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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53)화 (153/266)

제153화. 이 새끼 뭐야 (1)

1년 만이다.

그딴 식으로 도망가고 약 1년 만에 제대로 된 재회였다. 지난번에는 자신만 일방적으로 그를 봤으니 재회라고 할 것이 못 되었다. 그마저도 심문에 끌려가느라 얼굴을 본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깨어나 보니 한건주가 사라져 있어 그의 흔적을 곱씹으며 내심 아쉬운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리 얼굴을 맞대 보니 알게 되었다.

아쉽긴 무슨.

그날 한건주가 깨어나 이딴 식으로 입을 열었다면 이따위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봤다면 저는 그를 곱게 살려 두지 못했을 거다. 죽여 버려 이리 다시 재회할 일이 없을 거였고 충동이었던 걸 자각할 만큼의 이성이 돌아오고 나서야 그냥 눈만 빼 둘걸, 혀만 잘라 둘걸, 하는 후회를 느꼈을 거였다.

사윤의 손이 멱살을 풀고 내려가 건주의 목을 움켜쥐었다. 흑안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네가 지금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나 본데, 예쁜아….”

사윤이 말끝을 흐리듯 속삭이며 건주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저 입술을 벌리게 해 그 안의 붉은 살덩이를 뽑아내야 만족할 것 같은 충동이 사윤을 집어삼킬 듯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자그마치 1년씩이나 사람 속을 뒤집어 놓더니, 제 인생을 죄 손에 쥐고 휘두르더니 이렇게 나타나? 그것도 불쾌하듯 바라보며?

지금 불쾌해할 게 누군데.

“하.”

자조가 흘러나왔다. 그의 등장과 동시에 짓밟힌 게 누가 말한 대로 X 빠지게 사람을 찾아다녀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던 범죄 길드 수장으로서의 자존심인지, 아니면 그가 내뱉은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1년이나 휘둘려 산 자신의 삶인지 판단이 안 섰다.

무언가가 기분이 더러울 정도로 수치스럽게 짓밟힌 것만은 분명한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강한 압박이 몸을 찍어 누르자 건주가 신음을 흘렸다. 목을 꽉 움켜쥐니 펄떡거리는 맥이 느껴지는 게 그가 환상이나 환시가 아님을 재차 자각하게 했다.

온기가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졌다. 산 사람의 온기가.

이해해 보라며.

우리가 동등해져야 한다며.

사윤은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그간의 일을 회고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그의 우위에 선 적이 없었는데, 간절한 사람은 자신이었는데 그날의 한건주는 마치 제가 한없이 올라선 사람처럼 얘기했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말한 동등이 무엇인지 며칠을 고민하고도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해 보라는 말과 동등 사이에서 몇백 번을 허덕거렸다.

그랬는데.

‘새 사람이라도 찾았나 봐.’

원망하는 듯한 어투에 허무함을 머금은 듯한 눈. 그게 사윤의 실낱같은 이성을 뒤흔들어 놨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이야. 시발, 내가 어이가 없어서.

쩌저적.

사윤이 무의식적으로 제한을 해제한 서리 기운이 회의실을 얼렸다. 뼈가 아릴 정도로 오싹한 한기에 장내에 있던 헌터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린 기운은 바닥을 얇게 덮더니 이내 벽을 타고 슬금슬금 올라갔다. 사윤은 그를 자각도 못 한 채 건주만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푸른빛이 뒤섞인 흑안에 오직 성장한 사내만 가득 들어찼다.

“한건주.”

이름 석 자를 부르며 흘린 눈빛은 고압적이었으나 결코 우위를 선점한 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를 인지한 것처럼 한건주는 사윤의 손 아래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겁을 먹거나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사윤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꼭 해 보라는 것처럼 사윤의 손을 찍어 누르듯 압박했다. 겹쳐진 손에 사윤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할 수 있겠어요?”

“…….”

“못 할 텐데.”

단정 짓는 어투에 사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못 할 것 같니.”

되묻자 건주가 또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다물었다. 불퉁한 시선이 사윤에게 닿았다. 서리 기운이 완전히 회의실을 뒤덮은 그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하게나.”

꽝꽝 얼어 버린 회의실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동주가 사윤의 어깨를 쥐고 그를 제지했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어서 미정이 와 사윤을 달래듯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으며 호철이 반대쪽 어깨를 잡았다. 이한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리에 곱게 앉아 있지 않고 사윤의 뒤에 서 있었다. 여차하면 무슨 조치를 취하겠다는 듯이.

“무슨 사정인진 모르겠으나 대면식 이후에 마저 하게. 그만한 판단력은 있지 않은가?”

동주가 나무라듯 얘기했다. 순식간에 S급 각성자 여럿에게 둘러싸인 사윤은 차차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끼며 눈꺼풀을 슴벅거렸다. 건주는 저를 죽일 듯 노려보다가 미정의 손길 아래에서 순한 양처럼 조금씩 평정심을 되찾는 남자를 뚫어져라 집요하게 응시했다. 미정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찡긋.

윙크하듯 눈을 움직인 미정이 사윤을 달래 건주에게서 천천히 떨어트려 놓았다. 사윤은 그 손길이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과격하게 반응하거나 미정을 쳐 내거나 하지 않았다. 미정이 살짝 웃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서 사윤이 자신에게 가장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이용해 먹는 뼛속까지 현명한 상인이었다.

“동주 씨 말이 맞아. 일단 지금이 노아 첫 대면식이라는 걸 기억해야지. 기사라도 나면 머리 아프다?”

미정이 가벼운 어조로 얘기했다. 이성이 돌아온 사윤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의자로 되돌아가곤 평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툭툭 터는 건주를 응시했다.

그래.

지금 당장 멱살을 붙잡고 추궁할 일이 아니었다. 추궁을 해야 한다면, 조금 더 진득하게, 긴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남의 회의실에서 할 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숨을 삼켜 분노를 삭인 사윤이 자리에 앉아 이한을 바라보았다.

“진정했으니까 진행을 하든 뭘 하든 알아서 해. 협회장한테 언질받은 게 있을 거 아니야.”

협회와 정부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 놈이었으니 분명히 따로 전달받은 게 있을 거였다. 그가 한국의 공식 1위인 만큼 노아의 팀장도 그가 될 게 분명했기에 사윤은 빨리 좀 진행하라며 이한이 주도권을 쥘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선의가 아닌, 서둘러 일을 마치고 길드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이한은 그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알겠다고 대답한 남자가 게이트 재앙 대책 팀 노아의 설립 배경에 대해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했다. 화합의 축제일을 들먹이는 이를 사윤은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한건주가 그때의 일을 기억할까 싶어 슬그머니 눈을 굴리자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을 계속 응시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기억은 못 하는 것 같네.

사윤은 이한의 이야기에 관심 없어 보이는 건주를 보고 판단을 내렸다. 한건주는 그날의 기억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있었으면 이딴 식으로 굴 리 없었다. 자신이 분노도 참고 그를 구해 줬는데 어떻게.

아.

생각하니 다시 화가 났다. 그래도 이번엔 서리의 기운을 흘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은 사윤이 무표정을 가장한 채 건주를 응수했다.

흥분을 가라앉힌 채 다시 보니 새삼 얼굴이 꽤 달라져 있었다.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더니 과거엔 소년미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젖살이 완전히 빠진 지금은 어엿한 성인으로 보였다. 그 변화가 사윤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사윤은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 이룬 성장이 하나부터 열까지 고까웠다.

쯧.

혀를 차자 열심히 설명을 이어 가던 이한이 사윤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문제가 있냐는 눈빛이었다. 사윤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러고 보니 이한을 만나면 반쪽짜리 신념을 구했다며 자랑한 뒤 골려 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건주를 만난 바람에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만 연관되면 이런 식으로.

한숨을 삼킨 사윤이 퀘스트창을 펼쳤다. 한건주와 만났는데도 활성화를 위한 퀘스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더 해야 하는 건가.

혼자 고심하고 있으니 헌터들이 스스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덧 자신 차례가 돼 사윤은 건주를 힐끔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비의 권사윤.”

간단한 소개에 자리에 있던 헌터 중 반이 웃었다. 모두가 사윤이 밤쥐의 수장임을 알고 있었기에 웃기지도 않은 연막이라는 걸 느낀 탓이었다.

“제비라니. 확실히 너랑 잘 어울리네.”

미정이 놀리듯 말했다. 사윤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건주를 발견했다.

왜 또?

그의 눈빛이 어딘지 저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이재희를 생각나게 해 인상을 찌푸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10분 뒤, 노아의 첫 대면식이 끝났다.

사윤은 대면식을 끝맺는 말로 팀 노아의 이름에 대해 설명하는 이한을 바라보았다.

“이름은 노아이되 저희가 노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홍수 속의 노아는 시민들이고 저희는 시민들이 살아남을 수단인 방주죠.”

그리 말하는 이에 사윤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건주의 눈동자가 생각에 잠긴 듯 아래로 굴러가는 게 보였다.

그래도 그것까지 꾸며 낸 건 아닌 모양이지.

한건주가 그리 떠나고 나서 사윤은 그가 자신에게 보여 줬던 모든 태도가 거짓인 건 아닌지 의심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저 태도를 보아 하니 적어도 노아가 죽고 나서 보인 반응만큼은 진실인 것 같았다.

‘당신한테도 무슨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아.

두통이 밀려와 신음을 흘린 사윤은 관자놀이를 꾹 짓눌렀다. 이한이 대면식이 끝났음을 알리자 헌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주 역시 어느덧 사라져 있었기에 재빠르게 움직인 사윤은 종식이 대기시켜 둔 길드 차량에 올라탄 다음 한건주를 향해 턱짓했다.

그 신호를 대번에 받아들인 길드원이 차를 출발시켰다. 빠르게 굴러간 차가 건주의 옆에 섰다. 우습지도 않은 가면을 쓴 남자가 의아해하며 검은 차를 바라본 순간, 사윤은 벌컥 문을 열어 사내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사람 하나를 집어삼킨 차의 문이 닫힌다.

대낮에 벌어진 납치 행각을 목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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