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대격변 (8)
정리하자면 판을 깔아 줄 테니 양지로 나오라는 소리다.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이었고 무모하다면 무모한 도전이다. 아무리 일반인들 사이에서 제 얼굴이 알려진 적이 없다지만 어떻게 최악의 길드라 불리는 밤쥐의 수장인 자신을 공인으로 내세울 생각을 한 건지. 단순한 공인도 아니다. 국가의 얼굴이 될 팀에 들어오라는 제안이지 않은가.
말 그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S급 중 한 명이 되라는 소리였다.
뭐, 헌터들 사이에서야 자신이 알음알음 알려져 한국을 대표하는 범죄자쯤 되긴 했지만….
하여간.
어지간히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나 보다.
이한이 가져다준 정보가 그렇게 충격적이었을까.
이타적이고 정부에 협조적인 이한은 축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부와 협회 사람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고했을 게 분명했다. 다른 헌터들이 그랬듯 말이다.
한 사람도 아니고 세계 여럿 헌터가 다 같은 말을 해 대니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였고 협회는 게이트를 막는 데 최고 기여도를 달성했던 자신을 어떻게든 잡아 두고 싶어 할 거였다. 협회장과 길드장이라는 비슷한 직위에 있으니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인재가 있는데 다른 길드에게 뺏길 순 없지 않은가.
물론 이번에는 그게 다른 나라이긴 했지만.
때마침 경진이 무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며 타국 협회의 스카우트 제안을 메일로 공유해 주었다. 사윤은 온통 영어로 쓰인 그 글을 힐끔 보았다가 미련 없이 휴지통으로 넣었다.
한국어로 보낼 성의도 없는 스카우트에는 관심 없었다.
“애초에 국내를 떠나는 게 손해니.”
사윤의 모든 건 한국에 있었다. 길드 건물도, 성향 보유자인 한건주도.
활성화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에 남아 있어야 했다. 마침 밤쥐도 슬슬 국내 규모가 커져 길드를 분리할까 생각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타이밍 좋게 온 제안이었다.
대외용 길드를 만드는 것도 밤쥐의 목표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범죄 길드의 수장이었던 자신의 이력을 들킨다고 해도 욕먹는 사람은 협회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도리를 저버린 협회를 비난할 거였고 자신은 거기에 옵션 정도로 얹어져 가볍게 인성을 평가받을 뿐이었다. 협회는 그것이 이미지에 타격이 간다지만 밤쥐는 딱히 손해 볼 게 없었다. 안 그래도 바닥에 떨어진 평판인데 더 떨어져 봐야 욕 좀 더 먹는 거 말고 뭐 있겠나.
이참에 안 들키고 욕 안 먹고 활동할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고.
문제가 있다면 인류의 악에 환장하는 제 시스템이 무슨 수를 쓸지 모르겠다는 건데.
사윤은 웬일로 아무런 창도 뜨지 않고 잠잠한 시야에 고민하다 다음 날 밤쥐 간부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한 시간 남짓한 회의 끝에 결정된 사안은 그대로 협회에 전달되었으며 협회는 웬일로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답변을 보냈다.
밤쥐가 요구한 건 다음과 같았다. 길드를 새로 설립하는 데 드는 비용과 운영 자금은 모두 협회와 정부에서 지불할 것, 대외적으로는 협회 소속으로 칭하되 실질적 관계는 소속이 아닌 협력일 것, 사윤이 원하는 때에 언제든 발을 뺄 수 있을 것, 길드 운영에 관해 높은 자유도를 보장해 줄 것.
그 대가로 사윤은 협회의 뜻에 맞춰 길드를 추가 설립하고 훗날 정부가 만들 재앙 대책 팀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협회는 거기에 더해 새 길드가 설립되고 나면 밤쥐의 활동을 지금의 절반 이하로 줄일 것을 요구했다. 한마디로 새 길드가 세워지면 밤쥐로 활동을 자제하라는 소리다.
길드원들이 반발했으나 사윤은 3할 정도 줄이는 것으로 타협했다. 애초에 새 길드에서 밤쥐의 업무를 보면 되는 거였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협회가 줄여 달라는 건 범죄 횟수였는데 그건 막무가내로 풀어 두었던 길드원들을 꽉 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사고 치지 말라고 살짝 토닥여 주면 그 고삐 풀린 망아지들도 얌전해질 테니 협회가 제안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사윤에겐 부담감 없는 조항이었다.
전체적인 틀이 잡히자 경진이 추가로 여러 번의 메일을 더 작성하고 협회와 의견을 조율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사윤은 지금 새로운 길드의 이름을 정하고 있었다.
“밤쥐가 밤말은 쥐가 듣는다였으니까 양지 길드는 낮새 어때. 어차피 대외용 길드인데 이름을 굳이 성의 있게 지어야 하나?”
“아예 밤쥐 대외용 길드라고 소문을 내십시오. 누가 이름을 그렇게 뻔하게 짓습니까? 별로입니다.”
“밤쥐도 잘만 받아들였으면서 무슨.”
“밤쥐 이름은 내가 길드에 들어올 때부터 정해졌으니 알 바 아닌데 새 길드는 다르잖아, 형님.”
야심 차게 낮새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는데 종식과 경진이 격하게 반대했다. 사윤은 그렇게 별로인가 싶어 소파에 누워 있는 재희를 불렀다.
“네가 생각하기엔 어때, 재희야. 이상하니.”
“예.”
질문과 동시에 대답이 나왔다. 그만큼 진심이구나 싶어 사윤은 서류를 팔랑거리며 의자 등받이를 젖혔다. 쓸데없이 길드 이름에만 벌써 15분을 소요하고 있었다.
“낮새가 별로면 뭐 밤새해?”
“밤새 일만 시킬 것 같은 길드 이름이잖습니까.”
“허이고. 불만도 많다.”
입맛 한번 까다로웠다. 사윤은 제가 무슨 의견을 내도 반대하는 간부들을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응시했다.
“반대만 하지 말고 너네도 무슨 의견 좀 내 보지?”
“형님이 반대할 이름만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이름이 다 그렇습니까? 레뎀이라거나 뭐 그런 더 어감이 좋은 이름도 있지 않습니까.”
“한국인이잖냐. 순우리말로 가 순우리말로. 너구리 뭐 이런 건 어때?”
“…….”
그 말에 순식간에 사무실이 서늘해졌다. 사윤은 재희마저 저를 한심하게 보는 걸 보고 머쓱해져 입을 다물었다.
아니, 너구리가 뭐 어때서.
길드원들 사이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윤이 계속 낮새에 집착하자 의견을 낸 건 재희였다.
“정 낮새와 비슷한 이름의 순우리말을 하고 싶으면 노새는 어떻습니까.”
“별론데.”
“왜요?”
“NO 본새 같잖니. S급이면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어야지, 재희야.”
“…….”
“왜.”
“사윤 씨가 아저씨 같은 건지 애새끼 같은 건지 짐작이 안 가서요.”
혀를 찬 재희가 너구리 같은 이름이나 생각하는 걸 보면 속에 40대가 든 게 틀림없는데 가오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어린애 같다며 중얼거렸다. 핀잔하려고 한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진지하고 흥미로워하는 표정이라 기분 나빴다. 누가 이런 걸 탐구하려 든단 말인가.
자신의 정신적 자아가 어느 정도 나이대의 정서를 갖췄는지 캐내고야 말겠다는 눈빛을 던지는 이가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린 사윤은 기각했던 의견을 곱씹었다.
“노새라. 노새, 노새, 노새….”
흠.
고민하던 사윤이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귀찮다. 그냥 제비로 가자.”
“…….”
“박수 안 치니.”
길드 이름으로 더 시간을 끌고 싶진 않았다. 슬슬 이름을 정해야 했기에 못을 박고 웃어 주자 간부들이 애써 웃으며 박수를 쳤다. 경진은 한숨을 내쉬었고 종식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 사이에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재희뿐이었다.
“적어도 여태껏 나온 이름 중에는 가장 괜찮군요.”
그렇게 밤쥐의 대외용 길드는 제비가 되었다.
[신설 길드 ‘제비’의 길드장, 새로운 S급의 탄생?]
[‘무료로 게이트 포화 잔해 처치해 드려요.’ 제비 길드의 따뜻한 행보]
[정체되어 있던 국내 헌터계의 격동. 제비 길드.]
[제비 길드장, “많은 관심에 감사드려 앞으로도 선한 행보를 이어 가겠다.”]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정부와 협회의 언론 플레이가 시작되었다. 부탁을 받아 제비 길드 이름으로 후원 몇 번, 선한 짓 몇 번 했더니 그게 천사의 구원쯤으로 변모되었고 석 달의 시간이 추가로 흐르자 제비는 감히 밤쥐라는 범죄 길드는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선한 길드로 포장돼 신흥 강자로 날아올랐다. 국가 단위로 나서니 길드 하나 부흥하는 게 이토록 쉽다. 솔직히 말해서 배알이 꼴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남의 길드였다면 배 아파 죽었겠지만 자신의 길드였다. 사윤은 배 조금 아프고 어깨나 한껏 올리면 되었다.
제비 길드로는 사윤을 포함해 밤쥐의 정예 대부분이 옮겨졌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기존 밤쥐의 축소판쯤 되는 구성원이었다. 전체 인원이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소규모 정예 길드. 열아홉 명이라는 숫자가 애매하기도 하고 오히려 제비만의 느낌이 있는 것 같기도 해 추가 영입을 고민할 즈음이었다.
“저도 들어갈까요?”
사윤이 협회가 최초로 창설한 국가적 게이트 재앙 대책 팀 ‘노아’의 일원으로 첫 대면식에 참석을 요망하는 메일을 확인했을 때 재희가 얘기했다. 사윤은 그가 들어오겠다고 한 곳이 제비인지 노아인지를 몰라 남자의 말간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디에.”
“제비 길드요. 무소속으로 활동한 지도 오래됐고 이 건물에서도 거의 1년 넘게 지내고 있는데 슬슬 저도 길드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나 싶어서요. 밤쥐는 범죄 길드라 피했지만 제비 길드는 그래도 봉사를 꾸준히 가잖아요?”
그건 사윤이 카르마 수치를 관리하기 위해 가는 봉사였다. 협회는 그 건수를 물어 냅다 제비 길드의 선행으로 기사를 냈는데 그걸 보고 길드에 가입하겠다는 마음을 품다니. 몇 달을 봐도 매번 신기한 성정이었다.
“너 정도면 1인 길드 설립도 될 텐데?”
최근에는 A급 이상의 각성자들이 1인 길드를 설립해 활동하는 양이 많아졌다. 두 달 전부터인가 새롭게 나타난 신원 미상의 1인 길드가 부쩍 성적을 내면서 일어난 신드롬 같은 현상이었다. 이재희라면 제2의 1인 길드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뛰어나니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1인 길드로 움직이기에는 부담이 큽니다. 무엇보다 딱히 길드장을 하고 싶지 않고요”
“그렇다면 뭐.”
사윤은 구태여 가입하겠다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S급 하나가 더 들어온다면 저야 좋았으니까.
이로써 제비의 S급 헌터는 총 세 명이 되었다.
자신과 이재희, 그리고 옌.
종식도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와 찬희는 워낙 일반 헌터들 사이에서도 얼굴이 알려졌기에 밤쥐에 놔두었다. 자신이 없을 때 밤쥐를 제대로 굴릴 사람도 필요했으니 말이다.
든든한 길드원을 얻어 만족한 사윤은 재희에게 길드원이긴 하지만 길드장과 비슷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 일러 준 뒤 달력을 확인했다.
앞으로 일주일이다.
일주일 뒤 노아로 활동하게 될 길드장급의 헌터들이 협회로 모이게 될 것이다.
일곱 명이라고 했지.
협회가 미리 언질해 준 노아의 인원수를 재차 곱씹어 본 사윤은 예상이 가는 인물들을 차례로 떠올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째 성향이 안 맞는 인물들만 모일 듯해 벌써 우스웠다. 꽤 즐거운 난장판이 될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