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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55)화 (155/266)

제155화. 이 새끼 뭐야 (3)

밤쥐 길드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귀환 소식을 전해 들은 길드원들이 우르르 나와 사윤을 반겼다. 미리 운전대를 쥐었던 길드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사윤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탓에, 뛰쳐나온 그들은 평소와 같은 왁자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간만에 길드장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차에서 내린 사윤은 우악스럽게 건주를 끌어당겼다.

억센 손길에 남자가 저항하듯 몸을 물렸다. 사윤은 코웃음을 치고 더 강한 힘으로 건주를 바짝 당겨 반강제로 차에서 내리게 했다.

“도망칠 수 있으면 뿌리치고 달아나 봐. 우리 애들이 전에 너 놓치고 기합이 바짝 들어 있는데 또 탈출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빈정거림에 가까운 말이었다. 어디 한번 그 개같은 스킬 다시 써 보라며 중얼거린 말에 표정을 구긴 사내가 사윤의 팔을 뿌리치듯 쳐 냈다.

“적당히 해요.”

“뭘.”

“안 끌고 가도 알아서 갈 테니 적당히 잡으라고요.”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 같은 말이다. 사윤은 퉁명스러운 사내의 말을 곱씹으며 입꼬리를 틀어 올려 웃었다. 길드원들이 그 웃음을 못 본 척하며 더 깊숙이 몸을 숙였다. 그들 모두가 지금 트집 잡히면 엿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건주만 빼고서.

“왜. 또 부러질까 봐 무섭니.”

“…….”

“그러게 잘해 줄 때 잘했어야지.”

왜 다들 지나가고서 후회할까.

읊조린 말에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답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니었기에 지적하지 않고 넘긴 사윤은 고개를 숙인 길드원 사이를 지나쳐 길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주가 그 뒤를 느지막이 따르자 사윤이 문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 길드원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형님 협회 갔다 온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왜 한건주가….”

“야, 입조심.”

“아.”

건주의 이름을 꺼낸 길드원이 다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건주의 도망 이후 그의 이름을 꺼내는 행위가 밤쥐 내에서 금기시된 탓이다. 뒤늦게 제 실수를 알아차린 길드원이 혹시나 하는 눈으로 문 안을 살폈다. 발소리가 멀어진다. 다행히 제 목소리를 듣고 화가 난 길드장이 달려드는 일은 없을 듯했다.

길드원 중 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협회에서 만난 건가?”

“뭐? 그럼 협회 새끼들이 저 자식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건 아닐걸. 그랬으면 형님이 협회를 때려 부수고 있다는 정보가 먼저 도착했겠지.”

“…하긴.”

자신들의 수장이 어떤 성격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던 길드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뭐가 됐든 중요한 건 떠난 줄 알았던 한건주가 돌아왔다는 사실이었기에 수십 명의 밤쥐 길드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눈이 돌아갔을 때의 사윤이 어떤지 경험해 본 적 있었다. 그러나 이만치 화가 난 사윤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섬뜩하게 건물로 들어간 뒷모습을 떠올려 봐라, 아주 한기가 풀풀 날리지 않던가.

눈 돌아간 사윤만으로도 무서웠는데 눈이 돌아간 채 바짝 화가 난 사윤은 얼마나 섬뜩할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길드 내부가 소란스러워질 것 같았다. 길드원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태풍에 휘말리지 않도록 스스로 사리는 것뿐이었기에 갑작스럽게 재난을 맞은 이들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는데 반나절 사이 순식간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 되었다.

하여간, 한건주 그 새끼가 늘 문제다.

이토록 분위기가 판이하게 바뀐다는 건 그만큼 한건주가 사윤의 역린임을 뜻하기도 했다.

대체 그 꼬맹이 헌터 하나가 뭐라고.

길드원들은 한건주에게 이토록 과민 반응 하는 사윤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중얼거렸다.

“건주 녀석도 참, 도망칠 거면 끝까지 도망가지. 어쩌려고 붙잡혔냐.”

“그러게. 형님 표정 장난 아니던데. …최소한 발목 두 번은 부러진다에 한 표 건다.”

“난 톱니 박힌 족쇄에 채워진다에 한 표.”

“난 고문 별장에 감금된다에 세 표.”

“두 팔 두 다리 모두 사라진다에 10만 원.”

길드원들이 저들끼리 숙덕거리며 한건주의 처우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한 명이 목소리를 바짝 낮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형님이 이렇게까지 날뛰는 걸 보면 아무래도….”

거기서 한 번 끊었다가 사윤의 눈치를 보듯 길드 건물을 힐끔 바라본 길드원이 곁에 있는 사람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말을 이었다.

“연인 사이였던 게 맞는 것 같지?”

건주가 떠나고 나서 폐인이 되었던 사윤을 보고 길드원들이 내릴 수 있는 추측은 그것뿐이었다. 간부급이 아닌지라 사윤이 왜 그렇게까지 낙심했는지 몰랐고 건주와 관련된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추측에 불과했는데 오늘의 일로 그 추측에 확신이 더해졌다. 연인 사이였다가 한건주가 배신하고 사윤을 떠난 게 아니고서야 지금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길드원 중 하나가 감히 사윤의 뒤통수를 치고 간 이에 혀를 내둘렀다.

“한건주 그 간 큰 새끼.”

“야, 입조심하라니까.”

“아니, 그렇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길드장님을….”

먹버, 뭐 그런 거 한 거 아니야. 작게 중얼거린 말에 다른 길드원들이 모두 달려들어 불경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한 길드원을 쥐 잡듯 잡았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한다는 비난을 들으며 발과 주먹, 스킬 등에 얻어맞게 된 길드원이 억울해서 문을 쳐다보았다.

아무튼 버림받은 건 맞잖아! 한건주 그 개자식이 우리 형님한테 빌어먹을 짓 한 거잖아!

길드원은 억울해서 그리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숨이 아까웠기에 참았다. 다른 길드원들이 달려들어 진심을 절반 담아 때리는 것보다 사윤이 와서 장난으로 한 대 치는 게 더 무서웠기에.

“여긴 달라진 게 없네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건주가 심심한 감상을 흘렸다. 사윤은 형식적인 말에 가까운 이야기에 딱히 반응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슬금슬금 내려온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망설임 없이 최상층을 눌러 목적지가 제 방임을 알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거울에 자신과 한건주의 모습이 비쳤다.

형편없었다.

한쪽은 표정이 지나치게 굳어 있고 한쪽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표정이 굳은 자신이라니.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스스로 낯설어 턱을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거울 속 한건주가 입을 달싹였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차라리 변명이라도 해 봐라.

사윤은 도망에 대한 그의 변명이라도 한번 들어 보고 싶어 심기 불편한 상태로 분노를 억누르며 기다렸다.

“안 볼 생각으로 간 건 아니에요.”

“……?”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이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참 만에 뱉은 말치곤 이상했기에 사윤은 건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눈살을 구긴 채 그의 말을 곱씹었다.

안 볼 생각으로 간 게 아니라니.

정황을 따져 봤을 땐 아무래도 도망 당시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깨닫고 나자 울컥하는 짜증이 치밀었다.

이게 누굴 호구 새끼로 보나.

“변명이라도 들어 볼 생각으로 기다려 준 건 맞는데, 변명할 거면 잘 골라야지.”

씨알도 먹히지 않는 말을 해 봤자 안 통했다. 다시 볼 생각으로 간 사람이 그렇게 전심전력으로 도망쳐서 계곡에 뛰어내리기까지 할까.

곱씹을수록 어이없는 말이라 기가 차 웃자 건주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말을 해도 믿을 생각을 안 하는데 무슨 말을 해.”

“그럼 말하지 마, 예쁜아.”

“…….”

“그냥 억울한 채로 있어.”

억울한 채로, 답답한 채로. 무슨 말을 하면 될지 모른 채로. 그렇게 있었으면 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이 답답함을 한 번쯤 겪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머리까지 체증이 치밀어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 봐야 제 처지를 조금은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단호하게 흘린 말에 건주가 눈을 깜빡였다. 사윤은 슴벅거리는 눈꺼풀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 몸을 비틀었다. 띵, 소리가 나고 무거운 문이 열렸다. 사윤이 앞장서 빠져나가던 순간이었다.

“그때는.”

들려온 목소리가 사윤을 붙잡았다. 사윤은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 건주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답답한 표정을 지은 이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털어 쓸어 넘기곤 사윤을 바라보았다. 우스꽝스러운 가면은 어느새 완전히 벗어 다른 손에 쥔 채였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요.”

“…….”

“어색한 대치를 이어 가 봤자 서로만 불편하고 지긋지긋해질 뿐인데 같이 있어 봤자 뭐 해요. 그 상태로 있었으면 길드장님도 저도 멈춰 있기만 했을 거고 그게 싫어서 몇 번이고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는 상황을 바꿔 볼 생각이었어요. 판을 바꿔야 길드장님의 태도도 달라질 것 같아서. 그래서 후회는 안 해요. 결국엔 성과가 있었잖아요.”

느릿하고 차분하게 이어지는 말인데도 제대로 이해 가지 않았다. 길게 이어진 그의 변명을 몇 번이고 되새겨 봐도 마찬가지였다.

도통 알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성과가 대체 무엇인지.

그러나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한건주의 저 말조차 그가 철저한 우위에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거였다.

“건주야.”

사윤은 허탈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너한텐 그게 최선의 선택지였을지 모르는데.”

으득 입술을 짓씹었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데 건주의 입에서 들린 최선이란 말이 사윤을 뒤흔들었다.

최선은 여러 선택지 중 가장 나은 것을 고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차선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었고, 길이 여러 개일 때 성립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윤에겐 그가 유일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지독한 패배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한텐 개시발 좆같은 강요였어.”

평생 한건주는 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였기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