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51)화 (151/266)

제151화. 대격변 (9)

“혹시라도 협회에서 괜한 짓을 하면 바로 나오십시오. 형님이 굳이 놈들 비위에 맞춰 줄 필요 없습니다.”

운전하는 내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종식이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며 충고했다. 사윤은 이 정도면 걱정도 병이다 싶어 손가락을 튕겨 종식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윽! 이마를 붙잡은 종식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아차, 힘 조절.

사윤은 그의 이마에 붉은 혹이 올라오는 걸 보며 힘 조절을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볍게 때릴 생각이었는데 그만 충직한 부하에게 커다란 혹을 선물해 주고 말았다.

“형님!”

충언했다가 얻어맞은 종식이 억울한 듯 외쳤다.

“그러게 왜 자꾸 걱정하고 난리야. 내가 어디 가서 얻어맞고 올 것 같니.”

“그래서 협회에도 연락을 넣긴 했습니다. 형님이 사고 치면 말려 달라고요.”

“음.”

딱!

사윤은 한 번 더 종식의 이마를 때렸다. 이번에는 일부러 힘 조절을 하지 않았디.

이 새낀 항상 입이 문제지.

한 마디 하면 될 거 꼭 열 마디를 해 매를 번다. 사윤은 눈물까지 맺힌 종식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던져 주었다.

“네가 걱정할 일 없을 거니까 돌아가서 두 발 뻗고 일해.”

“보통 이럴 땐 두 발 뻗고 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길드가 두 개가 됐는데 잠이 오나 봐.”

느릿하게 뱉은 말에 종식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멋쩍게 머리를 긁은 이가 사윤을 힐끗 보다 차 안으로 들어갔다. 계속 서 있다간 또 한 대 맞을 거란 걸 눈치챈 듯했다.

저 눈치도 늘긴 하네.

사윤은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종식의 차가 떠난 걸 확인한 협회의 직원이 사윤에게 다가왔다.

“제비 길드의 권사윤 씨 맞습니까?”

“그래.”

“길드 패와 헌터 자격증 보여 주시면 신원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사윤은 협회에서 마련해 준 길드 패와 자격증을 꺼내 넘겼다. 직원은 별 의심 없이 그것들을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되셨습니다. 회의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직원이 앞장서 건물 안으로 걸어갔다. 사윤은 느릿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제 손가락을 매만졌다.

끼고 나서 단 한 번도 뺀 적 없던 팔실로의 인연 페어링 위로 재희가 가져온 새로운 페어링이 만져졌다.

‘경진 씨가 닦달해 대니 이번만 연결하죠. 협회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데는 저도 동의하니까요.’

같이 지냈더니 의심병이 옮기라도 한 건지 그리 말하면서 건네준 페어링이었다.

‘무슨 페어링인데.’

‘소환수 페어링입니다. 차고 계시면 원하실 때 라이를 1회 소환할 수 있게 연결해 뒀어요. 제 소환수라 남은 한쪽 반지는 제가 끼고 있는데 불편하면 말해요.’

S급 소환수를 그냥 소환할 수 있다는데 불편함이 문제인가? 사윤은 기회다 싶어 냉큼 페어링을 받아 찼다. 재희가 그 모습을 차게 식은 눈으로 보든 말든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제 손가락에 자리 잡은 든든한 페어링을 드르륵 돌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협회 직원이 힐끔 사윤을 돌아보았다.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그럴 일이 있어서.”

어쩌면 회의실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놈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라이를 소환하고 소환사 능력을 얻은 것처럼 굴어도 꽤 재밌겠다 싶어 허밍을 이어 가던 사윤은 도착했다는 직원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굳게 닫힌 거대한 문이 사윤을 마주하고 있었다.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끌어내 회의실 안 기척을 확인한 사윤은 강한 기운이 세 개 정도 느껴지는 걸 탐색하고 웃었다.

자신이 네 번째 순서인 모양이었다.

4는 어감이 좋지.

죽을 사도 연상시키고 말이다.

사윤은 씨익 웃으며 닫힌 문을 열었다. 회의실 안쪽에 있던 헌터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윤에게로 돌아갔다. 음, 다 아는 얼굴들이군. 세 명의 헌터가 눈을 홉뜨며 경악을 금치 못했을 때 사윤은 뜨거운 시선을 즐기며 손가락을 살랑거렸다.

“아는 얼굴들뿐이네, 그렇지?”

사윤이 얼굴을 알고 지내는 국내 헌터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전부 사윤에게 살해 협박을 당한 적이 있거나, 공격받은 적이 있거나, 무기를 뺏긴 적이 있거나, 뒤통수 맞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반응이 온건할 수가 있나.

“너 이 새끼….”

책상 하나가 그대로 쾅 넘어지는가 싶더니 머리를 바짝 깎은 남자가 섬전처럼 움직여 사윤의 멱살을 쥐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놀란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잡힌 사윤마저 태연했다.

“안녕, 태석아. 못 본 사이에 얼굴이 좀 탔다? 축제는 왜 불참했어. 난 너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에 사내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사윤은 축제 때 보지 못한 얼굴을 이제라도 본 것에 만족하며 낄낄 웃었다. 그를 볼 생각으로 기대하며 축제에 갔는데 막상 가 보니 저만 보면 발작하는 그가 불참했다고 해 얼마나 서운했던가.

사윤은 종종 그를 놀리는 재미로 지루한 생활을 버텼다.

나이도 찬 주제에 밟아 놔도 같잖은 신념을 들이대며 계속 기어오르는 게 꽤 귀엽지 않은가.

“넌 혓바닥이 더 기름진 거 말곤 변한 게 없다, 새끼야? 네가 어디라고 여길 처와.”

“속상하게 군다, 태석아. 나도 나름 협회한테 초대받은 건데.”

“평소라면 그 초대장 찢어 버릴 새끼가 무슨 변덕으로 들어왔냐고. 이 일이 네 생각처럼 가벼운 사안인 줄 알아?”

기차 화통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가 강렬히 고막을 때렸다. 회의실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 사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험악한 표정의 남자는 이를 으드득 갈다가 사윤을 들어 올렸다. 2미터가 넘는 거구의 남자였기에 사윤의 발이 들렸다.

“해 보게?”

사윤이 웃으며 제 멱살을 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짙은 흑안에 푸른 빛이 언뜻 돈 순간이었다.

“그만하죠.”

마시던 차를 내려놓은 남자가 상황을 중재했다. 이한이었다.

“싸우려고 모인 게 아닌데 경솔하게들 구시네요. 오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얘기 들었을 텐데도요.”

이한의 시선이 태석을 향했다. 협회에 초대받아 이곳에 나타난 사윤이 아닌 소란을 피운 태석을 탓하겠다는 게 명백한 태도였다. 그 눈빛에 눈살을 구긴 남자가 사윤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무슨 속셈이야.”

“글쎄.”

“권사윤.”

어깨를 으쓱이자 묵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숯으로 그린 듯한 짙은 눈썹이 남자의 인상을 더욱 매섭게 만들었다.

“허튼짓하지 마라. 물장구도 네가 놀 물에서 쳐야지.”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경고한 남자가 내팽개치듯 사윤을 놓았다. 강한 힘이었는데도 휘청거림 하나 없이 바로 선 사윤이 웃었다.

이러니 재밌었다.

여차 싶으면 꼬리 말 기세로 덤벼드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한 실력으로 덤벼드는 것도 아니다. 저와 붙어 볼 만한 실력을 지녔으면서 제게 진심으로 덤비는 이는 오직 그뿐이었다. 역시 제 손에 길드 하나를 잃어 본 길드장의 원한은 남달랐다.

재수도 없었지.

하필이면 강제 퀘스트에 딱 태석의 길드가 걸릴 게 뭔가.

사윤은 저를 노려보며 자리로 돌아간 남자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쉽게 됐네. 원한다면 대면식 끝나고 상대해 줄 수도 있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얼마든지 시간을 내 줄 생각이라 나긋하게 말하니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침묵했다. 분명 입을 다물고 있는데 어째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넌 여전하네.”

빈자리 중 하나를 골라 의자를 빼 앉으니 상대적으로 높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사윤은 다리를 외로 꼰 채 턱을 괴고 음성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높게 틀어 비녀로 고정시킨 여인이 사윤을 보고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나가 여기 올 줄은 몰랐는데.”

“어머, 상인 길드는 헌터도 아니다?”

“그렇게까지 말한 건 아니고.”

능청스럽게 말을 받아치는 여인에 사윤은 피식 웃었다. 국외로 나간 줄 알았더니 아직 한국에 머무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 꼬맹이일 적에는 귀여웠는데 스물한 살 때부터인가 성격이 나빠지더니 이젠 걷잡을 수 없는 망나니가 됐구나?”

“누굴 닮았나 보지.”

“내가 너 가르친 건 두 달밖에 안 되는데 무슨 그런 망언을.”

여인이 말도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사윤은 그 덕분에 오랜만에 옛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국내 최대 상인 길드인 부명이지만 8년 전 사윤이 열아홉 살일 때의 부명은 막 설립된 신설 길드였다. 그래서 어린 사윤과도 거래를 해 주는 길드이기도 했고 말이다.

필드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 헌터 업계에 대해 잘 몰랐던 사윤에게 정보를 건네주고 거래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 준 게 당시 부명의 길드장이었던 미정이었다. 외관만 보고 뭣도 모르고 누나라고 불렀는데 30대 후반인 걸 알았을 적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인연이란 게 참 특이하다고 이후로도 거래를 위해 잠깐잠깐 만나다가 부명 길드가 거래 규모를 키우며 해외까지 뻗어 간 뒤로부턴 못 만났던 바쁜 사람을 여기서 다 만나게 됐다.

예상했던 노아 멤버에는 없던 사람이라 의외란 생각을 하고 있으니 사윤이 들어오고 나서 도로 닫혔던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노아의 다섯 번째 멤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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