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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58)화 (158/266)

제158화. 천상천하 유아독존 (1)

서러워서 터진 울음이 그친 건 눈가가 축축해지고 나서부터 한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이성이 깨어나니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이 나이 먹고 애새끼처럼 울 줄은 몰라 목 안쪽이 계속 간질거렸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터진 울음은 사람을 퍽 민망하게 만들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처음 보는 남자가 티슈를 건네주었다. 건주는 그것을 받아 눈물 자국을 닦으면서도 남자를 은근히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못 보던 남자다.

건주가 밤쥐에 잡혀 있다시피 지냈을 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남자였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자신이 사윤의 곁을 떠난 후에야 밤쥐에 들어온 사람이란 뜻이었는데 그런 것치고 남자는 사윤과 꽤 스스럼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사윤의 방인데도 제 방처럼 편히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사윤은 곁을 쉬이 내주는 이가 아니었다. 한없이 가벼워 보여도 숨기는 건 또 많아 한번 숨기기로 마음먹으면 아무리 떠봐도 좀처럼 틈을 내주지 않았고 능청스럽게 넘기기만 했다. 밤쥐의 다른 사람들은 늘 건주에게 사윤이 그를 많이 봐주고 있는 거고, 많이 아끼고 있으니 잘하라는 말을 늘어놓았으나 건주가 보기엔 밤쥐의 길드원이나 저나 비슷해 보였다. 조금 너그럽다는 것 말고는 다를 게 없었다. 알려 주는 정보도, 신용하는 정도도 늘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선은 오직 종식 같은, 척 보기에도 사윤의 곁에서 아주 오래 지낸 사람들에게만 제한이 풀리는 듯했다. 그게 눈에 보였다. 그렇다 보니 건주는 사윤이 그은 일선을 자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딱 여기까지.

항상 그리 말하는 듯했다. 그에 대해 더 알려고 하면 할수록 그 선은 더 분명해졌다. 마치 넌 ‘필요에 의해 데려온 키워야 할 애새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으라는 것처럼. 그것이 건주는 불쾌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을 데려왔으면, 왜 데려왔는지 제대로 설명하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거면 그 속내를 분명히 드러내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게 순서 아니던가.

도리이자 아주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렇지만 사윤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은 이상 바뀌지 않을 성정이었다.

사람을 좀처럼 못 믿는 것도, 말할 상황인데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숨기는 것도.

일종의 버릇으로 몸에 남은 것이다.

그래서 건주는 그가 답답했고 또 때론 짜증이 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건주가 사윤에게 바라는 건 늘 그 결이 비슷했으나 사윤의 태도는 항상 완강하기만 했으니.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그때에서야 들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하던 버릇대로 가볍고 의뭉스럽게 굴어선 안 됐는데 그 모습이 인식되어 사윤이 좀처럼 저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뒤늦게 알게 된 실수는 뼈가 아팠고 동시에 건주를 억울하게 만들었다. 처음이야 어쨌든 지금의 자신은 달랐다.

처음에는 단순히 진실을 알아내고자 했지만, 필드에 들어서 시간을 보낸 이후에는 그가 진실을 말해 줬으면 했다. 직접 알아내는 것과 상대가 말해 주는 것의 차이는 크다. 건주의 마음에는 딱 그만큼의 변동이 있었다.

반면에 사윤은 변하지 않았다.

환영회의 밤 대화를 나눴던 것과 똑같이 그는 여전히 진실을 숨기려 들었고 말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때보단 조금 더 흔들린 것 같긴 했지만….

‘왜 또 심각해지고 그래? 그거 전에 끝난 얘기 아니었어?’

결국 그게 전부였다.

‘그럼 뭐가 더 있겠어? 지겹다, 예쁜아.’

지긋지긋한 겉돌기였다.

뭘 더 해야 했을까.

건주는 그때 자신이 물어볼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물었다. 우선 태도를 분명하게 했다.

환영회의 밤 때는 어느 정도의 야망과 흑심을 품고 있어, 사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사윤이 제 생각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부턴, 그가 은근히 정이 많고 다정하다는 걸 알고 나선 정말로 궁금해서, 알고 싶어서 물었다.

솔직하고 덤덤하게.

꾸며 내지 않았다. 왜 자신을 데려왔는지. 이유를 듣고 도울 수 있다면 도와줘 볼까 싶기도 했다.

어찌 됐든 자신이 그 덕에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그가 자신이 죽지 않게 은근히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으니까.

그래서 나쁜 짓만 아니라면 도와줘 볼까, 생각하고 물었다. 제 태도가 바뀐 만큼 늘 듣던 대답도 달라질까 싶어 물었지만 우스운 착각이었다.

‘전에 하던 대화 복기할 거면 너 혼자서 해.’

자신이 도와줄 생각이 있어도 상대가 도움받을 생각이 없다면 도움이란 행위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자신이 솔직함을 드러낸 반면 사윤은 거짓 안으로 숨었다. 거북이가 껍질 속으로 숨는 것과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뭐가 그렇게 겁이 나길래.

뭐가 그렇게, 말하기 어려워서.

대체 무슨 비밀을 안고 있길래.

그게 호승심을 자극했다면 호승심을 자극했고.

‘지겹다, 예쁜아.’

그 말이 사람을 지치게 했다면 지치게 만들었다.

아무리 제 쪽에서 먼저 다가가려 해 봐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는 사람. 그어 둔 일선을 결코 먼저 넘지 않는 사람. 그게 사윤이었다. 적어도 건주가 겪어 본 경험에 의하면 그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 만에 사윤의 최측근을 차지한 듯한 저 남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건주는 회상에서 벗어나 사윤에게 재희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남자를 수상쩍은 눈으로 주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웃는다. 스스로의 무해함을 증명하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속지 않으려 했는데, 남자의 웃음은 꽤 효과가 좋았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려 해도 미소를 마주하고 있으면 괜히 긴장이 풀렸고 의심이 지워졌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특수한 분위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외형부터가 그랬다.

색이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고갯짓에 맞춰 가볍게 흔들렸다. 처음 사윤이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봤던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이라 차갑게 느껴졌는데 웃는 모습을 보니 봄볕이 절로 떠올랐다. 웃을 때에 한해선 무해하고 따뜻한 인상의 사람이다. 배우같이 생긴 얼굴로 다정히 웃어 보이는데 경계가 풀리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의심이 누그러졌던 건주는 미간을 좁혔다.

울 때 달래 준 걸 보면 성정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선한 사람이 범죄 길드의 수장인 사윤과 엮일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납치당한 게 아니고서야 이런 인상의 상냥한 사람이 밤쥐 길드 건물에 있을 리 없었다. 사윤과 가깝게 지낼 리 없었고, 그의 곁에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생각들은 사그라들려던 건주의 경계심을 극대화시켰다.

왜 짜증이 났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고 또 속이 상했다.

자신 역시 사윤에게 납치당해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까.

납치로 시작된 인연부터 손가락에 걸린 페어링까지. 짜증이 날 정도로 저와 비슷한 노선이지 않은가.

자신이 그의, 혹은 그가 자신의 대용으로 느껴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

진짜, 이게 뭐라고.

생각할수록 자신의 상황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정신이 나갔지, 한건주. 머리가 고장 나기라도 한 게 아니고서야 이런 생각이 들 리 없는데. 자신을 납치했던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서운한 감정을 느껴선 안 되는데.

미친 새끼.

미친놈이랑 붙어 다니다가 자신까지 홱 미쳐 버린 게 분명했다.

“다 울었니.”

자조하고 있으니 불현듯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 건주가 듣던 목소리보다 더 낮고 채 지워 내지 못한 은근한 살기가 녹아든 음성이었다. 건주는 그제야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윤과 건주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래도 한바탕 얻어맞고, 울어서 그런지 전처럼 사납고 당장이라도 불이 일 듯 건조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순 없었다. 시선에 질식사하는 날이 온다면 오늘일 거였다.

건주는 숨을 들이켜고 그의 시선을 받아 냈다.

“건주야.”

철제 의자 등받이가 가슴팍에 오도록 거꾸로 앉은 남자가 저를 불렀다.

눈동자가 차갑도록 가라앉은 채다. 건주는 저 눈을 익히 알았다. 만족스럽지 못할 때의 눈이었고 짜증이 치솟았을 때의 눈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지겹도록 본 눈이었기에 모를 수 없었다.

“다 울었냐고 물었잖아.”

한계치에 도달한 짜증을 어떻게든 해소하려는 듯 무릎에 몸을 기댄 거대한 하얀 동물의 털을 마구잡이로 쓸어내린 사윤이 뇌까리듯 얘기했다. 건주는 입을 다물었다.

시발 뭔 질문을 해도 이딴 질문을.

다 울었다고 대답하기도 민망했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당장이라도 조금 전의 일방적인 폭행이 다시 시작될 듯했다. 사윤이 눈으로 그렇게 협박하고 있었기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건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약하게 고개가 움직인다. 그것이 건주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이었다.

사윤이 하얀 털 생물을 쓰다듬는 걸 멈추고 조용히 건주를 응시했다.

“그럼 이제 말해. 뭐 하다 왔는지. 왜 도망갔는지.”

“…….”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고 똑바로, 알아듣게 얘기해.”

알겠니.

덧붙인 사윤이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사이 다시 노기가 치민 건지, 차가운 인상의 생김새와 반대로 불에 델 듯 뜨거운 시선이 얼굴에 꽂혔다. 건주는 제 기억을 곱씹어, 한 장면을 떠올렸다.

게이트를 나와 사윤에게서 도망치겠다고 결심하기 전, 노아와의 추억을 되짚고 있던 어두운 방에서 느닷없이 시스템이 뜬 그날의 일을.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성향이 발견되었습니다. ‘---’ 활성화를 위한 첫 번째 걸음을 수행하세요! (º □ º 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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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의 활성화를 위한 첫 번째 걸음]

‘운명을 분석하는 시스템이 당신의 특수한 성향을 감지해 냈습니다! 해당 성향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안정된 신체가 필요합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해 S급을 달성하세요!’

주의: 지정된 게이트를 공략해야만 S급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보상: S급

실패 시: 게이트 탈출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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