감지해 냈습니다! 해당 성향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안정된 신체가 필요합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해 S급을 달성하세요!’
주의: ‘생존 감각’을 통해 찾아낸 게이트를 공략해야만 S급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보상: S급, 활성화용 특수 게이트 ‘진정한 인류의 악?’ 생성
실패 시: 게이트 탈출 불가, ‘진정한 인류의 악?’ 게이트의 소멸
퀘스트창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