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대격변 (10)
“…….”
문이 열림과 동시에 깔린 적막이 각양각색의 성격을 보유해 요동쳤던 회의실의 분위기를 잠재웠다. 요란스러웠던 사윤의 입장 때와는 정반대의 차분하고 고요한 등장이었다.
“흠.”
30대 후반으로 예상되는 남자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잔잔한 시선이 회의실 안을 훑는다. 사윤은 아무런 말 없이 걸음을 옮겨 빈자리에 앉는 남자를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고지식하고 재미없기는.
저 엄숙하고 지긋한 분위기 좀 봐라. 예나 지금이나 도무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뭐랄까, 엄격한 장인어른 같은 기세라고 해야 하나. 경거망동하게 행동하는 즉시 훈장님처럼 소리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났다. 사윤이 기피하는 기운 1위였다.
“끙.”
그에게만큼은 다른 이들을 대할 때처럼 가볍게 굴 수 없어 입을 다문 사윤이 남자를 피해 시선을 돌렸다. 남들을 놀리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 사윤이었지만, 놀릴 만한 상대와 아닌 상대를 구분할 줄은 알았다. 태석 같은 부류가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해 수고를 들이는 재미가 있다면 저 목석같은 남자는 반대였다. 놀리는 순간 무표정한 얼굴로 ‘S급이란 등급에 걸맞은 품위를 지켜라’ 핀잔해 댈 것 같은데 뭐 하러 수작질을 부리겠는가.
상성이 영 안 맞았다.
“동주 씨도 왔네? 최정상 헌터들만 모은다더니 정말로 공식 랭킹 5위까지 다 부를 생각인가 봐.”
미정이 느긋하게 얘기했다. 그에 다섯 번째 멤버로 들어온 남자, 배동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안이 사안이니까.”
생김새만큼이나 무게감 있는 목소리였다. 사윤은 외로 꼰 다리를 흔들며 테이블에 둘러앉은 네 명을 바라보았다. 공식 1위인 이한에, 3위인 태석, 5위인 동주가 왔다면 나머지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멤버가 누구일지는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지 않은 2위와 4위.
그들이 빈자리를 채울 거였기에 사윤은 무감한 표정을 지었다. 미정이 온 걸 제외하면 예상한 라인업과 별 차이가 없어 흥이 식었다.
“그래도 4위는 시끄러운 놈이니 재미는 있겠네.”
콰아아앙!
말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문을 발로 차며 들어왔다. 사윤 때보다 더 소란스러운 등장에 노아 멤버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오? 꽤 많이들 모여 있네. 바글바글! 아주 바퀴벌레 같아?”
껄껄껄.
외투를 한 손에 쥐어 어깨에 걸치고 온 남자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못 본 사이 몸을 더 태운 건지, 기억하는 것보다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는 남자였다. 그가 팔자걸음으로 껄렁껄렁 들어왔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계속 끌끌 웃는 남자에 이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망측하게 느껴지니 조용히 하십쇼.”
새파랗게 어린 이한의 핀잔에도 남자는 그저 웃었다. 사윤은 그 모습을 보며 따라 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늙으면 좀 점잖아질 줄 알았는데 더 시끄러워졌어.”
얼핏 타박하는 말 같기도 했고 타이르는 어투 같기도 했다. 그에 선글라스를 벗고 사윤을 확인한 남자가 ‘오!’ 하고 반가운 기색을 표했다.
“너도 왔냐?”
“어쩌다 보니.”
“요놈, 딱 보니 사고 치러 온 것 같은데.”
눈을 게슴츠레 뜬 이가 눈썹을 까딱 올렸다. 사윤은 허밍을 흘리며 의자를 뒤로 쭉 빼 몸을 젖히듯 반쯤 눕혔다.
“협회가 사정해서 얌전히 있어 볼 생각이었는데.”
“네놈이 퍽이나 그러겠구나!”
남자가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미정이 손을 내저으며 저래서 결혼할 사람은 구하겠냐며 걱정에 가까운 핀잔을 뱉었다.
둘이 결혼하면 안 되나?
사윤은 미정과 4위인 호철이 비슷한 나이대라는 걸 기억하고 슬그머니 여인을 바라보았다. 시선의 의미를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미정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리 할 생각 하지 마. 거래 안 해 준다?”
“뭐….”
역시 상인이라서 그런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실력이 뛰어났다. 사윤은 입 밖으로 내뱉지만 않으면 된 거 아니냐며 능청스럽게 굴곤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호철이 들어오고도 시간이 꽤 지났으니 슬슬 마지막 멤버가 올 때가 됐는데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곱 번째는 젠이겠지?”
미정이 추측을 흘렸다. 사윤은 아마도, 라는 말로 대강 대답하며 기척을 파악했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우리의 일곱 번째 멤버께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싸게 구는 건 여전하네.”
사윤은 마지막으로 봤던 젠의 모습을 떠올렸다. 4년 전이었나.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몸으로 눈보라 속에 서 있어 오들오들 떠는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안경을 치켜올리며 센 척을 해 대던 그 모습은 여전히 사윤에게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구르면서 봐도 병약한 허접처럼 생겼는데 공식 랭킹 2위에 오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는 게 신기했던 청년이었다.
작년부터인가 해외로 나갔다는 얘기가 들려왔는데 부명 길드의 미정도 데려온 협회이니 젠도 어렵지 않게 영입했을 거였다.
모두가 마지막 멤버로 젠을 예상한 그때였다.
저벅.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딱 젠에게 어울리는, 무겁지도 경박하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생각보다 길어진 기다림에 지루함을 표하거나 무료함을 드러내던 헌터들의 시선이 문으로 돌아갔다.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음?”
먼저 이상함을 알아차린 건 미정이었다.
“아닌데?”
여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한마디 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회의실에 있던 헌터 중 그 누구도 무엇이 아니냐고 캐묻지 않았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젠이 아니다.
문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의 기운은 젠 특유의 깔끔하고 서늘한 기운이 아니었다.
음침하고 스산하다.
맑은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젠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라 헌터들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구도 이와 같은 기운을 가진 이를 알지 못했다.
“모르던 사이 공식 랭킹이 바뀌었나?”
이한이 의문을 드러냈다. 태석이 홱 고개를 돌려 사윤을 노려보았다.
“왜 또.”
“네가 수상한 누굴 끼워 넣은 거 아닌가?”
“그 정도면 의심도 병이다, 태석아. 그랬으면 내가 여기서 같이 고개나 기울이고 있겠니.”
사윤이 혀를 차며 그의 억측을 지적했다. 그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는 눈길에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줄곧 침묵하던 동주가 감았던 눈을 떴다.
“오는구나.”
나이는 미정과 호철이 더 많았는데 마치 최연장자라도 되는 양 연배 있는 어투로 얘기한 그가 일곱 번째 멤버의 등장을 알렸다.
끼이이익.
닫혔던 문이 아주 느릿하게 열리며 낯설기 짝이 없는 기운의 주인을 보여 주었다. 제일 먼저 드러난 건 회의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발이었다. 검은 구두가 보였고 그 위로 깔끔하게 다린 정장 바지가 보였으며 날이 꽤 더운데도 걸쳐 입은 얇은 코트가 시선을 이어받았다.
이 날씨에 저 옷을 입고 있다는 건 계절에 영향을 안 받는 S급이라는 뜻이다.
내가 모르는 S급이 국내에 있었다고?
사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리에 있던 모든 헌터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천천히 시선을 올려 새로운 멤버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전원의 시선이 상대의 얼굴에 닿았다.
“…….”
문이 활짝 열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형색이 모두 드러난 일곱 번째 멤버를 확인한 헌터들이 일순 침묵했다.
“가면?”
맨얼굴로 당당히 걸어 들어온 기존 멤버들과 달리 얼굴에 꽤 자신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정체를 숨길 요량이었던 건지 마지막 멤버는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행색에 모두가 당황했을 때 사윤은 낯선 이의 시선이 저를 향하는 걸 느꼈다.
여섯이나 되는 사람 중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제게.
눈이 마주쳤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였다.
“뭐야?”
인상을 쓴 사윤이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천재의 눈을 쓰려던 순간이었다. 맞물린 시선이 잠시 엇갈리는가 싶더니 가면의 시선이 내려가 사윤의 손에 닿았다. 집요하게 손을 응시하던 그의 눈살이 얼마 지나지 않아 구겨졌다. 앞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가면의 눈 사이로 분명히 보인 인상에 의문을 표하고 있자 어디선가 하, 하고 낮은 웃음이 들렸다.
자조적인 웃음 같기도 했고 헛웃음 같기도 했으며 비웃음 같기도 했다.
모두가 웃음을 낸 상대를 바라보았다.
“누군 X 빠지게 구르고 왔는데….”
혼잣말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으나 자리에 있는 헌터는 모두 S급이었다.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 중 남자의 말을 듣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윤은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새 사람이라도 찾았나 봐.”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꼭 허탈하다는 듯 얘기한 그가 천천히 가면에 손을 올렸다.
설마.
사윤은 입을 달싹이며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올라간 손이 가면을 움켜쥐는가 싶더니 서서히 내려온다. 검은 가면이 떨어지고 마침내 사내의 맨얼굴이 드러나자 미정이 어머, 하고 짧게 감탄했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넘긴, 살이 빠진 건지 선이 더 날렵해져 앳된 기색이 옅어진 남자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사윤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연 찰나였다.
우당탕!
테이블이 쓰러지고 의자가 바닥을 굴렀다. 눈 깜짝할 사이 최대 속력으로 뛰쳐나간 사윤이 남자의 멱살을 붙잡았다. 쿵! 사윤과 남자가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위에 올라탄 사윤은 제 눈앞에 보이는 얼굴이 환상 따위가 아님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하.
웃기지도 않지.
“시발. 너 뭐 하는 새끼야.”
한건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