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대격변 (7)
“나 말고 다른 사람 부른 거 아니야? 사연이라든가, 사운이라든가. 아니면 동명이인이 따로 있나.”
“권사윤 씨 부른 거 맞으니 그만 부정하시죠.”
연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재희가 핀잔했다.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그는 제게 온 연락을 직접 보여 주기까지 했다.
“밤쥐 간부들이 연락을 안 받으니 제게까지 보낸 모양입니다. 여기 보면 확실히 사윤 씨 이름이 적혀 있죠?”
말 그대로다. 사윤은 문자에 적힌 제 이름을 낯선 눈으로 응시했다.
아니, 진짜 나라고.
확답을 듣고도 믿을 수 없어 제 핸드폰을 찾았다. 따로 수리한 건지, 재희가 한결 말끔해진 핸드폰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어디에 전화하시게요? 설마 협회에 따지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아무리 네가 막 나간다 해도 그러진 않을 거라 믿겠다는 어투다. 사윤은 눈빛에 목소리가 지원되는 것 같아 잠시 황당해하다 폰을 흔들었다.
“따지는 것보단 확인 전화지. 그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헌터 협회의 행정 직원 한 명과 인연이 닿아 있었다. 비록 강제적인 구원과 공갈, 그리고 협박이 만들어 낸 인연이긴 했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시대에 그 정도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윤이 위협을 당한 쪽이 아니라 가한 쪽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럼 뭐 어떤가.
그래도 제가 그를 죽음에서 한 번 건져 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구명받았으면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 명목으로 3년이 넘게 부려 먹고 있긴 했지만 원래 은혜란 건 평생을 갚아도 모자란 법이었다.
신호음이 세 번쯤 이어지고 정말로 받기 싫다는 듯 음울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국내 헌터 협회 행정 지원 팀 소속 우진해입니다.
“진해야.”
사윤은 짐짓 상냥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수화기 너머 인물이 말없이 침묵했다.
“내가 협회랑 정부한테 이상한 말을 좀 들었는데.”
-아, 스카우트 제안이요?
“그래, 그거. 내가 보기엔 그게….”
-딱히 실수거나 오류인 건 아닙니다. 협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해 보낸 스카우트 제안이니 있는 그대로 봐 주시면 됩니다.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진해 쪽에서 먼저 흐름을 읽고 의문을 풀어 주었다. 사윤은 여전히 재희의 핸드폰 화면을 채우고 있는 문자를 곱씹어 읽었다.
“그럼 이게 해킹당해 보낸 문자가 아니라고?”
-협회를 뭐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설립 이래 해킹에 당한 적이 단 한 번도….
“너네 경진이한텐 뚫렸잖니.”
-단 한 번 있을 뿐이었습니다.
말은 잘한다.
사윤은 코웃음을 쳤다가 이내 샛길로 새려는 화제를 바로잡았다.
“그럼 정말로 협회가 날 초대한 거라고? 재앙에 대비해 만든 팀에 밤쥐 길드 수장이 들어가 있다는 게 밝혀지면 좋을 게 없을 텐데?”
-그 점은 대응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게 뭔데?”
-잠시만요…. 네, 팀장님!
그 말을 끝으로 뚝 하고 통화가 끝났다. 사윤은 제 전화를 피하다 못해 이젠 아주 막 끊는 상대에 통화 종료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자식 아무래도 노린 것 같은데.
꼭 누군가 자기를 부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냉큼 벗어난 것 같았다. 정말로 급한 일이 생겨 통화를 끊은 것치곤 직전에 들은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찼으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요즘 너무 풀어 준 게 아닌지 고민하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해에게서 문자가 왔다. 무슨 대응책인지 팀장에게 물어보고 확답이 내려오면 알려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약삭빠르긴.
화가 나려 해도 일을 착실히 척척 해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불쾌감이 가라앉았다. 운도 좋다며 혀를 찬 사윤은 궁금하다는 듯 다가오는 재희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이렇다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면 답 나올 거다.”
“그렇겠군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연락이 오기 전까지 회복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듣기론 보실 업무도 많고 보실 사람도 많다고 들었거든요. 마침 방금 깨어나셨다고 간부분들께 연락을 돌렸으니 그분들도 곧 오실 겁니다.”
“뭐?”
쓸데없는 짓을 했다. 바란 적도 없어 눈을 크게 뜬 사윤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과격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뱀이 기어가 문에 매달렸다. 녀석이 스멀스멀 움직여 달칵, 문을 열어 주니 밤쥐 간부 네 사람이 무너진 댐에서 물이 쏟아지듯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 깨어나셨다면서요!”
“형님!”
“오, 형님 얼굴은 꽤 멀쩡해 보이는데?”
“축제를 갔다 오라 했더니 저승을 찍고 오네, 아주.”
차례대로 찬희, 종식, 옌, 경진의 말이었다. 사윤은 오랜만에 봐도 달갑지 않은 얼굴들을 질색한 채 마주했다. 다른 때도 유난인 그들이지만 처음으로 3개월씩이나 기절해 있던 오늘은 그 유난이 더할 거라 예상된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윤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경진을 시작으로 넷은 차례대로 잔소리를 늘어놓곤 몸에 좋은 거라며 각종 보약을 건네주었다. 장어에 자라에 뱀에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미쳤다고 뱀술을 들고 와?”
제 앞에서 지금 뱀을 꺼내나 싶었다. 조금 전 방문을 열어 주었던 뱀이 사윤의 어깨에 기어 올라와 함께 쉭쉭거렸다. 화내기라도 하는 모양새에 삼각형 머리를 매만져 주자 그제야 진정한 듯 어깨에 편히 늘어져 기댔다. 옌이 들고 온 뱀술은 고스란히 그가 도로 가져가게 되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너무 오래 안 깨어나셔서.”
“난 꿈에 갇힌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옌이 능청스럽게 얘기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부정하지 않은 사윤은 오랜만에 다섯이 깨어 있는 채로 만난다며 왁자하게 떠들어 대는 일행들을 피곤한 눈으로 응시했다. 힐끗 이재희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이 소동에 낄 생각이 쥐꼬리만큼도 없어 보였다.
자기가 불러왔으면서.
불러오는 놈 따로 있고 상대하는 놈 따로 있다. 쯧, 혀를 찬 사윤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간부들이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쉴 때는 조용한 게 좋았다.
“종식아.”
“네, 형님.”
“너 내가 맡긴 업무는 다 하고 여기 왔니.”
“…….”
도르르륵, 종식이 사윤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의 입이 언제 열렸었냐는 듯 꾹 다물렸다.
“경진아.”
“아, 그러고 보니 보고서 쓸 게 남은 것 같기도 한데.”
경진은 구태여 사윤이 문제점을 짚어 주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약삭빠른 놈이었다.
“찬희야.”
“네!”
“넌….”
음.
말을 하다가 만 사윤은 난감하게 찬희를 바라보았다. 마주하게 된 남자의 눈이 너무 반짝거린다. 그가 제게 팬심 엇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꽤 과해 보였다. 오랜만에 일어나서 그런가? 유독 부담스러운 시선에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던 사윤은 결국 본심을 뱉었다.
“넌 나 보지 마라.”
“…네.”
찬희가 시무룩해져서 대답했다.
“너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내가 편히 못 쉬니 여기서 나가고.”
덧붙인 말에는 아예 어깨가 푹 처졌다. 그 꼴이 비 맞은 강아지 같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자신은 어쨌거나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세 명을 처치했으니 이제 한 명이 남았다. 가장 껄끄러운 상대를 쫓아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음?”
보여야 할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희를 포함해 여섯이 있던 방엔 어느덧 다섯 명밖에 남지 않아 사윤은 의문을 표했다. 경진이 그 모습을 보더니 열린 문을 가리켰다.
“옌이라면 아까 나갔는데.”
“이럴 때만 빠릿빠릿하게 굴지.”
귀신같은 속도다. 사윤은 그에게도 일을 다 끝낸 건지 물어봐야 했는데 기회를 놓쳐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나머지 세 간부를 방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충족했다. 소란이 가시고 다시 기분 좋을 만큼의 고요가 찾아왔다.
그래도 3개월 누워 있던 것치곤 꽤 온건한 반응인 건가.
제 멱살 붙들고 함부로 걱정했다가 땅에 파묻힐 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제야 편히 쉬겠네.”
“보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요.”
재희가 간부들을 다 쫓아낸 사윤을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사윤은 제 침대 옆을 내려다보았다. 간부들이 두고 간 각종 보약이 거기 있었는데 옌이 도망치는 바람에 뱀술도 거기 함께 남아 있었다.
탁탁탁!
뱀이 불만스럽다는 듯 꼬리로 뱀술의 병을 쳤다. 저러다 깨지겠다 싶어 휘파람으로 뱀을 부른 사윤은 목으로 올라오는 뱀을 쓰다듬으며 재희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다.
사윤은 조금 전 소란의 원인 제공자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재희야.”
“네.”
“너도 나가야지, 거기서 뭐 하니.”
“…….”
시종일관 천기를 읽고 사람을 꿰뚫어 보는 이를 몸이 안 좋을 때도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더군다나 쓸데없는 친절로 사람을 불러와 피곤하게 만드는 성격이라면 더더욱.
이럴 때는 한건주가 더 나았지.
한건주는 쉴 때 얌전한 편이었다. 독서를 하든 잠을 자든 얌전했고 좀처럼 말 거는 일도 없어 귀찮지 않았다. 가끔 집요하게 저를 왜 데려왔냐고 묻는다든가 자신에 대해 캐내려고 할 때만 빼면 말이다.
무심코 그리 생각하던 사윤은 제가 또 건주를 생각했음을 인지하고 한숨을 내쉬며 퀘스트창을 불러왔다. 본래 사윤은 든 자리는 알아도 난 자리는 모르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한건주만 예외였다. 어쩌면 그 자체가 제 삶에 예외로 들어온 사람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추측하며 퀘스트 목록에 들어가자 여태껏 받은 퀘스트 중 완료되지 않은 것들이 주르륵 떴다. 그중에서 활성화 퀘스트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으니 문득 침대에 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잠금을 풀어 확인하자 진해에게서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밤쥐 수장으로 오는 게 아니니 문제 될 게 없답니다.]
“뭐?”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이윽고 문자 하나가 더 도착했다.
[범죄 길드 말고 정식 길드 하나 만들어서 거기 수장으로 와 달래요. 오는 김에 정식으로 랭크 측정도 하고요. 공식 S급으로 활동해 달라는 소리인 것 같은데… 협회가 미친 걸까요?]
[…뒤의 문자는 잘못 보냈습니다. 잊어 주세요.]
이어지는 문자에 사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