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145)화 (145/266)

제145화. 대격변 (3)

“미친 새끼들아! 밀리지 마!”

“제길 서포터 있으면 지원 좀 오라고! 이러다가 다 뒈지게 생겼네!”

“혼자서는 못 제압해! 몇 명 더 붙어!”

“으아아아아!”

사지에서 헌터들이 분투했다. 그들의 목덜미와 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전투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잠깐 한눈팔면 옆자리에 있던 동료의 팔이 날아갔고 화합의 축제를 통해 겨우 안면을 익히게 된 자의 목이 몸과 분리되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은 사방에서 들려온다. 누군가는 친구를 잃었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으며 누군가는 팔을, 누군가는 다리를 잃는 그러한 현장에 준비도 없이 서 있게 된 헌터들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적의 머릿수는 끔찍하리만치 많다.

열을 베어 내면 그 서너 배가 몰려들어 와 전투 의지를 침몰시켰다.

S급이 되고 나서 단 한 번이라도 이러한 공포를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아득한 적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아아악!”

성향이 악으로 치우친 게 아니고서야 사람이 처음 검을 드는 순간은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 살고자 하는 의지가 몸을 지배했을 때다. 모든 헌터가 겪은 첫 번째 살해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제는 이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아득한 일이 되어 버린 그 과거의 감정이 틀어쥔 검을 타고 흘러들어 와 뇌수까지 물들였다.

―키에에엑!

몬스터들의 울음이 자꾸만 손에 든 검을 놓고 싶게 만들었다. 그걸 견뎌 내고 검을 휘둘렀으나 전세는 여전하다. 그것이 암담했다.

기실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S급 몬스터 한 마리씩만 두고 보면 그들도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상대였다. 싸우기만 할 뿐일까 손쉽게 이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개미도 수천 마리씩 몰려오면 막강한 법이다. 하물며 개미가 아닌 S급 몬스터들이 수백 마리 몰려오는 상황이면 어떠할까.

꼭 몬스터로 만들어진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베고 베어도 끝나지 않는 전투가 심력을 소모시킨다.

두려웠다.

휘두르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검을 놓고 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두려웠다.

그런데도 검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콰아아아앙!

굉음을 동반한 돌풍이 게이트 앞에서 몰아쳤다. 그 풍압에 몬스터들이 휘말려 비명을 내지른다. 날고 있던 개체는 추락했고 땅을 딛던 놈들은 순식간에 바닥을 기게 되었다. 쳐다보지 않으려 해도 시선을 채 가는 이의 전투에 헌터들은 싸우다가 말고 종종 게이트 쪽을 돌아보았다.

이 전쟁의 최전선에 서, 압도적으로 적을 처치하고 가장 많은 이를 구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을.

시선이 닿는 곳에 사윤이 있었다.

모두가 주춤거릴 때 혼자 앞서기를 자처한 그가 이 전투를 진두지휘하는 건 물론이고 전세 자체를 바꾸고 있었다.

그러니 검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정상급이란 헌터의 이름값으로 이 축제에 참석했는데 개인에게 축제에 참석한 헌터 대부분이 밀리면 되겠는가. 그러고서도 면이 서겠는가.

그래서 맞서 싸웠다. 악을 내지르며, 그 이름값을 다하기 위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싸운다고, 검이 부러지면 검의 손잡이에 강기를 덧대 싸웠고 마력이 부족하면 육탄전으로 몰아붙이며 싸웠다. 빈 포션 공병들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그쯤 되자 헌터들은 문득 의아해졌다.

이 전투의 최고 기여도를 찍고 있는 자는 범죄 길드의 수장이었다. 밤쥐의 길드원들이 틈만 나면 세상의 멸망을 읊조리고 다닌다는 사실은 헌터계에 꽤 있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수장이라는 자가 피해 좀 줄여 보겠다고 이토록 분투하는 현장이라니.

의문스럽지 않은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윤으로 인해 피해를 본 적이 있었다. 목숨이 아까운 걸 알아 따지고 들지는 않있지만 대부분이 피해를 봤기에 사윤의 성정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가볍고, 변덕이 심하며 능청스러운. 그러나 처치하기로 결심했으면 자비가 없는 상대였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그의 변덕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등쳐 먹고 살려면 사람들이 많이 살아야 하니 훗날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리는 건가?

실로 의문스러웠지만 그 고민은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전투 중 딴생각을 오래 품을 만큼 만만한 전장이 아니었기에.

콰아아앙!

“7시!”

카각!

몬스터 무리를 통째로 날려 혈벽에 처박은 사윤은 위에서 들려오는 경고에 곧바로 봄의 여명을 꺾어 쥐었다. 간발의 차로 공격을 막고 다시 반격한다.

“또 2시 방향!”

그레이나 옵저버의 효과는 꽤 좋았다.

컹!

재희가 빌려준 라이의 실력도.

사윤이 한 번에 수십의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어 대응이 어려울 듯하자 펜리르가 나서 몬스터를 상대했다. 그로 인해 펜리르의 등에서 잠시 내려오게 된 사윤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 얼음들을 보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검 끝에서 빙정이 꼭 꽃처럼 피어났다. 그것들은 이내 몬스터 무리들을 향해 달려들어 피라미처럼 놈들의 체력을 떨어트렸다. 둔해진 적을 처리하는 건 사윤의 몫이다.

투두두둑.

놈들의 목과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를 틈도 주지 않고 숨통을 끊은 사윤은 문득 흉곽이 꽉 조이는 듯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권사윤!”

지켜보고 있던 그레이나가 비명처럼 외쳤다.

“망할 놈아! 너 망하면 여기도 다 망하는 거야! 이 악물어!”

시팔 응원 한번 친절하기도 하지.

재수 없어서 정신이 확 든다. 사윤은 서리 단약의 부작용이 벌써 시작되는 것 같아 입술을 꽉 씹었다. 뼛속까지 한기가 침투해 온몸이 시렸다. 제 검이 되어 주었던 서리의 기운이 이젠 비수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역습했다. 차가운 기운이 피를 얼어붙게 만드는 듯해 소름이 끼친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얼어붙은 몸을 강제로 움직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검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그것이 티 나지 않도록 더 강한 힘으로 검을 꼬나쥔 사윤은 긴 숨을 토해 냈다. 입에 얼음을 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운 숨이 흘러나왔다.

“너 괜찮아?”

그레이나가 걱정했다.

“안 괜찮으면 뭐 어쩌게.”

사윤은 검을 한 바퀴 돌렸다가 다시 쥐며 라이를 불렀다. 몬스터 한 마리의 숨을 끊어 놓은 펜리르가 파바밧 달려와 바짝 엎드렸다. 그 등에 올라탄 사윤은 전장의 상황을 살폈다.

그럭저럭 다들 잘 버티고 있었지만 부족했다.

“검 똑바로 들어 새끼들아! 눈 똑바로 뜨고 스킬 맞추고! 나가떨어지는 놈들 기억해 둘 테니까 알아서 처신해!”

일갈하듯 뱉어 낸 외침에 헌터들이 화들짝 놀랐다.

“으아아악!”

그들이 악을 내지른다. 겁박으로 키운 사기였지만 지금은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그나마 둘이라도 있어서 다행인가.”

사윤의 기준으로 대부분의 헌터들이 어중간했지만 적어도 두 사람만큼은 제대로 싸우고 있었다. 이한과 벤터. 이한이야 국내 헌터였으니 한국에서 종종 소식을 들어 현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는데 벤터는 4년 전에 보고 처음이었다. 전에도 못 쓸 수준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강자로 인식될 만큼 변했다. 놈이 휘두르는 사슬에 대여섯 마리의 몬스터들이 속박당해 있는 걸 보면 4년간 놀고먹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저 둘이 중심을 잡아 줄 거라 고개를 돌린 사윤은 습관적으로 볼을 닦았다. 묻은 건지 흐른 건지 모를 피가 손등에 묻어 나왔다.

“다시 가자.”

담백한 명령에 라이가 땅을 박찼다.

그 뒤로 5분.

사윤이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전력으로 싸운 시간이다.

마력 포션만 스무 병을 비웠고 무리한 신체가 비명을 질러 댔다. 공격당한 치명상은 없었어도 사윤이 묘기에 가까운 동작으로 전투를 하느라 혹사당한 뼈는 어긋나 있었다. 그걸 틀어 맞춘 뒤 사윤은 마지막 일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가!

“저 미친 새끼!”

혈벽에 막강한 충격이 가해지자 송양이 피를 토하며 벽을 메꾸었다.

챙그랑!

기어코 사윤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그 소리에 모두가 놀라 사윤을 돌아보았으나 사윤은 떨어진 검을 줍지 않았다.

웨이브가 멈췄다.

그 말은 즉 포탈 안에 있던 몬스터들이 전부 튀어나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수의 8할이 숨이 끊어져 시산이 되었다.

총 전투 시간은 55분이다.

결심했던 시간보다 25분이나 더 걸린 전투였지만 그만큼 마무리는 확실했다.

남은 몬스터는 쉰 마리도 채 되지 않는다. 이 정도는 남은 헌터끼리 처치할 수 있을 거라 사윤은 고개를 젖혔다. 검을 떨어트린 마당에 각혈하는 모습까지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그때였다.

[!!! Error! Error! !!!]

[!!! Error! Error! !!!]

[!!! Error! Error! !!!]

[!!! Error! Error! !!!]

[!!! Error! Error! !!!]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시스템의 가동이 일시 중단됩니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낯선 문구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그건 비단 사윤에게만 뜬 창이 아닌 건지 싸우던 헌터들이 전부 당황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시발. 이젠 이거까지 미쳐 가나.”

그들이 험악하게 반응하고 있을 때였다.

“다들 숙여!”

그레이나가 전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미래시가 있는 그레이나다. 사윤은 영문도 모르면서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콰가가가가!

직후 검은 광선이 사람 머리가 있을 만한 높이로 일직선이 되어 뻗어 나갔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빛이었다.

오싹!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각이 사윤을 덮쳤다.

파르르. 속눈썹이 떨린다. 각성한 이래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공포심이 사윤의 몸을 짓눌렀다. 경악한 사윤은 뻣뻣하게 몸을 세워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웨이브가 끝난 줄 알았던 게이트가 누군가 찢어발기기라도 한 것처럼 양옆으로 지익 갈라지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낯선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머리다.

파충류 특유의 삼각형 머리가 게이트 안에서 쑥 튀어나왔다.

“아….”

헌터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누군가는 전율했다.

사윤은 머리에 이어 놈의 몸통이 게이트에서 빠져나오는 현상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드래곤?”

뼈대만 있었지만, 용과 싸워 본 적 있는 사윤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녀석은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사윤이 살면서 본 몬스터 중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풍기는.

본 드래곤.

그리 칭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등장에 누군가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신음처럼 흘러나온 목소리가 전장을 채웠을 때였다.

“저건 또 뭐야?”

경악하고 있던 헌터 중 한 명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중얼거렸다.

“사람?”

또 누군가 정보를 덧붙였고,

“사람인 것 같은데?”

누군가 확신을 더했다. 그 소란에 본 드래곤에서 시선을 뗀 사윤은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찢어진 게이트 사이로 사람이 추락하고 있었다.

“……!”

정신을 잃은 듯 무력하게 추락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사윤은 저도 모르게 땅을 박찼다.

무슨 생각으로 움직였는지 모른다.

그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처럼, 관성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때 쑥! 본 드래곤의 앞발이 게이트에서 튀어나왔다. 녀석은 자신과 함께 게이트에서 나온 존재가 거슬린다는 듯 지천이 뒤흔들리게 울부짖더니 거대한 발로 추락하는 사람을 쳐 냈다.

“한건주!”

경악한 사윤이 비명을 지르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내달렸다.

땅을 크게 박차고 뻗은 마지막 한 발에 간신히 건주의 몸이 손끝에 닿았다. 몸을 내던져 그를 품에 안은 사윤은 남자와 함께 바닥을 엉망진창으로 굴렀다.

―그어어어어어!

게이트에서 절반 이상 빠져나온 드래곤이 울부짖는다. 여태껏 조우한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세와 격에 헌터들이 짓눌렸다.

<시스템이 업데이트됩니다! 새로운 시스템, ‘종말’이 행성 9180호에 적용됩니다.>

<살아남거나 멸망시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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