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이 새끼 뭐야 (4)
험악하게 내뱉은 말에 건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조금 전의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기에 사윤은 헛웃음을 억눌렀다. 자신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는 사이다.
딱 이만큼의 거리였다.
그리고 이만큼의 차이다.
이게 좁혀질 날이 오기는 할까.
머리가 울렸다. 가능성이 얄팍했으나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활성화를 위한 퀘스트는 다시 첫 단계로 돌아갔다. 한건주와의 조우 퀘스트가 달성되면 그와의 관계를 개선하라는 퀘스트 역시 뜰 것이다. 결국엔 해내야 할 일이다.
그를 두들겨 패든, 제 정신을 두들겨 패든.
그리고 사윤은 그 방법을 전자로 택하기 위해 밤쥐로 온 거였다.
후자를 선택했을 때의 방법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대화가 일단락 난 듯해 말이 없는 건주를 두고 다시 등을 돌렸다. 제 방으로 걸어가자 뒤늦게 건주가 느릿느릿 뒤따라왔다. 그리고 몇 걸음 떼지 않아 사윤의 팔이 누군가에게 붙들렸다.
“…뭐야? 더 얘기할 거면 들어가서 해.”
“강요였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들어가서 하자고.”
“전 지금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한건주.”
기어이 사윤의 표정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누가 누구한테 맞춰야 하는 상황인지 아직 파악이 안 되지, 지금.”
“…….”
협박성 짙은 어조에 건주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동등해질 틈을 안 주네.”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사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동등이라니. 그 단어 하나에 발작하듯 어깨를 들썩인 사윤이 건주를 돌아보았다.
또다.
또 저렇게, 자신이 한없이 아래에 있다는 듯 얘기한다. 단 한 번도 그보다 위에 선 적이 없는 건 자신인데도.
이성이 실처럼 가느다랗게 변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었다. 사윤은 동등과 이해라는 말에 자주 흔들렸다. 하물며 흔들리게 만든 장본인인 한건주가 나서서 저런 말을 했으니 치미는 분노를 참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씹어 먹을 듯 입술을 깨문 사윤이 방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단 들어가서 마저 얘기해.”
복도에서 소란을 피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방만큼 이 길드 내에서 방음이 잘되는 곳이 없었기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현관에 하얀 신발 하나가 보였다. 익숙한 신발이었기에 사윤은 고개를 들었다. 카디건을 걸치고 뱀을 쓰다듬고 있던 남자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 오셨어요?”
이재희였다.
제비에 보내 뒀는데 왜 여기 있어?
원래 계획과 일정대로라면 이곳에 있을 이가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서류를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어야 할 그가 이곳에 있는 게 황당해서 눈을 깜빡거리자 서류 더미를 피해 도망친 건지 의도해서 이곳으로 온 건지 모를 남자가 뱀 위로 살짝 걸치듯 올려 둔 책을 덮곤 웃어 보였다. 눈꼬리를 내린 채 입매에만 호선을 그리는 그 아련해 보이는 웃음이 어딘지 익숙했다. 기억을 더듬어 이재희가 지금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 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린 사윤은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닫게 되었다.
저 새끼가 시발 또.
빌어먹게도 하늘에게 사랑을 왕창 받고 있는 저 남자가 또 천기를 읽고 온 것이다.
“읽었냐?”
“대충 비슷합니다.”
천기누설을 쓰지 않기 위해 두루뭉술하게 돌려 말하는 꼴이 애처롭지 않고 재수 없게 느껴지면 이재희에게 너무 적응된 걸까. 예측하지 못한 변수에 사윤은 한숨을 내쉬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이재희가 이곳에 온 것 자체는 그리 놀라울 게 없었다. 천기를 읽고 있다면, 자신이 한건주와 만나게 되리란 것도 알았을 테니까. 이전부터 한건주 얘기가 나올 때면 부쩍 흥미를 보였던 남자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한건주가 궁금해 왔을 게 분명했다.
어깨 너머의 상대를 직시하는 이재희의 눈에 흥미가 가득했기에 다 티 났다.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이가 골치 아파 관자놀이를 꾹 매만지고 있으니 이재희가 입을 열었다.
“길을 찾으셨나 봐요.”
“대충은.”
사윤과 재희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화였다. 그 탓에 이 대화에 배제된 듯한 분위기가 형성돼 건주의 표정이 구겨졌다. 재희가 그를 바라보곤 눈을 휘어 웃었다.
“의자가 하나 더 필요하겠군요.”
그리 말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에 내놓았던 의자 하나를 끌어와 닦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련의 행동에 사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네 방인 줄 알겠다.”
“제 방처럼 깔끔히 쓰려고 하곤 있죠.”
“말이라도 못하면.”
사윤은 피식거리며 얘기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이재희가 있다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은근히 사람을 다루는 데 수완이 좋은 재희였으니 그가 있으면 건주와의 대화도 조금 순탄하게 풀릴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재희의 순수한 선함과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능숙한 점만큼은 믿고 있던 사윤이 눈에 띄게 긴장이 풀린 기색으로 방바닥을 내디뎠다. 잠시간 굳어 있는 건주를 흥미롭게 살피던 재희가 사윤의 손에서 반짝이는 페어링을 보고 아, 하며 운을 뗐다.
“페어링은 어때요. 써 봤어요?”
“기대했는데 쓸 일은 안 생기더라.”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재희가 웃으며 ‘라이 불러 줄까요?’ 하고 물었다. 푹신한 생물체가 있으면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긴 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바닥에 그려진 소환진에 손바닥을 대고 펜리르를 소환시켰다.
컹!
튀어나온 라이가 사윤에게 달려들었다. 찹찹거리는 거대한 짐승을 제 몸에서 떨어트린 사윤이 침대에 앉아 라이를 무릎 위에 올렸다. 안 무겁냐고 묻는 재희에 별로, 라고 대답하는 그 광경을 건주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꼭 이방인처럼 서서 멍하니.
그러곤 불현듯 허망한 얼굴로 웃었다. 그 웃음에 건주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사윤이 라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한건주가 자신과 재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과 재희의 손가락에 끼워진 페어링을.
그러곤 하, 하고 웃더니 고개를 젖히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으음.”
이재희가 무얼 눈치챈 것처럼 허밍을 흘렸다. 뭔가를 읽거나 알아차렸으면 제게도 알려 줬으면 했다. 툭, 그의 다리를 치자 눈웃음을 지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두 분이 풀어 갈 문제 같아서요.”
“뭔 소리야?”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하는 건 오늘만큼은 한건주로도 충분했다. 그까지 머리 아프게 굴면 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이 초과되기에 눈을 부라린 순간이었다.
“좋아 보이네요.”
적막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불쑥 솟았다. 사윤은 손가락을 매만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
그제야 한건주의 손가락에 페어링이 끼워져 있는 게 보였다. 틀림없는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이었다.
언제 낀 거지?
사윤은 건주가 도망친 후 무려 석 달 동안이나 매일같이 페어링의 연결을 확인했다. 그러나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은 감감무소식이었고 고작 반지 하나에 의지하려는 제 신세가 처량해 넉 달째부터는 그만두었다.
그렇다면 그만둔 이후 페어링을 다시 연결했다는 말인데.
대체 왜?
도망쳤으면 끝까지 도망쳐야지 자칫 잘못하면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는 걸 뭐 하러 낀단 말인가. 앞뒤 맞지 않는 행동에 혼란이 찾아올 때쯤 문득 조금 전 한건주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안 볼 생각으로 간 건 아니에요.’
그 말은 분명 그날의 도망을 저격한 얘기였다. 그렇다면 그게 변명이나 거짓말 따위가 아닌 진실이었단 말인 걸까.
그럼 대체 왜 도망간 건데?
조금 전에 말한 두루뭉술한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가 왜 도망갔는지, 어쩌다 도망갈 마음을 품었는지, 도망가고 나선 뭘 했는지 역시 조금 더 많은 정보와 대화가 필요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뜻으로 쳐다보니 건주가 손가락에 끼우고 있던 페어링을 빼었다. 갑작스러운 태도에 재희가 오, 하고 짧게 놀랐고 사윤의 눈앞엔 이전에 한 번 본 적 있던 시스템 알림창이 떴다.
<페어링 착용자가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을 해제했습니다!>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는 알림창이었다.
사윤의 동공이 작아졌다. 도발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싶어 분노를 억누른 채로 그를 돌아보자 허탈한 얼굴의 남자가 벗은 페어링을 손에 꽉 쥐었다.
“판을 뒤집으면 뭐가 바뀔 거라고 생각해서. 당신은 입을 꾹 다물기 바쁘니 그 입을 열게 하려면 당신을 둘러싼 판부터 바꾸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당신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나를 덜 간절하게 여겨야 할 것 같아서.”
가라앉은 눈으로 말한 남자가 바닥을 응시했다. 하, 진짜.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야만 진전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이 악물어 캐내고 왔더니….”
속삭임에 가까운 말이었다. 건주가 고개를 들어 사윤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엇갈리듯 맞물린다. 먼저 도망가 놓고 마치 버림받은 사람 같은 허망한 얼굴을 짓고 있는 남자를 사윤은 이해할 수 없어 눈을 깜빡였다.
“좋아 보이네요.”
건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해서 얘기한 그가 쥐고 있던 페어링을 사윤의 발 앞으로, 침대 앞으로 집어 던졌다. 팅팅, 굴러간 페어링이 빙그르르 제자리를 돌아 틱 하고 쓰러졌다. 사윤은 바닥에 떨어진 페어링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은 단 한 번도 뺀 적 없던 페어링을.
“그렇게 사람 헌신짝처럼 버리니까 좋아요?”
한건주가 기가 찬다는 듯 얘기했다. 그에 틱. 한 줌 남았던 사윤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졌고.
“사윤 씨!”
재희의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사윤이 건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사윤은 정말로 건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