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이 새끼 뭐야 (5)
“라이 막아!”
척 보기에도 눈이 돌아간 사윤을 말리기 위해 재희가 명령했으나 사윤은 즉각 서리의 기운을 개방해 펜리르의 발을 얼리는 것으로 그의 접근을 막았다. 하얀 털을 가진 펜리르가 꽁꽁 언 발을 내려다보며 낑낑거렸다. 사윤을 애타게 부르는 짖음이었지만 사윤은 서리의 기운을 더욱 강렬히 개방해 얼음 장벽을 만드는 것으로 화답했다.
“라이 함부로 부리지 마, 재희야. 내가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사윤의 시선은 여전히 건주를 향해 꽂혀 있었다. 다른 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오직 건주만 바라보며 재희의 팔도 쳐 내고, 라이의 접근도 막아 마침내 그의 앞에 당도한 사윤은 손바닥을 펼쳐 강하게 건주의 뺨을 내리쳤다. 닿은 면적이 넓은데도 불구하고 퍽, 하는 타격음과 함께 건주의 고개가 돌아갔다. 일순 방에 있던 모두가 놀라 굳었지만 사윤은 손을 움직여 한 번 더 붉게 물든 건주의 뺨에 손을 올렸다.
이전보다 큰 소리가 났고 세 번째 땐 입술이 터진 건지 건주의 입술에 피가 얼핏 고였다. 사윤은 말없이 손을 들었다. 뺨을 내리친 횟수가 다섯 번이 되었을 때 손끝을 떤 사윤이 한 번 더 손을 들었다가 이내 천천히 떨어트렸다. 손끝과 달리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건주를 직시했다.
“…내가 널 버렸다고.”
한참이나 침묵 속에서 체벌에 가까운 폭행만 이어진 후 들려온 말이었다. 사윤은 건주의 멱살을 붙잡아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야.”
“…….”
“내가 널 버렸어?”
사윤은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를 버린 적이 없었으므로. 자신과 그의 관계에서 버림을 당한 건 늘….
입을 달싹인 사윤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페어링에 닿았다. 하, 사윤이 비참한 심정을 억눌렀다.
늘 버려진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내가 널 버렸니, 건주야.”
세 번째로 이어진 말에 건주가 강제로 꺾였던 고개를 돌렸다. 사윤에게 얻어맞은 뺨이 붉게 부은 채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눌러 담았던 분노가 치솟아 사윤은 목을 조르듯 건주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와의 거리를 바싹 좁혔다.
“뭐, 좋아 보여?”
어처구니가 없어 비웃듯 말하자 건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새 사람을 찾아?”
“…….”
“네가 그따위로 떠나 놓고, 뭐?”
추궁하듯 묻는 말에 한건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는 그렇게 길게도 말하더니 이젠 또 목소리라도 잃은 사람처럼 입 한 번 벙긋하지 않는다. 꽉 막힌 소통이었다. 그것이 허탈했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니.”
내 밑의 애들은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굴렀는지 아냐고.
덧붙인 말에 건주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 사소한 반응마저 거슬려 열이 솟구친 사윤이 숨결이 닿을 정도로 바짝 건주에게 붙어 그의 목을 쥐었다.
“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린 게 누군데 지금!”
언성이 높아졌다. 라이가 안절부절못하며 컹컹 짖어 댔고 재희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사윤의 곁까지 다가왔으나 아무런 말도 뱉지 않았다. 사윤과 건주가 알아서 해결해야 될 일이라고 조언했던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로 인해 아무런 방해 없이 건주를 몰아붙일 수 있게 된 사윤은 그의 목을 쥔 제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너 때문에 시팔 1년 반을 고생했어 건주야.”
“…….”
“너 때문에 반년을 병신처럼 살았는데 내가 널 버렸다고.”
결국 시야가 흔들렸다. 어이가 없고, 짜증이 나서. 허탈하고 지쳐서. 그가 돌아오기가 무섭게 벌이는 게 또 이따위 언쟁이라 지친 사윤은 눈가로 열이 몰리는 걸 느끼며 손을 내렸다. 문득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맞은 건 한건주인데도 제 손이 욱신거렸다. S급 몸에 지장이 갈 정도의 위력이 아니었는데도.
사윤이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재희가 다가와 사윤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들려온 걱정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찮지도 않았고 안 괜찮지도 않았다. 그저 허무했을 뿐이다.
자신은 빌어먹게도 한건주가 돌아올 날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화를 내고 그렇게 데이면서도 마주 보고 대화할 날이 오면 무언가 바뀔 거라고 생각해서.
그도 자신도, 서로를 이해할 시간이 올 거라 생각해서.
그런데 이해는 무슨. 그저 오해만 쌓여 가고 있었다.
사윤이 허탈함의 극치를 찍어 탈력감마저 느끼고 있을 때였다.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한건주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재희와 사윤의 시선이 동시에 벽에 기댄 채 피가 터진 입술을 닦는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한건주는 피를 닦으며 사윤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때 제가 도망가지 않았다면 이보다 최악이었으면 최악이었지 좋은 관계는 아니었을 테니까. 당신은 여전히 숨기기만 했을 거고, 나는 그걸 캐내려다 지쳤을 거고. 그렇게 계속 삐그덕거릴 게 뻔한데 뭐가 좋다고 거기에 남아요. 내가 그때 거기에 있었으면 길드장님한테도, 저한테도 악영향만 끼쳤을 거예요.”
얻어맞아 놓고서 할 말은 또 꿋꿋하게 다 했다. 사윤은 그가 자신이 그토록 궁금해했던 도망간 이유에 대해서 부연 설명 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침묵을 유지했다. 반박할 말도 생각났고, 짜증도 치밀었지만 일단 그가 생각해 둔 말은 다 들어 보기 위해서.
“길드장님껜, 제가 곁에 없을 때 저를 이해해 볼 시간이 필요했고 저한테는 길드장님에 대해 알아볼 시간과 당신을 신임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아니에요?”
“…널 이해하는 건 곁에 두고서도 할 수 있는데 굳이?”
“그게 이해겠어요? 오해지.”
헛숨을 내쉬며 얘기한 건주가 사윤에게 따귀를 얻어맞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섬세한 손끝에서 여러 생각이 묻어 나오는 게 사윤에게도 보였다. 사윤은 잠시 그때의 자신과 건주의 상황을 곱씹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대치 상태긴 했다.
노아를 죽인 자신에 대한 한건주의 실망과 그에게 제대로 설명할 생각이 없던 자신의 대치였다.
확실히 그때의 자신은 한건주에게 그 어떠한 말도 꺼내고 싶지 않아 했고, 한건주 역시 노아에 죽음에 대한 의지를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게 비단 노아의 죽음에서 비롯된 게 아닌, 제 속사정을 알고 싶기 때문에 벌인 시위라는 건 계곡에서야 알았지만.
어찌 됐든 대치 상태라는 것만은 지금과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한건주가 얘기하듯 그 관계는 아슬아슬하게 유지한다고 해서 딱히 나아질 것이 아니었다.
어느 한쪽이 바뀌어야 했지.
자신이 그에게 비밀을 얘기할 마음을 먹든, 그가 자신의 사정을 눈치채든.
둘 중 하나는 이루어져야 했고 그걸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게….
‘그러니 이해해 봐요.’
이해였다.
자신은 제 방식대로 한건주를 이해하고 그를 완전히 신임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나서야 비밀을 알려 줄 성향이었고 한건주 역시 자신을 이해해야만 제 사정 역시 눈치챌 수 있었다.
아.
비로소 몇 개월이나 꼬리표처럼 붙어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이해와 동등에 대해 감을 잡게 되었다. 사윤은 인정하긴 싫지만 건주에게도 나름의 논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다만.
“방식이 왜 그따위야.”
한건주가 도망치지 않았어도, 하필이면 자신이 랭크 다운 패널티가 주어진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을 때 도망치지 않았어도 그 이해라는 건 어떻게든 시도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건주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거기에 대해선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고 용납도, 용서도 할 수 없었기에 인상을 찡그리자 건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한숨을 내쉴 사람이 누구인데.
다시 발끈해 달려들려는 사윤을 이번엔 재희가 붙잡았다. 봐주는 건 저번 한 번으로 끝내겠다는 듯 완강한 태도였다.
“지금은 폭력을 휘두를 타이밍이 아니에요.”
재희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사윤을 타일렀다. 그럼 조금 전에는 됐고? 사윤은 기가 막혀 그를 돌아보았으나 이어지는 건주의 말에 반강제로 신경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말했잖아요. 실마리를 찾았다고.”
“뭐?”
“그때가 아니면 안 됐어요. 그게 내 기회였고, 동시에 길드장님의 기회였으니까. 조금 성급했더라도 그때가 최적의 타이밍이었어요.”
“무슨 말이야?”
되묻는 말에 건주가 재희를 힐끔거렸다. 마치 그가 있는 곳에선 말하기 꺼려진다는 듯. 사윤은 그 낌새를 눈치채고 코웃음 쳤다.
천기를 읽는 놈 앞에서 무얼 숨기려 든단 말인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말하지.”
낮게 깔린 목소리는 협박에 가까웠다. 그가 말하지 않으면 제가 다시 두들겨 패는 한이 있어라도 대답을 들을 생각이었다. 그 의지를 주먹을 도로 쥐는 것으로 보이자 건주가 한숨 섞인 신음을 흘리곤 입을 열었다.
“퀘스트가 하나 떴어요.”
“…뭐?”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어떤 퀘스트인지는 제대로 짐작한 것 같으니까. 그래서, 그 퀘스트를 진행하면 당신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퀘스트 좀 깨고 왔어요. 당연히 다 깨고 나면 길드장님한테 얘기해 줄 생각이었고….”
말을 흐린 남자가 터진 입술을 잘도 눌러 씹더니 재희를 힐끗거렸다.
“내가 당신에 대해 알고 당신이 날 이해하고 나면, 무언가 좀 바뀔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죠.”
전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허탈함이 짙게 느껴지는 어조다. 특히 재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렇게 여러 감정이 뒤섞일 수가 없어 사윤은 당황했다.
역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버렸냐고 묻는 것도 그렇고 새 사람을 찾은 거냐고 물어본 것도 그렇고. 그가 자신과 재희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정정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아, 시발.”
드물게도 욕설이 들렸다.
한건주가 그렇게 정직한 욕설을 내뱉은 적은 손에 꼽았기에 놀란 사윤은 이윽고 건주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단순히 그가 욕을 내뱉어서가 아니라, 그의 눈시울에 물기가 고여 있어서.
“그냥 좀, 뭘 하고 왔냐고 물어봐 줬으면 안 돼요? 그럼 내가 어련히 얘기했을까.”
그럼 그냥, 못 이기는 척 얘기해 줬을 텐데.
꿍얼거리듯 말한 남자가 눈가를 닦았다. 사윤은 속눈썹에 물기가 고스란히 묻은 남자를 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깨를 가볍게 들썩거린 한건주는 기어코 코끝까지 붉게 물들이고 눈가를 가렸다.
“좀, 먼저. 먼저 물어봐 주지.”
“…….”
“형이잖아요.”
“…….”
“그럼 좀….”
고개를 홱 돌린 이가 ‘그럼 좀, 넘어가 주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숨을 꾹 참다가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사윤이 자리에 굳었고 재희가 한숨을 내쉬며 왜 뭐 하다 왔는지는 안 물어보냐고 묻는 건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르고 달래는 표정을 보아 하니 그는 또 뭔가를 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지켜보고 있자 재희가 가느다랗게 웃으며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전했다.
연하 애인이 어리광 부리면 받아 줘요.
선명한 입 모양에 사윤은 입을 다물었다.
누가 누구 애인이라고?
기막혀하고 있으니 건주를 달래는 일행에 라이까지 추가되었다. 분명 자신의 길드고 자신의 방인데도 우는 건주를 달래는 라이와 재희를 보고 있으면 남의 터전에 온 것 같았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설마하니 한건주가 울 줄은 몰라 사윤은 코를 훌쩍이고 있는 건주를 바라보았다.
시발 진짜.
저 애새끼.
아무래도 더는 대화를 이어 나갈 상황이 안 될 듯했다. 한건주가 울음을 그치든 해야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1년간 어디서 지냈는지, 지난번 게이트 사건 때는 어떻게 휩쓸린 건지 물어볼 수 있지 않은가.
차분해진 상태에서 생각해 보니 놓친 것들이 꽤 많았다.
당장 서로의 가장 민감한 감정만 밀어붙여 생긴 결과였기에 인상을 찌푸린 사윤이 마른세수를 했다.
한건주와 똑같은 수준이라니. 애새끼가 누구인질 모르겠다.
결국 사윤은 복잡한 마음으로 라이를 불러 포션이나 하나 건넸다. 거세게 얻어맞아 부은 뺨 좀 가라앉히라고. 라이는 꼬리를 흔들며 충실히 건주에게 포션을 건네주었다.
컹!
펜리르가 짖는다.
아주 개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