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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48)화 (148/266)

제148화. 대격변 (6)

동결되었던 활성화를 위한 두 번째 걸음 퀘스트는 아예 퀘스트 목록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새롭게 갱신된 활성화 퀘스트가 있었다.

다시 성향 보유자와 재회하는 것부터 시작이라니.

심지어 이번에는 한건주 한 명으로 아예 못 박고 시작했다.

퀘스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도 이전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활성화의 포문을 열었던 건 돌이킬 수 없나 보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확실한 건 이재희를 만나도 요지부동이길래 반쯤 포기하다시피 했던 저항하는 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수단을 다시 손에 넣었다는 거다.

저항하는 자.

막연히 진정한 인류의 악에 대립하는 성향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번 일로 사윤은 확신했다.

그건 신들이 말한 빌어먹을 제 운명에 저항한다는 말일 게 분명했다.

‘악으로서 삶을 끝낼 것인가?’

분명 그리 말했으니까.

대체 그 운명이라는 게 뭘까.

‘사윤아. 태양을 닮아 갈 소년아. 어리석은 죄인아.’

그 부름은 무얼 의미하는 거였을까.

“음….”

심문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려 하는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 순간들이 마치 잠결에 꾼 꿈이라도 되듯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어 인상을 찌푸린 사윤은 잊지 않기 위해 그곳에서의 일을 곱씹다가 짧게 신음했다. 두통이 밀려왔다. 지끈거리는 통증이 살벌한 수준으로 날카롭게 꽂히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함부로 기억하지 말라는 건가.

“괜찮습니까?”

이마를 붙잡으며 고개를 숙이니 이재희가 다가왔다.

아.

사윤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런 뒤 망설였다.

시팔 스킬 대가가 수명인데 막 써 보라 할 수도 없고.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도륵, 이재희의 눈동자가 좌우로 굴러갔다. 허공에 초점을 맞춰 둔 채로 무언가를 읽듯 움직이는 눈동자에 사윤은 그의 손을 놓았다. 헛숨에 가까운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탐구에 미친 이재희는 자기 알아서 천기를 읽고 있었다.

사실 천기를 읽는 건 대가를 내놓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그건 이재희에게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아주 당연하게 작용되는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말하는 것은 문제가 되었다.

지금 보고 있는 걸 내게 말해 줄까?

…아마 말해 주겠지.

이재희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말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건 이거대로 착잡하다. 자기 수명이 무슨 1억 년쯤 남은 줄 아나 보지. 이재희는 천기누설을 남용하는 횟수가 너무 심했다.

저러다 훅 죽어 버리면 어쩌려고.

하다못해 그의 남은 수명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윤은 천재의 눈을 써 이재희의 스킬 정보를 확인해도 자세히 나오지 않는 설명에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변한 점은 없군요.”

“없어?”

“네.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이걸 살펴봐 달라고 붙잡은 거 아닙니까?”

눈치도 좋았다. 사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말에 숨을 내쉬고 몸을 늘어트렸다.

더 자세히 말해 주지 않는 게 아쉬웠지만 저게 이재희 나름의 최선이었다는 걸 안다. 이보다 상세히 말하려면 스킬을 써야 했는데 크게 변한 것이 없다면 스킬을 써 수명을 지불할 필요까지 없었다.

그냥 적당히 아는 데서 만족해야지.

대충 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파악을 끝냈다. 최우선으로 잡아야 할 건 한건주를 다시 찾아내는 일이었고 그 이후에는 퀘스트가 알아서 설명해 줄 거다. 길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분에 오묘해진 사윤은 뒤늦게야 잠시 미뤄 두었던 일을 꺼냈다.

“축제는 어떻게 됐어?”

말이 축제였지 사실 제가 죽고 난 이후의 일을 얘기하는 거였다. 그새 차 한 잔을 비워 도로 타 온 재희가 의자에 앉아 찻잔을 매만졌다. 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말할 게 많아 시간이 꽤 걸리는군요.”

“일이 많았나 보지?”

“정확히는 시간이 많이 지났죠.”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사윤은 놀라 반문했다. 그제야 재희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뱉더니 고개를 들어 사윤을 바라보았다.

“3개월입니다.”

“…뭐?”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3개월이라니.

이 타이밍에 나올 만한 얘기는 하나밖에 없었다. 사윤은 눈을 끔뻑였다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이재희는 전보다 조금 더 상세한 답변을 내놓았다.

“사윤 씨가 쓰러진 기간 말입니다. 지금은 화합의 축제로부터 3개월이 흐른 뒤입니다.”

“…….”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만한 시간을 누워 지내 본 적도 없고, 기절해 본 적도 없었다. 처음 겪어 본 일이라 당황하고 있으니 이재희가 홀짝, 차를 마셨다. 이쪽은 놀라서 침도 안 넘어가는데 혼자 평화로웠다.

“그러니 그간 있던 일을 말씀드리려면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기다려 주시죠.”

사윤은 고개를 돌렸다. 제 방에 놓인 달력을 찾기 위해.

농담이나 거짓으로 말한 게 아닌 건지 정말로 자신의 방 탁자에 놓인 달력은 3월로 바뀌어 있었다.

허.

순식간에 석 달을 잃어버린 사윤은 조용히 탄식했다. 재희가 조금 뒤에 입을 열었다.

“일단 게이트는 닫혔습니다.”

“닫혔다고?”

“정확히는 봉합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윤 씨가 쓰러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앞에 시스템 오류 창이 뜨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더니 시스템을 재점검하겠다던 알림창이 뜨고 잠시 시간이 멈췄습니다. 정확히는 그 자리에 있던 헌터들을 제외하고 모든 게 멈췄다고 해야겠죠.”

다른 헌터였으면 이쯤에서 시스템이 시간을 멈췄다는 얘기에 놀라겠지만 사윤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시스템의 농간질에 지긋지긋하게 놀아난 터였으므로.

혼자서 하루 전으로 회귀하는 일도 겪었는데 시간 좀 멈춘 게 대수일까.

사윤이 놀라지 않자 이재희는 그 표정을 흥미롭게 관찰하다가 설명을 이어 갔다.

“다시 시간이 흐르자 드래곤은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게이트 역시 도로 닫히더군요. 찢긴 세상이 봉합되기라도 하듯 조금씩 게이트의 균열이 사라지더니 이내 완전히 소멸됐습니다. 그리고 부서진 건물들이 수복됐고 몬스터 시체가 사라졌으며….”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남자가 숨을 한 번 들이켰다가 목을 축였다.

“…죽었던 사람들이 되살아나더군요.”

“…….”

되살아난 경험이 있던 사윤은 침묵을 선택했다. 이야기를 중단한 남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사윤을 관찰했다. 미세한 움직임 하나까지 다 잡아내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에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매서웠던 시선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저희가 상황을 파악한 건 조금 뒤였습니다. 단순히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고 보기엔 상황이 이상했죠. 먼저 눈치챈 건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해 본 이한 헌터였습니다. 그가 시간이 이상하다고 말했고 다른 헌터들도 놀라서 각자의 핸드폰 시간을 확인해 봤죠. 결과는 하나였습니다.”

“되돌아갔나?”

이후 상황이 예상이 가 묻자 이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으로 시간이 돌아갔더군요.”

한마디로 집단 회귀를 겪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대규모로 수습하다니 어지간히도 큰 오류였나 보군.

심문에서 들었던 말이 희미하게 기억났다. 시간선을 뒤틀었다더니 아무래도 축제 때 열린 게이트가 미래에서 열려야 할 게이트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지나치게 강하긴 했지.

잠시 생각하던 사윤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되돌아가 죽은 사람까지 모두 살아났다면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장면을 들키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건 반가웠는데 그런 거라면 저 역시 멀쩡해져야 하지 않나?

그런데 왜.

“왜 나는 3개월씩이나 기절해 있었지?”

“바로 그 점 때문에 다들 걱정했다는 겁니다. 모든 헌터가 무사히 돌아왔는데 사윤 씨만 깨어나지 못했거든요. 그 때문에 한 달 정도 축제에 참여한 헌터들이 사윤 씨가 깨어나길 기다렸는데 미동도 없더군요. 결국 일정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갔고 언제까지 제주도에 있을 순 없었으니 제가 사윤 씨를 데리고 길드로 돌아왔습니다.”

3개월씩이나 기절한 이유로 짐작이 가는 게 없지는 않았다.

심문.

그 심문에서 제 몸이 얼마나 다쳤었지.

정확히는 기억 안 나도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망가지긴 했었다. 아마 그걸 회복하느라 3개월이 걸린 모양이다.

이 빌어먹을 신들은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이재희가 설명을 이어 갔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할 얘기가 남은 모양이었다.

“비록 그날 있었던 일은 없던 일이 됐지만, S급 이상의 게이트가 열린 일은 그 자리에 있던 헌터들이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많았죠.”

“무슨 깨달음. 자기들이 너무 허접이라는 거?”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죠.”

비꼬듯 얘기했는데 의외로 이재희는 순순히 긍정했다. 사윤은 잠시 움찔거렸다가 이내 머리를 털었다.

“거기 있던 애들이 약하다기보단 그 게이트가 비정상적으로 강했던 거지.”

“그러니 다들 경각심이 든 겁니다. 언젠가는 그런 게이트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거니까요. 그 게이트가 사윤 씨가 없는 곳에서 열린다면 막아 낼 헌터가 있을까요.”

“막는 건 모르겠고 대응할 수 있는 헌터는 둘 정도 있지.”

화합의 축제에 참석하지 않은 헌터 둘. 거기에 애써 끼우자면 이한 정도일까.

그리 생각하고 얘기하자 이재희가 입을 열었다.

“막을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헌터는 없죠. 그래서 다 같이 이번 같은 게이트가 열리면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그 일이 조금 커져 세계 헌터 협회에 속한 나라 간 협정으로 이어졌고 각 국가별로 종말급 재난에 대처할 수 있는 헌터들을 나라에 묶어 두기로 했습니다.”

생각보다 일을 잘하는데?

사윤은 이어지는 설명에서 나라에서 종말에 대응할 특수 헌터 팀을 만들겠다고 한 얘기를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솔직히 손가락만 빨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처가 빨랐다.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던 와중 당황스러운 말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한국도 최상위 길드의 정예 헌터들을 모아 팀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윤 씨에게 그 팀에 들어오라는 제안이 왔습니다. 사실 말이 제안이고 반강제 영입이죠. 거절하는 순간 세계 공적이 되는 거니.”

“…….”

잠시 멍하게 있던 사윤이 손가락으로 제 몸을 가리켰다.

“나?”

“예.”

“내 길드?”

“예.”

“나 밤쥐 수장인데 재희야.”

“정부가 그걸 모르고 제안했겠습니까?”

물론 알고 제안했겠지만.

…여기 범죄 길드인데?

사윤은 당황스러워 물끄러미 재희를 바라보았다.

“오늘 혹시 4월 1일이니.”

“무슨 헛소리입니까?”

그래.

만우절은 아니구나.

아니, 정말로?

범죄 길드를 세운 이래 가장 황당한 순간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