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대격변 (4)
―크어어어어어!
종말을 읊는 울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을 날던 몬스터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예외는 없었다. 설령 추락하지 않은 놈들이 남아 있다 해도 녀석들은 알아서 땅으로 내려와 날개를 접었으니.
그 누구도 날아오르지 않는다. 마치 하늘은 저놈의 영역이라는 걸 인정한 것처럼.
땅으로 내려온 몬스터들이 충신이라도 되듯 본 드래곤을 향해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몬스터가 같은 몬스터에게 복종 의사를 표하다니. 처음 보는 광경에 헌터들이 혀라도 뽑힌 양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당황과 공포에 전염되어 있을 때 사윤은 멍하니 제 앞에 뜬 시스템창을 바라보았다.
<종말의 파수꾼이 땅 위로 도래했습니다! 시스템 종말이 시작됩니다!>
<당신은 진정한 인류의 악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악신을 따르는 파수꾼들과 함께 행성 9180호 ‘지구’를 멸망시키세요. (b ᵔ▽ᵔ)b>
지긋지긋한 문구다. 무척 지긋지긋하고 뇌리에 낙인처럼 남아 결코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문구였다. 그런데 그 문구가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늘 보던 것과 미묘하게 다르다.
뒤늦게 자각하고 눈을 크게 뜬 순간이었다.
[!!! Error! Error! !!!]
<당신은 진정한 인류의 악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악신을 따르는 파수꾼들과 함께 행성 9180호 ‘지구’를 멸망시키세요. (b ᵔ▽ᵔ)b>
<당신은 인류의 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구원자들에게 맞서, 행성 9180호 ‘지구’를 멸망으로 이끄세요. (b ᵔ▽ᵔ)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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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 계시를 향한 첫 번째 걸음]
‘파수꾼과 함께 섬 하나를 함락시키세요’
조건: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파수꾼 ‘본 드래곤’과 함께 제주도를 멸망으로 이끄세요.
보상: 10,000카르마
실패 시: ???
남은 기간: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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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에러 창이 뜨며 기존 문구에 줄이 죽죽 그어지더니 다시 익숙한 문구의 알림창과 함께 신규 퀘스트가 떴다.
뭐라는 거야?
사윤은 눈앞을 빼곡하게 채운 알림창에 잠시 당황했다.
모든 게 갑작스러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이해하면 될지 그 시작점도 가늠하지 못하겠어, 인상을 찡그린 순간이다.
“커헉!”
잊고 있던 통증이 치솟았다.
“커거걱!”
사윤은 마치 숨통이 조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꺽꺽거리며 바닥을 짚었다. 주르륵, 흘러나온 피가 입술 사이로 샜다. 격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터트린 순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인 피들이 흘러나왔다.
검붉은 피였다.
쩌저적.
손끝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통제되지 않는 능력에 도리어 삼켜지기라도 한 것처럼 손끝부터 시작해서 몸이 서서히 얼어붙고 있었다. 몸뚱이 자체도 빙하에 파묻혀지기라도 한 듯 차가웠다. 이 현상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사윤은 가슴팍을 꽉 쥐고 공벌레처럼 몸을 말았다. 품에 안고 있던 건주가 제 무게에 짓눌려 질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수그린 채 신음을 참았다.
제기랄.
제한 시간이 다 됐다.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어 목록을 뒤졌다.
화염단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 지금 복용해도 늦었다.
증상이 시작된 이상 뭘 먹어도 막을 수 없었기에 포기한 사윤은 발작하듯 들썩거리는 몸에 욕설을 짓씹었다. 쿵쿵쿵! 심장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빠르게 뛰었다.
빌어먹을. 시스템은 이 사실을 알고서 저를 현혹시킨 게 분명했다. 다른 때였으면 잊지 않고 먹었을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 망할 시스템이 괜한 창을 띄워서.
사윤은 욕을 짓씹으면서도 허공에 뜬 시스템창을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재수 없는 시스템창이 그런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 반짝거렸다. 덕분에 사윤은 푸른 창에 뜬 문구를 다시 읽어 보게 됐다.
증명 퀘스트는 끝난 건지 신규 퀘스트의 카테고리는 종말로 바뀌어 있었다.
계시를 향한 첫 번째 걸음이라니.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무엇이 바뀌고 있는 걸까.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거지?
애초에 종말은, 이미 시작된 거 아니었나?
게이트가 나타나면서부터 세상에 종말은 시작되었다. 인류는 한참 전부터 그 재난을 이겨 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종말이 시작된다니. 그럼 여태 겪었던 그 일은 다 뭐란 말인가.
혼란 속에서 사윤은 한 번 더 각혈했다. 아, 몸이 얼음에 잠식당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이대로 피가 얼어붙고 뇌수마저 얼어붙었을 땐 심장까지 꽁꽁 얼어 죽음을 맞이하리라. 기어코 모두에게 제 자살 쇼를 보여 주게 된 거다.
하.
사윤은 어이가 없어 제 품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수확이 아예 없진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그 수확의 상태가 하필이면 이 꼴이라 절망적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기절한 한건주는 상처투성이였다. 떨어질 땐 그 속도가 빨라서 몰랐는데 막상 이렇게 가만 놔두고 보니 그의 팔과 다리는 날카로운 것에 할퀴고 뜯기기라도 한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특히 어깨 쪽은 살점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 있어 숨이 붙어 있는 게 용한 수준이었다.
이제 보니 배도 완전히 관통당했군.
상처의 모양이 꼭 피어에 뚫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싸운 건가? 저 본 드래곤과?
그런 거라면 대체 어떻게.
저만한 몬스터가 나올 정도로 강한 게이트가 열렸다면 사윤이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른 S급 게이트가 열렸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설마.
그가 제 곁을 떠났을 때 빠졌던 게이트.
그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건가?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이 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합리적인 의심이라 고민하던 사윤은 생각을 오래 이어 가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얼음이 몸의 절반을 뒤덮은 탓이다.
―크어어어!
“시발, 튀어! 튀라고!”
총체적 난국은 헌터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빠져나온 본 드래곤이 울부짖으며 피어를 내뿜자 혈벽이 무너지고 건물이 초토화되었다.
시발 저게 무너져?
혈벽 관리를 어떻게 했으면 저렇게 형편없이 무너진단 말인가. 제 몸만 멀쩡했으면 송양에게 따졌으리라.
그리 생각한 사윤은 무의식중에 송양을 찾아 눈동자를 굴리다 흠칫 놀랐다.
의외로 송양은 도망치지 않고 자리에 남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치지 못했다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그는 자리에 쓰러져 있었으니까.
혈벽을 치기 위해 바닥을 짚은 자세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 송양의 머리 앞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 옆에 그를 지키고 있던 라이언의 수장이 함께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 본 드래곤이 쏘아 낸 피어에 직격으로 맞은 모양이었다.
“으아아아악!”
“살, 살려…!”
“아….”
혈벽과 건물이 무너졌다. 그렇다면 공간 제약을 벗어난 몬스터들이 어디로 향하겠는가?
풀려났다.
S급 몬스터들은 절반은 홀에 남고 절반은 파티장 밖으로 빠져나가 일반 시민을 공격했다. 피가 이리저리 튀고 울음이 들렸다가 비명으로 바뀌더니 이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됐다.
빠아아앙!
날벼락 같은 재앙을 만나게 된 자동차들이 클랙슨을 빵빵 울려 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돌림 노래라도 하듯 울려 퍼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사윤은 버티고 있던 몸을 그대로 고꾸라트렸다.
더는 저항이 불가능했다.
온몸이 얼어붙었는데 뭘 어떻게 더 버티겠는가.
쩌저적.
한기가 눈의 점막까지 몰려왔다. 멀리서 이재희가 다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새끼는 상황이 이렇게 되면 그냥 튈 것이지.
누가 봐도 가망이 안 보이는 전투에서 끝까지 싸웠던 건지 그의 몸도 저 못지않게 만신창이였다.
어이고. 팔 한쪽은 잘려 나갈 뻔한 걸 포션으로 애써 붙여 놓은 것 같은데.
저 정도는 돼야 세계를 구하겠다고 미쳐 있을 수 있나 보다.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사윤 씨!”
이재희가 제 이름을 불렀다. 사윤은 눈만 도륵 굴려 건주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 또 도망 못 가게 잘 붙잡아 둬라.
입이 얼어붙어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눈짓으로 얼추 제 의사가 통하길 빌었다.
시야가 점멸했다.
<‘활성화를 위한 두 번째 걸음’ 퀘스트가 ‘활성화를 위한 0번째 걸음’으로 변경됩니다! (º □ º l|l)>
<새로운 퀘스트를 업데이트합니다. (º □ º l|l)>
[퀘스트 – 활성화를 향한 0번째 걸음]
악으로서 삶을 마감할 것인가?
정신을 잃기 직전 활성화와 관련된 새로운 퀘스트가 떴다. 퀘스트가 두 줄밖에 되지 않는 건 사윤이 다 죽어 가 그 아래 글씨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져 그런 것이 아니다. 정말로 쓰다 만 것처럼 퀘스트가 덜 작성되어 있었다.
‘상세: 심문에서 살아남으세요.’
마우스 커서가 깜빡거리듯 퀘스트창이 깜빡거릴 때마다 새로운 글자가 하나씩 생겨났다.
‘보상: 활성화를 위한 첫걸음 진행 가능’
‘실패 시:’
아….
정신이 조금만 더 버텨 주면 좋겠는데 여기서 한계인 모양이다. 사윤은 퀘스트에 실패할 경우 뭐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계속해서 저를 부르던 재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놓치지 않기 위해 품에 꽉 안고 있던 건주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으며, 앞을 보려 애써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포기했다.
어둠도 빛도 없다.
애초부터 시각이란 감각이 없었던 것처럼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 않았다. 얼음이 결국 망막까지 모두 얼려 시신경을 고장 낸 것이다.
쩌저저적!
올라온 한기가 그대로 심장까지 얼게 했다.
서리 단약을 복용한 게 이렇게까지 흘러갈 줄이야.
속으로 혀를 찬 사윤은 그렇게 익숙한 죽음을 맞이했다.
죽을 것 같던 통증에서 벗어나 정말로 죽었으니 곧 다시 눈을 뜨게 될 거다. 늘 그랬던 것처럼, 죽은 시간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비교적 편해졌다.
의식이 완전히 꺼진다. 곧 닥칠 완전한 죽음과 부활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현세의 시간선이 뒤틀렸습니다! 오류로 시스템이 자동 업데이트됩니다!>
<시스템 자동 업데이트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신들이 분투합니다!>
<분노한 신들이 시간선이 뒤엉킨 원인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원인으로 당신이 지목되었습니다.>
<신들이 투표를 시작합니다.>
<심문이 시작됩니다. 행운을 빕니다.>
낯선 음성들이 귀에 때려 박히듯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 정신없는 목소리에 일순 당황한 사윤은 이윽고 눈을 떴다.
그래, 생각했던 대로 눈을 떴긴 떴다.
다만 그게 익히 알던 지구가 아니었을 뿐이지.
사윤은 새하얀 석상 일곱 개가 저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빛으로 가득한 낯선 장소에서 눈을 떴다.
여긴 또 어디야.
만 번을 넘게 죽어 봤지만 이런 곳에 온 적은 처음이었다. 당황한 사윤이 고개를 두리번거린 그때였다.
콰아아앙!
창을 들고 있던 석상이 새하얀 창으로 바닥을 내리찍자 가공할 만한 굉음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그에 사윤은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고 잠시 굳어 제 앞을 바라보았다. 눈이 번쩍 빛난 석상과 시선이 마주쳤다.
심문을 시작하지.
석상 중 한 명이 얘기했다. 귀로 전해지지 않고 머릿속을 침투하듯 들린 목소리에 얼이 빠져 있던 사윤은 문득 쓰러지기 직전에 보았던 퀘스트창을 떠올렸다.
‘상세: 심문에서 살아남으세요.’
빌어먹을.
아무래도 제 기구한 팔자가 또 기막힌 시련을 마주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