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대격변 (5)
기이한 공간이다. 사윤은 심문을 시작하겠다 얘기해 놓고 가만히 서 있는 것 외엔 어떠한 것도 하지 않는 석상들의 중앙에 서, 제가 서 있는 곳을 살폈다.
천장이 없는 하늘에는 일곱 개의 거대한 별이 빛나고 있었으며 그 중앙에는 빛으로 쓰인 듯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딛고 선 곳이 세계다.
거꾸로 선 곳이 곧 지옥이고.
손을 들어 닿는 곳이 곧 천국일지니.
천사가 나팔을 불고 악마가 춤을 추는 곳으로 들어오리라.
저주는 가장 선량한 것에게
축복은 가장 악랄한 것에게.
운명, 그리고 운명.
영속된 운명은 머리가 꼬리를 물어 되풀이되니
묵시. 이것은 묵시.
괜히 몸에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잊고 있던 두려움이란 감정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떨렸다. 이유도 모르게 추락한 시선은 이번엔 발아래에 적힌 문구를 발견했다.
나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하늘을 바라보다
성스러운 깨달음에 의해 땅을 지켜보니
구원은 그 어디에도 없고 동시에 모든 곳에 깔릴지어다.
“…….”
뻐끔뻐끔,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손끝 하나 꿈틀거릴 수도 없었다. 사윤은 지존한 무언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못 이겨 속절없이 무너졌다. 감히 저항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경이롭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 무형의 힘을 직접 겪어 본다면 누군들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였다.
그때 등 뒤에서 뱀이 기어 나왔다.
거대한 뱀은 자리에 무릎 꿇고 앉은 사윤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와 스르르르, 움직여 검은 비늘로 사윤의 눈을 가렸다.
펄럭!
무언가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아아아.
어디선가 신성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나팔 소리, 한없이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 미성으로 울려 퍼지는 소년들의 노래.
드드드드.
공간이 뒤흔들린다. 그때 다시 한번 쾅! 하는 굉음이 들렸다. 사윤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불편한 마음으로 무언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사윤아.
친근한 듯 제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사윤은 흠칫 놀랐다. 근엄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저를 그렇게 부르니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음성은 다시 한번 사윤을 불렀다.
사윤아.
태양을 닮아 갈 소년아.
어리석은 죄인아.
한 음절, 한 음절. 들려오는 목소리가 쌓일 때마다 세계가 뒤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극심해졌다. 노랫소리가 더 크게 공간을 울린다. 목소리는 이제 하나에서 두 개로 늘었다.
사윤아.
그리고 또다시 그 두 배로.
사윤아.
네 개의 목소리가 이젠 다섯 개로.
태양을 닮아갈 소년아.
커헉!
사윤은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누군가 몸을 꽉 쥐는 듯한 느낌에 신음을 토했다. 콰드드득! 눈을 가린 뱀이 있는 힘껏 사윤의 몸을 조였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떨고 있는데 볼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깃털 같은 느낌이었다.
어리석은 죄인아.
빠드득!
결국 뱀의 조임에 의해 뼈가 부러진 모양이다. 사윤은 제 몸에서 들리는 살벌한 소리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벌려 숨을 컥 토해 냈다. 하나 신들은 무자비했다. 그들은 사윤이 격통에 몸부림치든 말든 자기들의 일을 계속했다.
네가 균형을 비틀었느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윤에겐 이 상황이 오직 당황스럽기만 했기에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때 뱀의 조임이 더 심해졌다.
“끅!”
사윤은 비명을 삼키며 입술을 콱 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네가 균형을 비틀어 미래의 존재를 현세로 불러와 혼란을 일으켰느냐?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답답해서 항의하고 싶었다. 아까부터 계속 알아듣기 힘든 말만 해 대꾸하고 싶어도 뭔 개소리냐는 말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윽. 사윤은 부서진 뼈가 장기를 찌르는 걸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대답하지 않으니 그를 처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뱀은 더욱 강하게 사윤을 조였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질식할 것 같아 얼굴이 퍼렇게 변한 사윤은 그제야 시스템이 띄운 문구를 다시 기억해 냈다.
‘심문에서 살아남으세요.’
알겠다.
이 심문에서 자신은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저들은 정말로 자신을 죽일 것이다.
죽는다고.
사윤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그거야말로 제가 원하는 일이다.
신이라고 했던가.
떨리는 눈동자가 힘겹게 올라가 거대한 석상들을 바라본다. 신이라고 하기엔 볼품없는 모양새였지만 이것이 저들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쯤은 10년간 키워 온 눈치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신은 신이다.
인간과 몬스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그런 자들이 저를 죽인다면,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죽음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쾅!
창끝이 한 번 더 땅을 내리찍었다.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곳에서 죽는다 하여 네 영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너는 그 영혼이 존재하는 한 네게 주어진 운명을 영속해야….
너무 많은 말을 하는군.
과했는가?
그렇다.
그렇군.
하나만 해라, 이 새끼들아.
말을 걸었다가 지들끼리 대화했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다.
덕분에 정보를 얻을 기회를 놓쳤던 사윤은 속으로 혀를 차고 입을 다물었다.
영혼이 살아 있는 한 주어진 운명을 영속해야 한다고?
새롭게 들은 개소리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신들은 다시 심문을 시작했다. 질문은 이전에 물었던 것의 연속이다. 균형을 비틀었냐느니 미래를 침범했냐느니 등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한가득했기에 사윤은 웃음을 터트렸다. 몸이 으스러지고 부러져도 웃고자 하면 웃을 수는 있나 보다. 뼈가 장기 속을 파고드는 고통을 견딜 수 있다면 충분히 웃을 수 있었기에 사윤은 폭소했다.
광기 어린 웃음이 노랫소리를 덮는다. 석상들이 불쾌한 듯 물었다.
무엇이 우습지?
“니들 하는 꼴이 우스워서.”
불경하다.
꽈아아악!
뱀의 조임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세졌다. 이제 사윤의 척추뼈는 그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몸이 뒤틀렸고 근육이 무너졌다. 형체를 잃은 몸은 뱀이 조이는 대로 뭉개지고 움츠러들 뿐이었다.
그런데도 사윤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뭔진 몰라도 니들이 계획한 일이 잘못됐나 보지? 전지전능한 줄 알았더니 인간 하나 붙잡고 이러고 있는 걸 보면 꽤 무능한 모양이야.”
섬뜩한 고통은 오히려 영원한 존재를 마주한 탓에 흐려졌던 이성을 깨웠고 두려움에 감춰졌던 분노를 자극시켰다.
저들이 신이다. 그래, 저들이 그 빌어먹을 신이었다.
제 삶을 지독한 진창에 빠트린 신 말이다.
그런데 제가 예의를 차려야 하는가? 더는 잃을 것이 없는데 두려워해야 하는가? 죽음도 무섭지 않은데 공포를 느껴야 하는가?
아니. 자신이 해야 할 것은 꼴사납게 움츠리고 겁먹어 덜덜 떠는 게 아니라 한 대라도 쳐 보고 싶었던 저 빌어먹을 작자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거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울분이 어떻게 풀리겠는가.
10년 하고도 약 10년이 더 있었다.
만 번의 죽음 속 강제 집행으로 되풀이된 삶만 3할이 넘는다.
그 긴 시간 동안 쌓인 분노와 억울함과 절망을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풀 수 있다면, 제 몸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그들을 욕해 분풀이할 수 있다면 어떻게 참겠는가.
“그래, 만나면 한번 물어보고 싶었지. 물어라도 보고 싶었지.”
사윤이 미친 사람처럼 홀로 중얼거렸다. 석상들이 인상을 썼다가 되물었다.
어리석은 죄인아. 물음에 답하거라. 네가 시간선을 비틀었느냐?
“왜 나야.”
사윤은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같은 방향으로 죽 그어 버린 일직선처럼 대화가 맞물리지 않았다.
“왜 나였냐고.”
이런 기회가 오면 이성을 잃고 악에 받쳐 소리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덤덤했다. 사윤은 지난 시간을 혼자서 복기했다. 처음 시스템창을 받고 그들이 부여한 제 성향을 알게 된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분노가 너무 차오르면 오히려 침착해지는 모양이다. 사윤은 들끓던 머릿속이 차게 식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왜 하필, 나였는데?”
고개를 든 사윤은 석상이 있을 장소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집요한 시선이 뱀 비늘을 뚫고 닿는 듯했다. 신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쾅! 석상 하나가 다시 바닥을 두드리자 그들은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자신이 시간선을 비틀었냐는 그 말만.
“시발! 지켜봤으면 내 짓이 아니라는 걸 알 거 아니야, 빌어먹을 새끼들아!”
사윤은 제 물음은 모조리 무시하고 저들의 의견만 밀어붙이는 이들에 열이 바짝 올라 소리쳤다. 그제야 석상들이 조용해졌다. 분노한 사윤이 흥분한 감정과 고통에 씨근덕거리고 있을 때다.
저울이 기울어지지 않았다. 네 말은 진실이구나.
저울이라고?
고개를 살짝 틀자 그제야 석상 중 한 명이 저울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보상을 주도록 하지.
자기들끼리 고개를 돌려 한 번 끄덕인 신들이 한 발, 사윤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한 발, 또 한 발. 사윤은 보이지 않아도 그들이 제게 바투 다가왔다는 걸 느꼈다. 당장이라도 거대한 발 아래에 깔릴 정도로 가까이.
석상의 그림자가 겹쳐져 사윤을 가렸다. 머리 위로 검은 하늘이 떴다.
왜 너였냐고 물었는가.
사윤아. 어리석은 죄인아.
태양을 닮은 어린 양아.
일곱 개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합쳐졌다.
그것이 우리가 정한 죄인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뭐?
검은 비늘 속 사윤의 눈동자가 커졌다. 부당하다 못해 억지라고 봐도 무방할 말에 분노가 치민 그때 일곱 석상이 동시에 바닥을 쿵 굴렀다.
노랫소리가 커진다.
아이들의 웃음은 이제 기도를 읊는 목소리로 변했다.
심문은 끝났고 운명을 짊어진 죄인을 위해 축복하리.
심문은 끝났고 운명을 짊어진 영웅을 위해 저주하리.
심문은 끝났고 운명을 이행 중인 세계를 위해 노래하리.
그 노랫말이 반복됐다. 몇 번이고 몇백 번이고. 그 노래를 들을수록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낀 사윤은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심문이 끝났고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걸.
하.
결국 얻은 거라곤 새로운 분노뿐이다.
스르르륵.
눈을 가린 뱀이 내려갔다. 사윤은 제 아래로 검은 홀이 생긴 걸 확인하고 고개를 치켜들어 일곱 석상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또 보자꾸나.
한 석상이 비릿하게 웃으며 두 번째 만남을 예고했다.
화아아악!
검은 홀이 강한 힘으로 사윤을 끌어당겼다. 거부할 수 없는 힘에 하릴없이 끌려간 사윤은 신의 석상이 있던 세계가 닫히는 걸 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마지막으로 처음 창을 내리찍었던 석상의 얼굴이 보인다.
거기 똑바로 있어라, 개새끼들아.
언젠가 니들의 그 가짜 몸이라도 다 깨부수러 올 테니까.
포악하게 이를 간 사윤은 빛이 눈앞에 들이닥치는 걸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만 번이 넘는 죽음 중 가장 역겨운 결말이었다.
* * *
<시스템 오류가 개선되었습니다.>
<업데이트된 시스템, 종말이 종말(1)으로 바뀌어 세계에 순차적으로 적용됩니다.>
<종말은 1에서 10까지 업데이트됩니다. 구원자들에게 건투를.>
<그리고 인류의 악에게 축복을. (b ᵔ▽ᵔ)b>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시스템창이었다.
“사윤 씨!”
그리고 가장 먼저 들린 건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다. 사윤은 잠시 시스템창에서 시선을 떼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재희였다.
“일어나셨네요. 이대로 못 일어나시는 줄 알고 다들 걱정했습니다.”
다들?
그 말에 사윤은 제가 누워 있는 곳을 확인했다. 익숙한 공간이다.
밤쥐 길드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당황스러웠지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사윤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가 온몸이 지끈거려 인상을 찌푸렸다. 이재희가 몸이 안 좋으니 얌전히 누워 있으라 충고했다. 그에 미간을 좁히며 상체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만족한 사윤이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없다.
“한건주는?”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미쳐 버린 게이트 포화 현장에서 걷은 유일한 수확이 보이지 않아 물으니 이재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설마.
사윤은 불길한 마음에 눈을 가늘게 떴다. 추궁하는 듯한 시선을 받은 남자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사라졌습니다.”
“…뭐?”
사라져?
사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다 이내 분노로 동공이 축소됐다.
사라졌다고. 이 새끼가 또 도망을 가?
시발 만난 날에 발목을 잘라 두었어야 했다. 성이 나서 주먹을 꽉 쥐니 이재희가 차를 따라 건넸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건주 씨가 직접 도망간 건 아닙니다. 제가 곁을 쭉 지키고 있었는데 기절한 채로 갑자기 사라져 버렸거든요.”
“기절한 채로 사라졌다고?”
“네. 꼭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요. 마침 제가 봤는데…, 음.”
이재희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쿨럭, 피를 한 번 토하곤 입가를 휴지로 닦았다.
사윤은 그 광경을 어처구니없게 바라보았다.
“건주 씨가 사라지기 전 건주 씨 앞에 시스템창이 뜨더군요. 무슨 창인지까지는 볼 수 없었지만,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사라진 게 아닐까요?”
이 새끼 지금 천기누설 쓴 거야?
너무 자연스럽게 써 눈치도 못 챌 뻔했다. 사윤은 기가 막혀 잠시 한건주도 잊고 떨떠름해했다가 시스템이 데려갔다는 듯한 말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제 발로 도망간 게 아니라 시스템이 강제로 이동시킨 거란 말이지.
대체 왜?
의문을 표하고 있을 때였다.
<성향 ‘저항하는 자’를 활성화하거나 관련 정보를 열람하려면 다음의 성향을 보유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º □ º l|l)>
-천상천하 유아독존
[퀘스트 – 활성화를 위한 첫 번째 걸음]
종류: 저항하는 자 퀘스트
진행 인원: (1/2)
‘성향 보유자와 재회하세요.’
상세: 천상천하 유아독존 성향 보유자와 재회
보상: 활성화를 위한 두 번째 걸음 진행 가능
이전에 본 듯하면서도 새롭게 개편된 듯한 퀘스트창이 사윤의 눈앞에 떠올랐다.
흐름을 비트는 자가 사라지고 오로지 천상천하 유아독존만 남은 퀘스트창이.
“하.”
사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